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실] 네가 없는 세계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이고 줄을 긋고, 표현을 골라 다시 덧씌워도 마음에 차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절로 한숨을 내뱉으며 옆에 있는 유리에 몸을 기댔다. 뺨에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는데 삐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살가드, 여기 있었나.”

송은 천천히 걸어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추도사에… 늦을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건넨 손을 맞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다. 기대고 있던 유리 수조가 몸에 쓸리는 감촉이 서늘했다. 오래 전에는 그 안에 한 인간의 뇌가 500년간 잠겨 있었다. 마침내 수조에서 몸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는 역시 당신을 아직 보낼 수가 없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저 같은 게… 레드그레이브님의 추도문을 외울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처음 만났을 때도 저는 최악이었잖아요. 걸어 나가다 방문 앞에서 아쉬움에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황량하게 깨져나간 수조. 그렇지만 십수 년 전에는 빛나는 수조 안에 신이 잠들어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그분이 정말로 네 시간 만에 판데모니움을 지배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더라? 희열, 기대, 경탄, 두려움, 그보다 훨씬 빠르게 불이 붙던 같잖은 계산과 욕망. 그때 그분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현재의 억압된 위치를 능가하는 힘을 원한다는 것인가. 좋다, 그렇다면 내 그대의 날개가 되어 주지.”

에둘러 몇 마디 꺼냈을 뿐인데 레드그레이브님은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신 듯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내색 않으려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분이 보시기에는 아주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때 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다.

 

말없이 앞서가는 송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자꾸만 송의 앞에 자그마한 기계 소녀가 당당히 걷고 있을 것 같아서 그의 몸을 옆으로 치워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일전에 레드그레이브님이 몸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은 세계의 급박한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 있길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그분은 복도를 거니면서도 늘 내게 이런저런 세계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뒤따라가던 나는 그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슴이 차올라 큰 목소리로 의견을 말하곤 했고, 그분은 웃으며 젊은 라이브러리안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복도는 판데모니움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까맣게 길었고, 가라앉은 침묵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길게 울리는 발소리가 심장을 짓밟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습관대로 열림 버튼을 누르고 먼저 들어갈 이를 기다렸다. 송은 아무 말도 않고 기다려 주었고, 몇 초가 지난 후에야 더 이상 문을 열어 드릴 분이 없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손을 떼고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자 송도 따라 들어왔다. 바보 취급하면서 먼저 들어가거나 뭐라고 할만도 하건만, 배려가 고마웠다. 아마 그도 그분의 빈자리를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일 테지.

엘리베이터 안, 허리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는 바가 하나 있었다. 늘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당당한 품새로 서 있는 레드그레이브님이셨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만큼은 이 바를 잡으셨고, 나는 그 흔치 않은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바의 한 쪽에 기계손에 의해 닳은 듯 칠이 벗겨진 흔적이 있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쓸어보았다. 거칠었다.

무엇 하나 그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세계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최상부에 도착했다. 길은 기억하고 있다. 추도사는 최상부에 있는 거대한 광장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일전에 레드그레이브님이 연설을 하신 적이 있는 곳이었다.

 

5백년 만에 깨어나신 레드그레이브님에 의한 통치는 완전하되 불완전했다. 그분이 너무나 완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세계의 모든 변수를 계산하는 생체 계산기였고, 모든 힘과 정책은 레드그레이브라는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면 곧 그늘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그분은 도처에 눈과 귀를 두고 세계의 감시자로서의 업무에 충실하려 하셨다.

또한 다른 문제도 있었다. 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지는 의무 이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자들, 그들에게는 모든 힘이 한 사람에게 집권되는 것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감히 레드그레이브님께 맞설 엄두는 내지 못하는 자들이었기에 대신 나에게 그들의 힐난하는 눈빛이 모두 따라붙었다. 누가 보아도 나는 레드그레이브님을 등에 업고 하루아침에 득세한 자였으니까. 물론 신경 쓰지 않고 비웃어 주면 그만이었으나, 한결같은 충성을 바쳐도 왕이 공신에게 내릴 만한 한 점 충의의 보답도 비치지 않는 기계소녀를 보면 속이 탔다. 그러나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보아도 나는 그분 덕에 갑자기 득세한 이였으니까.

“레드그레이브님, 조사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었다. 전쟁과 새로운 소용돌이의 발생으로 인한 혼란이 겹쳐 업무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그분께 관련된 서류를 계속해서 가져다드리고 있었다.

“업무가 과중하여 모두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짐이 예로부터 인복은 많더구나. 살가드 그대도 여기 있고 말이야.”

가장 고대했던 말을 그분은 무심한 어투로, 마치 오늘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얘기하듯 그렇게 하셨고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딱딱하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인선에 불만을 가진 이가 많은 걸로 압니다.”

