맙님께 짤막하게 말세아리

세상의 연인들 중 열에 여덟은 서로를 의심해 싸우고, 헤어지고, 마음이 멀어져 다른 상대를 가까이 두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폐하, 우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소원히 여기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의심할 일도 싸울 일도 멀어질 일도 영원토록 없겠지요. 사실 당신을 처음 뵐 때는 이렇게 여자도 연애도 모르는 순진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국의 폐하. 저의 폐하가 되어주셔서 기뻐요. 앞으로도 저의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으실 거예요. 약속할게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날, 아리스텔리아가 마르세우스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냄새가 납니다, 폐하. 살 냄새요. 여자를 취하고 바로 제게 오시나요?”

“아름다운 아리스텔리아여. 그대가 아내의 책무를 다해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아 그렇지.”

아리스텔리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오늘은 또 어떤 여자를 구하신 건가요.”

“궁금한가, 아리스텔리아?”

“아니요. 그런 것 알아 저와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모습에 다른 눈이 아프게 찔러 온다. 오늘 마르세우스는 아리스텔리아의 얼굴을 볼 엄두가 되지 않아 그녀의 등을 돌렸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달큰한 향이 날 때 즈음. 이제야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기억의 기록으로 박제되어 잊혀지지 않는 그녀를 닮았기에 그는 약속을 지키는 그녀의 얼굴을 안심하고 바라볼 수 있었다.

홀든자넷(꼬마검들)

그때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만으로 열 살, 이글 홀든이 열두 살, 벨져는 열네 살 다이무스는 열일곱 살이었다. 만날 때마다 무슨 까닭인지 심기를 긁어놓고 기세 좋게 날뛰는 (다이무스를 제외한) 두 형제를 크리스티네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형제 둘이 겉보기보다 훨씬 죽이 잘 맞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자애들이 크리스티네보다 나이도 많고 키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자아이는 사내아이보다 좀 더 이른 성장기를 맞는 법이라. 이글이 프리츠 가문의 검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자신들 같은 어린 후계자가 없지 않냐고 놀렸을 때 크리스티네는 이글의 목 바로 앞까지 서슬 퍼런 레이피어를 들이밀었다.

“나와 겨뤄 보면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을걸?”

흥미를 느낀 벨져가 심판을 보았다. 이글은 내심 요 맹랑한 여자애 성격이나 자세가 좋은 것에 구미가 당겨 실력이 얼마나 되나 간이라도 볼 심산이었다. 기본적인 포즈나 흔들림 없이 전방을 멀리 보는 눈빛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봤자 여자애라, 태도를 들고 쓰는 홀든 가문의 검술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부드러웠다. 자기 키보다 큰 태도를 들고 막으면 저런 공격 못 막을 리가 없지. 이글은 빙글빙글 웃으며 공격을 여유 있게 흘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여자아이는 멀리 나가떨어져 좀 심했나 싶던 찰나, 소녀는 바닥을 딛고 빠른 스텝을 밟으며 이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칼끝이 거의 눈앞에서 이글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제압당할 위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갑자기 품으로 파고드는 계집아이의 얼굴에 당황해버려. 이글의 빠른 시력과 본능은 반사적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아냈다. 한 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기세 좋게 마지막 승리의 쐐기를 박으려던 크리스티네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아얏!”

“뭐야, 크리스티네. 너무 진지하면 재미 없잖아.”

그리고 이글은 그대로 칼을 들어 용케 놓지 않은 크리스티네의 손에서 레이피어를 쳐내버렸다. 소년의 발밑에 크리스티네의 드레스 자락이 밟혀 있었다.

“이글이 이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벨져의 목소리에 크리스티네는 바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번쩍 들었다.

“받아들일 수 없어. 이글은 비겁한 방법을 썼다고. 이건 정정당당하지 못해!”

