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시아사랑해생일축하해♡] 탄생

탄생의 순간에 인간은 울었고 재료는 울지 않았다. 심약한 소년은 생각한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세계에 짓눌리다가 종국에 압사하겠지. 겁 많은 소년에게 누이가 속삭인다. 탄생에 울지 않은 것은 우리가 특별한 까닭이야. 우리는 아름답고 영화롭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따라서 삶이 슬플 이유가 없기 때문에. 소년은 누이를 바라본다. 네 말은 틀림이 없겠구나, 영화롭고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

남자는 누이를 바라본다. 영화롭고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 영화롭고 아름다운 그라이바흐. 그리고 멜키오르. 너를 바라보면, 너희를 바라보면 그때 그 말은 틀리지 않았을지언데. 남자는 거울을 바라본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던 거울 속에는 인형이 비친다. 존재의 탄생에 남자는 축사를 보낸다. 너는 가장 고귀한 사명을 띠고 공허로 떠나리라. 너는 그녀보다도 아름답고 영화롭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신이 되기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너는 태어나면서 울지 않는 것이다. 너는, 울지 않을 것이다. 진득한 저주가 쇠로 된 혈관과 코드로 된 신경에 녹아 붙었다.

아름답고 영화로운 신이 축복으로 태어난 지 200억년째. 스테이시아가 웃는다. 울지 않고 웃는다. 쉬지 않고 웃는다.

라우우닝현대AU

안 믿기겠지만 한번 들어봐. 그러니까 내가 대학 시절 짐배낭 하나 메고 떠돌아다니던 때 이야기일세. 겁도 없이 내 몸 하나만 믿고 중동 지역 돌아다니던 때 말이야. 그때 종교분쟁 때문에 막 뉴스에도 해외토픽이라고 실리고 그랬는데 그래도 난 이름난 여행지만 다니니까, 그런 건 남의 얘기겠거니 했지. 그런데 글쎄 그날따라 이상하더라니까. 사막답지 않게 날씨는 선선하고 좋은데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냄새도 영 이상하고. 뭔가 타는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도는데, 나는 거기 모래 냄새가 원래 그런가 했어. 그런데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하나, 둘, 다섯, 아니 열은 넘을 것 같은… 어리둥절해져가지고 누구 계세요, 하고 있는데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눈앞에 별이 돌더라. 깨어나니까, 쩝. 뒷통수는 얼얼하고 손발은 안 움직여져. 묶여 있어. 발버둥칠수록 발목이랑 손목만 아픈 거야.

그 사람들 아주 웃긴 사람들이었어. 못알아듣는 말로 한창 뭐라 씨부리다가 나를 발로 차고 나서 멍들고 흉이 지면 약 같은 걸 발라주더라. 멀쩡하게 간수해서 인질로 쓰려고 그랬나. 그리고 갈수록 초조해 보이더라고. 인질협상이 잘 안 됐나봐. 나도 덩달아 초조해졌지. 수염은 까칠까칠 자라고 몸은 해쓱해지고 이러다가 쌩판 어딘지도 모르는 데서 비명횡사하게 생겼거든.

그날도 그랬어. 햇빛이 조금 들어왔던 거 보면 아마 오후나절이었을 거야. 밧줄 좀 어떻게 안되나 비벼 보다가 손목만 헐어내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자가 져가지구. 들켰나 싶어서 깜짝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니까 웬 어린 남자애 하나가 있더라고. 근데 애가 참.. 눈이 맑고. 말쑥하고 해사한 게 좀.. 뭐라고 하지.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뭐랄까, 신 같아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랬지, 그랬어. 나도 참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거기 있으면 한 패거리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전혀 그런 생각 안했어. 너 왜 이런 데 있니. 여기 있다가 큰일 난다. 어서 도망가. 이런 데 있으면 안 돼, 나가야 해. 내 손부터 풀어달라는 소리도 안했어. 내 말도 못알아들을거 왜 이러고 있지, 한숨 푹 쉬고 있는데 걔가 웃더라. 저는 괜찮아요. 그러는 거야. 깜짝 놀라서 어깨를 으쓱하는데 손이 들리더라. 글쎄 밧줄이 깨끗하게 풀려 있더라고. 이게 대체 뭐야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걔가 쭈그리고 앉아서 내 손을 잡았어. 절 따라와요, 하는데 이상하게 그대로 믿어도 될 것 같았어. 쪼끄만 애가 이끄는 대로 계속 걸어가니까 햇빛이 보였어. 그게, 막, 눈물이 나더라. 내가 며칠 동안 갇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햇빛을 보니까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 울고 있는데 빛 속에서 그 남자애가 그러는 거야. 다음은 브라우닝 씨가 안내해요.