“흐음. 불만이 많다라…”

그분은 나를 지긋이 쳐다보셨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무슨 괜한 말을 한 것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그분의 말이 이어졌다.

“관리국에 가서 사흘 후 6-F에서 연설을 할 것이라 전하거라.”

 

레드그레이브가 몸을 얻었다더라. 마치 괴물 같은 모습이라더라, 사실은 레드그레이브를 누군가 은밀히 처리하고 대신 레드그레이브인 척 하고 있다더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실정이었다. 그 와중에 레드그레이브님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몸을 보이시는 상황이었고, 사람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작고 어린 기계 몸이 단상 위에 서자 작게 웅성거리던 소리가 확성기라도 가져다 댄 듯 증폭되어 하늘까지 뒤흔들 듯 했다. 나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연설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가는 팔다리의 소녀가 70년 이상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보살펴 온 자임을, 진정 세계의 통치자임을 말이다. 나는 하릴없이 부끄러워졌다. 나의 그분과의 넘어설 수 없는 격차에, 그리고 그런 분을 그동안의 나태했던 상사들과 동일하게 여기어 이용하려고 했던 내 오만함에. 그러면서 나는 보라색의 결연한 눈동자와 자줏빛의 리본이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정신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깨는 기분이 든 것은 연설 중 내 이름이 들렸을 때였다.

“…그러므로, 여기 짐의 뒤에 있는 살가드, 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것은 짐에게 그러는 것과 같다 여길 것이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황하여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새 연설이 끝나 나는 복도를 걸어가는 레드그레이브님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레드그레이브님…”

중얼거리듯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듣지 못하셨는지, 그분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여전히 당황해 있던 나는 레드그레이브님을 잡으려 했으나 치마 뒷자락의 리본만이 잡혀서 스르르 옷에서 풀려나왔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큰 소리로 그분을 불렀다.

“레드그레이브님!”

선명한 보라색 눈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것을 부끄러워 차마 계속 마주보질 못하고 손에 쥔 리본만을 대신 쳐다보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저 같은 걸 위해서 이렇게까지…”

그분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까치발을 들어 고개 숙인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셨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평소와는 달리 그저 그 나잇대 어린 청년같은 것이 귀여운 모습이로구나.”

순간 속절없이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짐에게 섭섭한 것이 많았겠지.”

“아닙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레드그레이브님께…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이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짐이 과했다고 생각하느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일전에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을 방치하였다가 허망하게 잃은 적이 있단다. 그러니 이제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최선을 다할 것이야. 나의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해서야 어찌 감히 세계를 지키는 사명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 있겠니? 살가드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한 사람이란다. 그때 만난 것이 누구보다도 해박한 라이브러리안인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짐이 어찌 수 시간의 짧은 대화만으로 500년의 공백을 넘어 현대 판데모니움의 정세를 이해하고 통치할 수 있었겠니?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은 말렴. 네가 더 큰 도약을 위해 짐을 선택하였듯이, 짐도 너를 그렇게 선택하였단다. 짐이 너의 날개가 되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앞으로는 짐이 그대를 지켜줄 테니 신경 쓸 가치 없는 것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려무나.”

그때는 그저 상대를 이용하고자 했던 속마음을 처음부터 들키고 있었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분하여 눈물까지 찔끔 났던 데는 나는 처음과는 달리 그저 그분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은 억울함, 아마도 그 울분이 더 컸던 것이다. 마치 지금과 같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그렇게 대단한 놈이 되지 못해요. 레드그레이브님이 없는 지금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이 죽고 난 지금, 저는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에요.

 

단상에 서서 눈을 들었다. 현기증 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판데모니움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으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부 레드그레이브님이 작고하신 후 재편성될 권력 구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들이었다. 제한파의 집권 후 힘을 잃고 실각했던 이들이 특히나 맨 앞자리에서 뚫어질 듯이 내가 선 단상을 응시한다. 우두머리를 잃은 이리들은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다가도 곧 서열을 재확인하려 손톱을 들고 제멋대로 날뛰며 피를 볼 것이다. 장내의 공기는 무거웠으나 동시에 기묘하게 붕 떠서 윙윙 울리고 있었고, 이빨을 숨긴 이리들은 눈빛만이 형형했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몸을 숙이고 마음을 추스리고 좋은 때를 기다려 재기를 노릴 수도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들어있던 것을 살짝 꺼내보았다. 반짝이는 자줏빛의 공단 리본을 주체 못할 만큼 강하게 움켜쥐었다. 껍데기만 남은 채로, 그분의 마지막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리떼 가운데에 서 있다.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내 목소리가, 말투가, 자세가 꼭 그 때의 레드그레이브님을 닮아 있었다.