벨져는 잠시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직접 눈으로 본 크리스티네의 실력은 확실히 기대 이상이었다. 홀든 가의 아이와 대등하게 겨룬다는 것 자체가 그들 형제 외의 타인, 그것도 여자아이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신속함과 날카로운 시야 역시 그가 보아 온 여느 검사들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기가 달랐다. 크리스티네의 검술을 유심히 살펴 보면 아직 기술이 모자라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 소모되는 힘을 줄이고 빠지는 법, 가벼운 동작으로 상대를 교란시키는 법. 적어도 검을 배운지 몇 년 이상 되지는 않은 것 같아, 계속 싸우다가는 분명 사소한 부분에서 격차가 벌어져 힘만 잔뜩 뺄 것이 뻔했다.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일부러 결정지어 준 것인데. 벨져는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티네. 네가 보통의 짐덩어리보다 조금 나은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네가 여자인 이상, 갈수록 우리와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벨져 홀든이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칭찬이었으나, 명문 프리츠 가문의 검사들에게 칭찬을 자자하게 들어온 크리스티네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소녀는 그대로 다시 쥔 검끝을 돌려 벨져에게 향했다.

“나는 그냥 여자가 아니야. 프리츠 가문의 여자지!”

“쯧.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팔을 괸 채로 벨져가 혀를 쯧 찼다.

“네가 검술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지금 네가 얼마나 편한 환경에 있는지 알고 있나? 우리가 최고의 검술을 잇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는지는 알아? 방금도 드레스 자락을 밟혀서 졌지. 그런 드레스. 그런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하고 다니면서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 것 같아?”

뭐라는 거야, 저 새끼는. 순간 긴 머리를 높이 묶은 이글이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벨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네는 자신답지 않게 분에 잔뜩 겨워 이상한 점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드레스는 벗으면 돼. 머리카락은 자르면 되고!”

“자기가 얼마나 보호받는지도 모르는 여자애가. 그럼 해 봐.”

경멸하는 어조에 어린 크리스티네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벨져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검을 잡았다. 왼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채를 쥐었다.

망설임 없는 행동에 벨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그러나 이미 한번 뱉은 말을 취소하기엔 벨져 홀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크리스티네가 팔을 확 당기고, 벨져가 뒤늦게 후회하려는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크리스티네의 손을 잡았다.

“내가 부탁하지, 크리스티네. 지금 행동은 거두어 주었으면 해.”

그러나 이미 뿔이 잔뜩 난 작은 아가씨의 고집을 파하기에는 과묵한 다이무스의 부탁도 충분하지가 못했다.

“상대에게 행동을 거두라는 말을 할 때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다이무스 홀든 경.”

다이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 크리스티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예쁜데 자르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나는 크리스티네의 지금 모습이 마음이 든다. …이걸로는, 불충분하니?”

크리스티네는 순간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뇨.”

“그러면 됐구나. 가자. 한나 유모가 맛있는 파이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

크리스티네는 다이무스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머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다이무스의 동생들은 뭔가 일 돌아가는 게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툴툴거리느라 크리스티네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고 따라서 다이무스와 크리스티네가 나누는 대화를 듣지는 못했다.

“있죠, 오빠.”

소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한 결의에 차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절로 발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나중에 언젠가, 정말로 벨져 말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면… 그러면 그때는 내가 싫어요?”

다이무스 홀든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잠시 머리를 짧게 자른 크리스티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좀 더 자라난 소녀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크리스티네를 돌아보니, 실제의 소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여운 소녀. 다이무스는 크리스티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소녀를 안아 올리고 귓가에 작게 대답을 속삭였다.

크리스티네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행복하게 웃었다.

“그럼 괜찮아요.”

 

나에게 그녀는 언제나 소녀. 처음 느낌 그대로.