[카운실] 영속의 고리

엘리베이터는 닫힌 공간이다. 살가드는 눈앞의 문을 노려보았다. 이 문이 열리면 새로운 공간이 이어진다. 살가드에게 있어서 그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라이브러리언의 근무처가 있는 상층부, 혹은 유전적 혈통에 의해 ‘열성’으로 분류된 살가드 자신의 거주지가 있는 하층부. 모든 것이 청결하고 기능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판데모니움이기에 하층부라고 해도 지상에서와 같은 심각한 치안의 위협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집단사망 같은 것은 없다. 그렇지만.

문이 열린다. 살가드는 순간적으로 상층부의 정경을 기대한다. 그러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코를 찌르는 냄새는 텁텁하고 매캐하다. 두 공간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상층부를 걷고 있노라면 달콤한 음악이 들리고 은은한 향기가 난다. 사람의 눈에는 만족과 희망이 서려 있고 간혹 꿈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오늘은 하층부에 비가 내린다. 적정 습도와 생물이 위한 환경을 유지시키기 위한 인공 강우였다. 비가 오는 날의 하층부는 특히나 끔찍하다.

살가드는 우산을 펼치고 비가 내리는 하층부의 거리를 걸었다. 이 구획 저 구획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빗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뒤섞여서 고막을 찌르고,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쓰레기가 흐느적흐느적 녹아 질척거리며 발에 채여서 바닥이라고는 쳐다보기도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빛이 없는 사람들. 되는 대로 일생을 소비하면서 몸에는 강단이 없이 저 쓰레기처럼 흐느적흐느적 녹아가면서 즉각적인 쾌락을 찾는 도시. 그것이 살가드 자신이 속해 있는 구역이었다.

물론 살가드는 자신이 저 흔한 하층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 꿈이 실현되는 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만큼 이상에 매달리지만 그게 고통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바꿀 것이다. 판데모니움도, 나의 처지도. 비관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언제야. 어느 날 문을 열었을 때 이어지는 제3의 공간은 없을까. 비가 오는 탓인지 유독 감상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에 골몰한 채로 길을 계속 걷는데,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꼭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듯 먼 소리라 환청이라도 들었나 하고 발을 다시 떼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고개를 돌리자, 옆을 막 지나가던 건물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살가드는 순간 침을 삼켰다.

뺨에서는 빛이 나고, 속눈썹은 까맣게 보일 만큼 짙었다. 이목구비가 누군가가 부러 그렇게 그려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너무도 완벽하게 조화되어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키가 크고 손발이 죽 곧게 뻗었고, 자세는 곧되 보는 이가 불편할 만큼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미소 짓는 표정은 완벽에 달했다. 확실히 하층부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상층부에서 왔다고 단정 짓기에도 무언가가 꺼림칙했다. 사실 상층부 사람들이 하층부 시민과 달리 삶의 티끌이 없는 것을 보면서 살가드가 느끼는 감정은 불쾌감과 열등감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무언가 달랐다.

이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잖아.

“실례합니다. 제가 우산이 없는데, 목적지까지 같이 데려다 주실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상하지 않은가. 상층부의 사람이 하층부의 사람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동행을 부탁한다는 것은.

“어디로 가십니까?”

“B-73이요.”

살가드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상황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살가드에게 여자가 미소 지었다. 삶에 아무런 고뇌도 미련도 없는 듯 행복하고 무구한 미소였다. 천국에 속한 것 같은 그 얼굴이 다시 한 번 의사를 묻는 듯 살가드 쪽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하자 살가드는 저도 모르게 우산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본능이 이는 다시 겪지 못할 순간임을 알았다.

여자는 의외로 말을 퍽 잘했다. 비가 오는데도 살가드와 조금의 간격을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것이 처음엔 역시 나름대로 귀한 몸이라 하층부 사람에게 닿기는 싫은 것인가 불쾌감이 일었으나, 높고 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재잘거리며 살가드에 대해서 묻는 것이 적어도 그의 출신을 꺼리는 것은 아니고 무언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 남에게 까다로운 살가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후후, 그래서 그 상사에게 나름의 복수를 했다는 거군요. 하지만 무식한 상사는 당신이 그랬다는 것도 몰랐고. 멋지네요. 복수를 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로 직업에 통달했다는 것이 멋있어요.”

여자는 옆에 선 살가드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얼굴이 확 붉어질 것 같아 마주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물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인정한 사람의 가치가 극상에 달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이 며칠인가요?”

“열의 달 5일입니다.”

“이런 날에 살가드 씨는 무엇을 하시나요?”

“이런 날이라… 7일에 지하의 재조사가 있습니다. 라킨은 전의 보고를 덧씌워 대충 넘어가도 되는 것을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아무런 경각심도 없는 노인의 말을 따를 수는 없죠. 그러니 그 전에 다시 한 번 해당 구역의 유물 현황을 점검해 봐야겠네요.”

“그게 전부인가요?”

캐묻는 듯한 어투에 살가드는 무언가 놓친 것이라도 있나 고개를 숙이고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제 생일이군요.”

“후후후.”

아까부터 모든 것을 아는 듯 구는 여자에게 살가드의 의문스러운 눈빛이 꽂히는 것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여전하시네요.”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면 잊었을 리가 없고, 또 고대 판데모니움의 기록물과 유적 관련 자료만을 되풀이하여 읽는 살가드가 이런 여자를 따로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있다. 스스로 왜 그렇게 얼빠지고 멍청한 기분이 드는지 한심스러워 이를 까드득 깨무는데, 여자는 걷던 발을 멈추고 빙글 옆으로 몸을 돌려 살가드를 올려다보았다.

“생일인 것도 스스로 모르고 계셨다니, 딱하기도 하시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따로 약속이 없나요? 달리 급하게 부를 사람이 없다면, 오늘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겠어요?”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마치 천사 같다.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상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눈 사람에게 이렇게 아무런 의심도 계산도 없이 호의를 표할 수 있는 걸까. 사실 그녀야 원래 그런 여자라고 쳐도, 사람을 재고 평가하는 평소와 달리 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아무런 거부감도 스스럼도 없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이상했다. 이 여자는 정말 어딘가 이상하다. 뺨이 붉어져 여자를 훑어보던 살가드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서 멈췄다.

확실히 이상했다. 이렇게 계속 함께 빗속을 걸어왔는데 옷이 전혀 젖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제복이 확실히 새까맣게 젖어 있었다. 여자의 머리칼을 보았다. 비에 젖거나 부푼 기색 한 점 없이 한 올 한 올이 천사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살가드는 자신이 착각해버린 것이길 바라며 들고 있던 우산을 놓았다.

“이런.”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속에 여자의 짧은 한탄이 섞였다. 비가 방울방울 여자의 몸 위로 떨어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빗방울은 스미지도 적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길게 뻗은 사지 아래로 그대로 비가 통과해 떨어졌다. 수많은 총알처럼 몸을 관통하는 빗방울 속에 여자는 고개를 뒤로 넘기며 빙긋이 웃었다.

“역시 살가드로구나. 영특하고 판단이 빠르지.”

판데모니움의 사람이 유전적 형질에 따라 외형과 실제 나이의 관련성이 천차만별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륜은 흡사 사람을 아주 오래 다루어 온, 지배자의 목소리이다. 빗방울이 몸을 통과하는 광경도 소름끼치거니와 지금껏 판데모니움의 정세와 사람들을 관찰해온 살가드의 직관이 경계신호를 보냈다.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덜컥 겁이 났다. 소름이 팔을 타고 쫙 올라와 여자를 밀쳐냈다. 아니 밀쳐내려 했으나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배를 통과한 살가드의 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언제나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경계가 많아.”

그 미소를 보고 살가드는 흠칫 팔을 내렸다. 기묘하고 이상한 것은 저 여자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인데 어째서 자신이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드는지 시시각각 혼란이 더해왔다. 어떻게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는 판단으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케이오시움인가? 허가받지 않은 연구? 나에게 접근해서 어쩔 셈이지? 지금까지 얘기를 들었으면 알겠지만, 내게는 힘도 없고 이용할만한 능력도 없어.”

“그럴 리가. 그대는 짐이 가장 잘 알아.”

협박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싶었지만 그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애정과, 믿을 수 없지만 자애뿐이다.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여자의 얼굴께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역시나 만져지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지?”

“잔상.”

눈의 곡선 없이 입 양끝만을 올린 웃음기 없는 미소였다.

“잔상, 혹은 홀로그램. 어쩌면 유령이라는 표현도 쓸 수 있겠군.”

홀로그램의 여자는 허리를 굽혀 살가드가 바닥에 떨어뜨린 우산을 주우려 했으나 손이 우산을 통과하여 헛손질만을 했다.

“짐이야 그렇다 치고 그대는 우산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감기에 걸린단다, 살가드야. 이런. 주워지지 않는군.”

슬슬 억울하고 화가 났다. 오만한 말투로 살가드를 아끼고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도, 거기에 동조하여 휘둘리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붉은 눈에 열기를 담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유적 발굴 중에 따라붙은 케이오시움의 유령이라도 된다는 건가. 유령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고 원인이 뭐가 됐든 찾아서 제거할 수도 있어. 그게 싫다면 나를 납득시켜봐.”

“케이오시움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지금의 그대라면- 별로 모르겠구나. 그러니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발끈하여 입을 열지만 바로 말이 나오지 않는 살가드를 보고 여자는 쿡쿡 웃었다.