[루이틀비] 담배피는 트리비아 보고싶다

연합 능력자들의 틈바구니를 겨우 빠져나와, 지치고 상처입은 그들처럼 허름한 방이었다. 루이스는 거듭된 전투로 만신창이었고 트리비아는 필사적인 비행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것 같았다. 떨어져나간 가구는 널빤지로 대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새었다. 조명 불빛은 밝질 않고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깜박였다. 다행히도 침대는 두 개 있었는데, 한 쪽에서 트리비아 카리나가 벽에 등을 대고 짐짓 무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루이스는 꽤 지쳤을 텐데도 긴장을 하는 티도 그렇다고 놓은 기색도 없이 자신 쪽으로 얼굴을 똑바로 향한 그녀가 완전한 화보 속의 모델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고마워요, 트리비아.”

“뭘.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당신을 구한 건 아냐. 아, 그렇다고 연합을 위해서 몸 바쳐 봉사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 왜…”

“글쎄, 왜일까?”

그녀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내리자 까만 곱슬머리가 어깨 위로 기울어져 내렸다. 그녀는 그대로 다리를 옆으로 돌리고 망사로 된 밴드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일련의 동작 하나하나가 화보 속의 한 장면 같아 작품을 감상하듯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루이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번쩍 일어났다.

“먼저 씻을게요.”

그녀는 대답 없이 박쥐 같은 눈동자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홱 고개를 돌린다.

“저기, 트리비아?”

그녀는 고양이처럼 꼿꼿이 등을 세우고 방 구석의 탁자 위로 걸어갔다. 언제 챙겼는지 커다란 파이프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반쯤 열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래도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돌았다. 마약에 취한 것 같았다. 루이스는 그대로 멍하니 물었다.

“담배를 피나요, 트리비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루이스는 등 뒤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예전에는. 모델은 때로는 사진 속에 담기기 위해서 별별 일을 다 해야 하거든. 하지만 건강에는 확실히 좋지 않아서. 사실 그렇게 취향도 아니고. 날개를 공개하고 런웨이에서 내려온 이후로 그만 뒀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담배도 핀다고요?”

“응. 당신은 모르겠지… 하지만 아마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사람이 시선을 끌고, 정상의 자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해. 나 같은 모델에게는 나만의 특징적인 그림이, 패션을 완성시켜주는 아이템이 필요했지. 그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이 담배였어. 당신이 보기에는 어때, 루이스?”

“이제는 필요가 없겠네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멋진 날개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에서 파이프를 떼었다. 그러나 곧 다시 눈을 내리깔고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 위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저 씻을게.”

그녀는 다시 런웨이의 모델처럼 빙그르 뒤를 돌고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런데 트리비아.”

어떤 것이 후회할 일일까? 어떻게 해야 지금의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앤지 헌트를 호위하면서, 홀든 가의 귀검사들을 만났을 때, 그리고 벨져를 단신으로 상대할 때 그는 수도 없이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지금만큼 치열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한 번 잃었기에. 그만큼 더 조심스럽고 귀중했기에.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런웨이도 아닌 지금, 취향도 아닌 담배를 지금 왜 다시 핀 거죠?”

이 순간 루이스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거나, 아니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파이프를 질끈 물었다. 지금 그녀는 확실히 시선이 끌릴 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이제야 파이프를 문 그녀의 내리깐 속눈썹이 떨어지는 모양과 그 위로 흩어지는 불빛 몽환처럼 흐린 연기 뒤로 모델의 근육이 긴장하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낙후되어 깜박거리는 불빛 속에 연기가 한숨처럼 올랐다.

“있지, 루이스. 나는 나를 사랑해. 나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예요. 그래서 남들이 끌어내리기 전에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멈췄지. 애정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 당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은 더 자존심이 상해. 그러니까 나는.”

 

작전에서 돌아온 후로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같이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 짧은 며칠 동안 모든 것이 끝났다. 성도 없는 C급 능력자 루이스는 여왕의 수완에 의해 연합의 영웅이 되었다. 영웅은 빠르게도 여자를 얻는다는 소문 역시 같이 퍼졌다. 영웅과 정상의 모델. 미인을 얻은 영웅도, 한참 연하의 영웅을 낚아챈 미녀도 명예롭고 불명예로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염문이 섞인 영웅담은 더할 수도 없이 화려해 부러움과 동시에 경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 다 참 무던히도 수줍다고 했다.