“그래도 조금은 이야기해주마. 짐은 영원의 광명 안에 있다 여겼거늘, 이 세계에 영속이란 없더구나. 하지만 모를 일이지. 지금 그대의 모습은 꼭 무의식중에 짐을 아는-”

잠시 말이 멎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이 세상에 영속이란 없느니.”

그 말만은 되는 힘껏 부인하고 싶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케이오시움의 폭발을 아느냐. 다량의 케이오시움을 순식간에 방출시키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혼돈의 상태가 된단다. 무한한 가역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지. 짐은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뇌가 깎이고 몸이 불타올라서 닳아 없어지는 고통이었어. 그래도 가까스로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가 남았다. 몸은 남지 않았지만 그 남은 에너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여자의 시선이 살가드가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게 먼 곳을 향했다.

“긴 시간이었다. 5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세계를 지켜온 후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생각했다. 뇌리에 수많은 것들이 스쳐갔어. 그 세월 동안 나는 내게 소중한 존재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주고 사상을 내주고 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제 그 선명한 보랏빛의 시선은 바로 살가드를 향하고 있었다.

“늘 옆에 있어준 그대에게는 너무나도 해준 것이 없어. 그래서인지 결국 마지막에 머릿속에 남는 것은 그대이더구나.”

그 시선에 못이 박혔다.

“그대가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어. 이전에는 실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무시당했고, 소외당했고, 혼자여서 유일한 돌파구로 보이는 일에 빠져 생일마저도 챙기지 못하기 일쑤였고, 나침반도 없이 길을 헤매던 그 때에 무언가 붙잡을 것이 있다면 좋았을 거라고.”

여자는 쓰게 웃었다.

“고작 이런 것이, 그대에게 위안이 될까.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자기만족인지도 몰라.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짐은-”

여자의 손이 살가드의 손을 향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흠칫 놀라 손을 허공에 들어보았다. 빗방울이 그 손을 통과하는 것이 훤히 비쳐보였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건만.”

여자는 대신 그대로 살가드의 뺨에 손을 올렸다.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기에 손은 뺨으로부터 공중에 조금 떠서 닿지 않았고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맙고 또 미안해. 지금의 그대는 곧-.”

고개를 숙인 여자를 보자 다급한 마음이 들어 살가드는 다그치듯 말을 걸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 그렇지만 지금-”

살가드의 입술이 떨렸다.

“지금 당신…”

비에 젖을 리가 없건만 여자의 입술이 곧 죽을 사람처럼 파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손발과 흉부, 얼굴 곳곳이 흐렸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가드는 급히 우산을 주워들어 여자의 몸을 관통하는 빗방울을 막았다. 여자가 높고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눈에는 웃음기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이건 마치-

“역시나 어리석은 수하로구나. 아무리 가능성의 힘이라도 남은 잔량으로 이 이상 질서를 어그러지게 할 수는 없어.”

이건 마치- 하늘로 올라갈 것 같잖아.

“뭐라고 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어. 제대로 설명을 해 봐. 일단 그 몸부터 어떻게 좀 하고…”

여자가 왜 저런 표정인지, 그리고 살가드 자신은 어째서 처음 보는 이 때문에 이런 것인지, 모르지만 그저 머리가 꽉 막혔다. 손을 잡으려 해 보았다. 여자는 손을 마주 뻗었지만 살가드의 손이 닿는 곳마다 입자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빗방울이 눈에 고였다. 그러고도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살가드를 어르려 했다.

“그렇게 재촉하지 말거라.”

이제 완전히 비칠 만큼 희미해진 입술이 가까스로 달싹이며 살가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가운 빗방울 속에 있을 리 없는 숨이 낙인처럼 뜨겁게 닿았다.

“우린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비에 녹아버리는 것처럼 사라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까만 물웅덩이만이 남았다.

살가드는 그날 밤 공중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비 오는 날 판데모니움 하층의 더러운 물웅덩이가 몇 백 개나 되는지 세었다. 마치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여자의 다른 흔적은 없었다. 까닭도 모른 채 뇌를 쥐어짜는 것 같은 격통이 엄습했다. 남은 것은 귓가에 맺힌 그녀의 마지막 서약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만날 날까지 그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를 믿고 기다릴밖에.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때에 그녀가 이 손을 제대로 잡고 나를 하늘로 끌어올려 주리라고.