기도같은 고백과 기울어 떨리는 눈시울.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루이스는 이미 한 번 사랑을 잃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마음이 얼마나 중한지를 안다. 트리비아 카리나는 결코 누가 뭐라고 쑥덕거릴지 모르는 순진한 처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도 안하고, 신경도 아니 쓰고. 그 방 안에서는 내내 소곤소곤거리는 소리만.

낡고 허름하고 서로가 있어 아늑했던 방. 기도같은 고백과 기울어 떨리는 눈시울. 매콤한 연기에 그의 눈시울도 젖어들었다.

이 작은 세상 아래, 누군가를 진심 다해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키님 리퀘 리니씨씨타이

C.C.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다.

C.C.로 말하자면 연구소에서 가장 젊은 엔지니어였고, 또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엔지니어였다. 허공을 보며 넋을 빼놓고 있다가 복잡한 도면을 한가득 그려 내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혀를 내두르다가 끌끌 차고는 했다. 혀를 내두르는 이유는 그 압도적인 재능 때문이었고, 혀를 차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제대로 인지를 못 하는 까닭이었다.

예전에 어느 엔지니어가 그녀의 재능과 그늘 없이 밝은 분위기에 첫눈에 반해 은근히 들이댄 적이 있었다. 호감을 가진 티가 나도 너무 나서, 연구소의 모두가 말은 안 해도 아련하게 따뜻한 눈빛으로 그 남자를 격려하고는 했다. 도무지 연구밖에 모르고 남자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저 아가씨를 누가 데려갈까, 요 어린 아가씨는 언제쯤에야 철이 들고 사랑이라는 걸 알까 다들 조금씩 걱정이었던 것이다.

하루이틀 계속 말을 붙이던 남자가 마침내 C.C.에게 이상형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연구소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이 감돌았다. 엘런은 설계에 열중하는 척했지만 도면 대신 허공을 보고 있었고 케인은 손바닥에 땀을 쥐다가 자기 침 삼키는 소리에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작 두 사람은 온 연구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잘도 떠들고 있었다.

“C.C.는 남자를 볼 때 어딜 보나요? 성격이라거나… 재능? 아니면 역시 외모?”

“으음~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에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요. 다 이해해요.”

그녀는 해맑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과의 케미요!”

 

한낱 가벼운 호감으로 뚫어내기에 그녀의 배리어는 너무 강했고 며칠 후 그녀가 대답한 의미를 이해한 남자 엔지니어는 자재창고에서 술이 떡이 되어 발견되었다. 이 엔지니어를 본인 요청에 따라 다른 연구소로 이적시켜 준 것이 바로 리니어스 상급기사였다. 그래서 리니어스에게 현재 연구소의 상황은 퍽 흥미로우면서도 난처했다. 설마 그 고고한 엔지니어가 하필 그 알게모르게 악명높은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둘 중 어느 누구도 놓치기가 아까운 인재였기에 리니어스는 이번엔 꽤 신중을 기해 상황을 지켜보았다. 기계에서 처음 또래의 여자로 방향을 바꾼 타이렐의 관심은 의외로 뭉근하고 집요하여 쉬이 식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C.C.는…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은근히 호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찬스마다 천연덕스러운 말로 완전히 화제를 돌려 타이렐을 좌절시켜 버렸다. 이번 목요일에는 연구소가 쉬죠? 아, 네! 그랬었죠! 신작 보러 가야겠다! C.C.는, 무슨 종류의 작품을 좋아합니까? 아이 참.. 그게…. 타이렐도 이런 데 관심이 있나요? 여기요.

그리고 가장 슬픈 점은 타이렐이 좌절할지언정 포기하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예전의 젊은이처럼 포기했다면 편했을 것을. 두 사람의 모습을 계속 유의해 지켜보며 리니어스는 타이렐을 동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깨닫게 된 점이, C.C.가 남들보다 자신과 타이렐에게 유독 밝게 인사한다는 사실이었다.

타이렐과 리니어스 두 남자를 대할 때마다 C.C.의 눈은 빛나고, 뺨에는 홍조가 돌았다. 며칠간 리니어스는 머리가 복잡해 잠을 설쳤다. 이거 좀 복잡해지는 거 아닌가 가끔 그 눈을 떠 버릴 정도로 골똘히 생각했다. 그대로 다음 사실을 깨닫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C.C.는 리니어스와 타이렐을 엮고 있었다.

 

이제 리니어스는 다른 의미로 잠을 설쳤다. 침대에 누우면 C.C.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이 떠올라 오한이 들고 기분이 착잡했다. 아니야. 이게 아닌데.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드디어 상급기사는 결단을 내렸다. 윗사람으로서 젊은이에게 직접 일러줘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C.C.를 따로 불러서,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 직접 차근차근 얘기를 해보면 아무리 둔한 아가씨라도 상황에 대해 좀 감을 잡고 대처를 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무엇보다도 계속 C.C.에게 망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꺼림칙했다.

“이리 와 봐아, C.C.”

“네, 상급기사님.”

“내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어. 혹시 다음 휴무 때 시간 있어어?”

“앗, 아앗… 네, 상급기사님! 얼마든지요!”

지금 이 아가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리니어스 자신에 대한 호감에서 기인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텐데. 리니어스는 난처하게 웃었다. 아마 연구나 개발에 대해 논의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C.C.가 리니어스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아쉬운 기분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C.C. 저번에 제가 말했던 공연 말입니다. 이번 주 휴무에, 시간 괜찮습니까?”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며, 흘끔거리는 시선 하며, 모로 보나 리니어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새파랗게 어린 엔지니어에게 경계를 당하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나는 그런 게 아니야아. 바로 타이렐 너와 C.C.를 이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던 거라고.

“아, 저기 미안해요. 타이렐. 그때는 이미 선약이 잡혀서…”

그리고 하필 대답을 하면서 C.C.는 눈앞의 리니어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설마 지금 두 사람…”

“네. 다음 정기 휴무는, 리니어스 상급기사님과 보내기로 했어요!”

기이하게도, 여자는 이 순간 뺨을 수줍게 붉히고 눈을 접어 웃었기에 영락없이 다른 종류의 자랑 같아 보였다.

“네? 뭐라고 했습니까, C.C.?”

리니어스는 언제나 나른하니 고고하던 엔지니어가 입을 뻐끔거리는 귀중한 장면을 아주 가까이서 구경하게 되었다. 경악에 찬 타이렐의 눈이 C.C.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뭐가 잘못됐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서 아무런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리니어스를 향했다. 이런이런, 수습하자아.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티를 내야지.

그렇지만 리니어스는 아무 말도 없이 타이렐을 보며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이 상황이 이상하게도 즐거웠던 것이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고고한 청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더니, 마침내 눈앞의 여자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C.C., 당신은 우수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용서할 수 없습니다!”

타이렐은 씩씩거리며 방을 박차고 나갔다. 쾅 하고 문 닫는 소리가 연구소 전체에 울릴 지경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C.C.는 울상이 되어 리니어스에게 매달렸다.

“으으, 상급기사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오…”

“걱정 마아, C.C. 타이렐은 금방 제 풀에 꺾여서 돌아올 거야아.”

손을 들어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C.C.는 뺨을 붉히며 얼굴을 숙였다. 연애세포라고는 1g도 살아있지 않은 아가씨, 여느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더라도, 저 남자 괜찮다며 남과 엮을 생각만 하고 본인의 감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천재 아가씨. 알고 보면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가씨. 리니어스에게 지금의 상황은 난처하면서도 괜찮은 기분이어서, 그는 타이렐이 계속 오해하게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