[붕대조] Furious Anger / Call Me My Dear

이 세계는 신이 만든다. 그리고 교부 콘라드는 그 손에 신의 권능을 쥐고 있었다. 그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이며, 압도적인 힘으로 세계의 질서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교부에게는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마녀에 대해서도 그랬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가냘픈 마녀가 지닌 능력은 콘라드도 인정하고 탐을 낼만한 힘인 동시에 저주받은 것이었다. 지옥의 겁화를 부르고 나면 마녀는 몸의 모든 구멍으로 검은 피를 흘렸고, 한 번 더 기적을 행하고 나면 마녀는 목소리를 잃은 채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눈에 갈구를 담고서 파리한 입술을 교부에게 달싹였다. 그러면 콘라드는 들썩이는 마녀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신의 의지로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았다. 어느새 말끔한 모습이 되어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마녀를 보면서 콘라드는 잘 단련된 손을 세게 한번 쥐어보았다. 그리고 되뇌었다.

내 손에는 신의 권능이 있어.

이 손으로 그는 그 무엇이든지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힘에 달하는 마녀를 손에 넣은 것도, 그녀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그에게는 좋은 일인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홀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면 마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금 어깨에 아슬아슬 끈으로 매달린 보랏빛의 네글리제 한 장만을 걸치고 분홍, 하늘 색색의 꽃잎을 말리는 뒷모습이 외롭고 추워 보여 담요를 갖다 주고 나중에 보면 담요는 마녀의 몸에 덮이기는커녕 멀리 내팽개쳐져 있었다. 가져다주는 간식은 성당 이곳저곳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마음 한편을 간지럽히는 의문이었으나 호기심은 곧 깊게 얼룩이 번져 견딜 수 없이 안달이 났다. 때마침 흔치 않은 꽃이 성당에 공물로 들어와 그것을 들고 마녀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하얀 마녀의 곁으로 색색의 꽃잎이 장식처럼 흩어져 있다. 아이처럼 희고 가는 팔을 뻗어 압화에 열중한 모습에 역시나 싶어 웃음이 났다. 웃음소리에 마녀가 말간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교부는 계속 자신을 피하던 마녀의 눈을 처음으로 곧이 마주하게 되었다. 찡그린 눈 안에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경멸이었다.

“요즘 왜… 이러는 거야?”

마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들고 있던 책을 던지듯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말린 미색의 꽃잎 꽃잎이 마녀로부터 바스스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얀 살결이 흩어져 내리며 콘라드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옆을 지나쳐 방 밖으로 나가려는 마녀의 손목을 황급히 잡아챘다. 그러자 마녀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가는 손목 위로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흠칫 손을 놓았다.

“몸의 이상은 내가 전부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말이 없던 마녀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비죽 웃었다.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 더 이상 명백할 수 없을 만큼 완연하게 비웃는 얼굴이었다.

“고친다고 이미 겪은 고통이 사라져…? 몸이 고꾸라지고 땅이 머리 위에 서는 기분을 알아? 한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생기고 뜨거운 피와 함께 정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을 알아? 내장이 뒤집히고 내 사지가 내 몸이 아닌 순간을 알아?”

콘라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이 마녀에게 비쳐졌을까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신의 권능이 있다. 세계의 질서는 물론, 여리기 그지없는 마녀는 당연히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래야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뇌까려도 담갈색 눈에서 바로 닿아오는 경멸이 그를 여전히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뒤흔들고 있었다. 부디 짙은 화장이 표정을 감춰주었기를 신께 빌면서 가까스로 마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마녀가 달게 웃었다.

“정말로 내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콘라드…?”

그 긴 시간 동안 마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웃는 것도 처음이었다.

 

콘라드는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럽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주먹을 쥐어 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겨우 눈동자만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신의 권능 대신 볼품없는 붕대가 감겨 있다. 입술을 깨물고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켜서 붕대를 풀었다. 양 손목에 붉은 구멍이 성흔처럼 상처로 새겨져 있었다. 피가 잔뜩 빠져나가 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생각도 마찬가지인지 아까 마녀의 모습만을 머릿속에 되풀이했다.

“내가 귀중하다고 생각해…? 그럼 그에 달하는 희생을 보여 봐.”

마녀가 머리에 감고 있던 붕대를 끌렀다. 그리고 드러난 푸른 눈을 휘며 콘라드에게 다가왔다. 안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거친 입술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겹치고, 다음 순간 세계가 번쩍 붉었다. 손목에, 몸 안에서 피가 솟구치고 내장의 혈류가 제멋대로 소용돌이를 쳤다. 콘라드는 볼품없이 바닥에 무너졌다. 생경한 고통에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 흐려져 가는 의식을 밀어내는 동안, 소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마녀와 계약한 걸 축하해.”

그리고 일어나니 이 모양이었다. 콘라드는 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물론이고 가냘프기 그지없는 마녀는 당연히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어야 했다. 마녀의 자신에 대한 감정도, 자신의 마녀에 대한 감정도 그래야만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들어 입술께로 옮기다 대신 가슴을 움켜쥐었다. 늘 마녀를 가엾은 이를 보듯 내려다보던 콘라드가 그녀를 향해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의 뿌리가 있었다. 쇠한 기력을 대신하여 분노가 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제 신의 분노가 진정으로 세계를 바로잡았다.

 

 

***

 

 

이블린, 그것이 소녀의 이름이었다.

이블린의 꽃밭은 빛으로 충만했다. 야트막한 개울은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을 찰랑거리며 보석처럼 반짝였고, 그 안에 하얀 발을 살짝 담그면 깜짝 놀란 송사리 떼가 와르르 은빛으로 몰려와 발목을 간지럽혔다. 따스운 볕 아래 꽃을 엮어 머리에 이고 산들바람에 풀잎 같은 머리칼이 날리면 꽃잎은 오색 빛깔로, 소녀의 미소는 하얗게 빛났다.

그 안에서 이블린은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다. 아니, 그 때는 꿈이 아니었다. 이블린은 자신의 삶이 앞으로도 죽 행복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꽃밭이 어둠에 젖어들었다. 만발한 꽃 대궁이 짓밟혀 꺾이는 것을 보면서 이블린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도래한 악몽을 겪은 후 이블린은 어린 꿈이 꺾이는 것 정도에는 무덤덤해지게 되었다.

이블린의 힘은 폭주하면 세계를 뒤흔들 만큼 강하였으나, 그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이고 나면 소녀는 곧바로 쇠약해졌다. 가장 탐스러운 사냥감이 아닐 수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를 목격하고 나서 소녀는 이름을 잃고 마녀가 되었다. 마녀가 고통으로 허덕이면 먹잇감을 노리며 번뜩이던 수백 쌍의 눈이 가늘어지며 곧 이빨과 이빨이 몸에 박혀들었다. 그 모든 송곳니와 손톱과 욕망 아래를 거치며 마녀는 헐고 너덜거리고 더러워졌다. 이름을 잃은 마녀는 무언가 간청하고 싶었으나 들어줄 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기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권능이 나타났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압도적인 힘이었고, 마녀처럼 순간순간 약해지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힘의 논리에 시달려 온 자의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그에게 협조하고 그 말을 따르면 적어도 더 이상 그녀를 노리는 수많은 이들의 쟁탈전에 연루될 일은 없다. 그 힘을 탐내면서도 정작 손에 넣고 나니 두려워하는 자들의 의심과, 뒤따르는 목줄과 수갑, 길들임을 위한 채찍질을 다시 견딜 일도 없다. 살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처음 교단의 아래로 넘어간 날, 성당 뒤편의 화단에서 그리 결심하면서 마녀는 울었다. 이건 마치-.

아니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고통을 즐기는 이 그 누가 있을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여기서 더 이상 괴로운 건 싫은 것뿐이야. 나도 이게 싫어.

교부는 마치 자신이 마녀를 구원하였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녀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원한 게 아니야.

힘을 가졌으나 그로 인해 남에게 이용당해 본 일도 없는 교부는 혈기가 넘치고 자신만만하고 아직 앳되었다. 검고 진한 화장 아래로 보이는 그 앳된 눈으로 자비와 호감을 가지고 마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돌렸다.

내가 원해서 당신과 있는 게 아니야.

어린 날을 떠올리며 얇은 네글리제만을 걸친 채로 꽃잎을 말리고 있으면 교부가 걸칠 것을 가져다주었다. 무릎 위로 살짝 덮으니 따뜻했다. 그것을 내던졌다.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그래도 교부는 꽃을 가져다주었다. 아니야, 내가 원해서 당신의 곁에 있는 게 아니야.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시야가 울렁거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교부와 자신을 비웃었다. 그 눈에 담긴 당황이 빤히 보여 다시 한 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짜내어 아직 눈에 얇게 남아 일렁이는 호의를 깨부수었다.

그 후로 다시 교부가 마녀에게 상냥하게 손을 내미는 일은 없었다. 마녀의 저주를 지우는 권능만은 더없이 확실해졌으나 그 대신 곤봉에 의한 큰 고통이 뒤따랐다. 감정의 영향을 받을 그 능력이 어째서 강해졌을까 살짝 운을 띄우니, 교부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제 주제를 모르는 간악한 마녀에게 내리는 신벌이라고 한다.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의 겁화를 불러낸 마녀의 몸 위에 언제나처럼 교부가 손을 올렸다. 저주처럼 귓가를 맴도는 웃음소리가 지워지고 흐린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고통이 몸을 엄습한다. 그리고 교부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제 괜찮겠지, 마녀.”

“괜찮아…”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콘라드.”

그제야 진한 눈 화장 안에 안도와 만족의 빛이 서린다. 그것을 보자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피가 필요해.

붕대를 내던지고 입을 벌려 어깨에 손을 올려 매달리듯이 몸을 겹친다. 교부의 피를 빼앗는 감각은 황홀하다. 그의 피가 따뜻하고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가 그런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운 기운이 몸을 가득 메우면 마녀는 까맣고 하얀 열락에 젖어 몸을 떨었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고통을 즐기는 이 그 누가 있으리. 하지만 이건 마치-.

머릿속에 생각이 스치었으나, 다음 순간 마녀는 모든 것을 잊고 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듯이 교부에게 매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마녀는 성당 뒤의 정원을 맨발로 걸었다. 호흡과 함께 발은 점점 빨라져 뛰듯이 깊고 검은 숲 속에까지 도달했다. 분명 저주는 교부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지워주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열이 오르고 아찔했다. 누군가 도와줄 이 없을까. 매일 보는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녀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얇은 네글리제가 흙투성이로 더러워지는 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재차 말하자 눈에 띄게 안도하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마음이 우스웠다. 그리고 가여웠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여워? 그가?

가슴이 저렸다. 마녀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아. 달빛 아래서 마녀는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갈증이 나는지 그대로 별을 향해 기도하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흰 뺨이 젖어들었다.

나의 이름을 찾아줘, 콘라드.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그라레그워켄] mobile

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조명 아래, 뿌옇게 흐린 초점 속에서 빨간 구슬과 푸른 보석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반짝거렸다. 눈을 찌푸린 채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게 뭐야, 그라이바흐?”

“만화경을 응용한 모빌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레드그레이브?”

“물론… 아름답지.”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반짝거리며 흔들리는 색색의 조각은 순간 마음이 송두리째 붙들릴 만큼 아름다웠다. 정교하게 계산된 빛의 각도에 따라 루비와 사파이어와 크리스탈이 행성의 궤적을 그리며 서로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여 반짝임으로 가득한 작은 우주를 온전히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갑자기 어째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본래 모빌이라 함은 아기들이 천장에 매달아놓고 보면서 꺄르륵거릴만한 구조물이 아닌가. 뭣하러 이 정도의 재료와 정성을 들여 이런 것을 만들고 내게 보여주는가, 그런 의문이 마음에 연기가 낀 것 마냥 가슴속을 메웠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은 온전히 인류의 발전을 위해 바쳐진 것이니까, 함께 세계를 발전시킬 파트너인 그가 의미없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녀 자신은 무엇이 되는가, 그런 본능적인 불편함이 생각하기도 전에 마음에 뿌옇게 피어올라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레드그레이브.”

키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아름다운 것을 보는 순간만큼은 그런 표정 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감상해도 돼. 아니면 눈에 차지 않아?”

그제서야 레드그레이브는 솔직하게 감탄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름다워. 마음이 동요할 만큼, 아름다워.”

그러자 그라이바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네. 표현이 되어서.”

다음 말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내가 당신을 볼 때 느끼는 지복을 당신도 느꼈으면 했어.”

순간 바로 옆에 있는 남자가 아득하게도 느껴졌다.

 

그 때의 여자는 그가 죽을 때 함께 죽었다. 5백년 전 황혼의 시대가 그 여자의 무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레드그레이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그 망령일 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만 눈썹을 찌푸리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워켄이 물었다.

“이봐, 왜 자꾸 눈을 찡그리는 거지. 어디가 안 좋은가?”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힘껏 감았다 떴다. 보랏빛 눈이 평소와는 달리 빛 속에 있는 양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서.”

[그라레그] 단문

오랫동안 함께해온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나누는 데 거침이 없었다. 대화 주제는 그녀의 일부터 그의 일 혹은 세계의 또다른 문제들까지 다양했지만, 잊을만하면 꼭 한 번씩 다시 나오는 주제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타인에게 자애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어리석은 인민들에 대한 너의 그 조건없는 애정이 이해가 가지 않아.”

“유대야, 그라이바흐. 어쨌거나 그들의 합의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이렇게 있게 한 거야. 서로 닮은 이들끼리 유대를 느끼고 더 큰 연대를 형성할 때 소수의 집단보다 훨씬 큰 기적을 낳는 거지. 그렇게 어리석은 인민들이 공감과 유대를 통해 이만큼의 성과를 구축해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아?”

“공감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만든 오토마타 쪽이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히 생물학적 분류와 구성성분이 동일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다른 존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고 보는 거야?”

언제나처럼 다소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얘기를 잇던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너는 유대를 느낄까.”

그러자 레드그레이브는 테이블 위로 몸을 죽 기울여 그라이바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지. 당신은 유대의 대상이 아니야. 나에게 당신은 그들과는 달라.”

그라이바흐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곧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