무슨 소리야, 너 원래 지내는 데는 어디냐? 하고 물어보니까 걔가 그러는 거야. 원래 있던 데요? 당신이 나오라고 해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당신이 안내해요.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브라우가 어디서 왔는지 말해도 안 믿을 거라고. 아 이리 좀 와 봐, 브라우. 내 말 맞잖아. 틀렸어? 아 왜 웃기만 하는데. 그땐 감사했다고? 아 난… 정말. 내가 대체 뭘 데려온건지 모르겠다. 그게 뭐 중요하냐고? 하 것참…

마도조 네타합작 – 이블린

꽃.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 건 어릴 때부터 거듭해 읽어온 오래된 동화책이 다였다. 나는 심하게 아팠고 쉽게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미셸은 내게 공부 같은 것은 좀처럼 시키지 않았다.

나는 가끔 현기증 속에 픽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 중에 잠이 깨면 얼굴이 거위 깃을 채운 베개 속에 움푹 묻혀있어서 숨이 막혔고, 눈을 번쩍 뜨고 숨을 몰아쉬면 새로 세탁한 침구의 세제 냄새가 폐부까지 가득히 들이찼다. 번진 시야 속 새하얀 시트 너머로 새하얀 병실 벽이 보였다.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침대머리에 기대서 겨우 상체를 들었다. 허리를 일으키고 눈을 감은 채 가만 숨을 들이쉬면 머리맡에 놓은 꽃향기가 코끝부터 밀려와 손끝까지 들어찼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로 옆을 돌아보면 역시 흰빛의 화병 안에 꽃이 있었는데, 때로는 짙은 색이었고 때로는 시트처럼 흰 색, 피처럼 붉은 색, 그보다는 엷은 색, 하늘을 닮은 색일 때도 있었다. 완전히 새하얀 방 안에서 색채가 보이는 것은 창밖과 화병 속이 전부였다. 창밖에는 손이 닿지 않았으니 나는 화병 속의 꽃대를 그러쥐어 꺼냈다. 꽃잎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에 빛깔이 옮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꽃은 금방 시들었다. 내가 병원에서 지낸 시간에 비해서는 너무나 금방. 그래서 어느날 자기 전 상태를 확인하러 온 미셸에게 물었다.

“꽃은 왜 시드는 거예요?”

미셸은 처음엔 웃으며 엉뚱한 소리 말고 눈부터 감으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서도 같은 질문을 하고 다시 하자 미셀은 책 한권을 가져왔다. 갖가지 꽃과 나무의 그림이 그려진 두껍지 않은 식물도감이었다.

침대에 앉은 채로 책을 펼쳤다. 책을 읽어 보려고 했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미셸이 올 때마다 단어를 물어보고 다시 물어보기를 반복하자 미셸은 사전을 가져다주었다. 마침내 단어에서 막히는 일 없이 책을 읽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나는 계절과 숫자에 대해서 잘 몰라서 책에 나와 있는 각종 계산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셸은 이번에는 자연과 수학에 관련된 책을 가져다주었다. 계산은 어려웠지만 끈질기게 반복을 하자 간단한 몇 가지 계산은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기뻤다.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빠졌다. 나는 지쳐서 앉은 그대로 책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얕은 잠에 막 빠져들 때 즈음 까닭 모를 의문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더라?

나는 무엇을 하고 있더라?

 

갑작스러운 감촉에 잠이 깨었다. 보드라웠다면 미셸이었겠지만, 그렇진 않았으니 바로 불렀다.

“콘라드 선생님.”

어둠 속에 선생님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엄하게 꾸짖는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선생님의 어투는 생각보다 상냥했다.

“제대로 누워서 자야지, 이블린. 이러고 잠이 들면 어떡하니.”

선생님은 내 무릎 위에 있던 책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가져가야겠구나. 아픈 아이가 너무 무리하면 못 써.”

슬슬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선생님이 책을 덮는 것이 보이고, 선생님의 얼굴도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아까 궁금해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선생님.”

“무슨 일이야, 이블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꿈이란 뭔가요?”

“네가 밤에 잠든 후에 보고 아침에 깬 후에 미셸이 기록하는 그 꿈 말이니?”

“아니요, 그 꿈 말고요. 오늘 책에서 읽었는데.. 사람은 자신이 그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했어요. 갑자기… 모르겠어요. 그 꿈이란 뭘까요? 사람의 꿈이란 뭘까요?”

선생님은 잠시 대답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좋은 질문이구나, 이블린. 사람이 살면서 삶이 지금과 달라졌으면 하는 바, 그 원하는 모습을 그 사람이 그리는 꿈이라고 해.”

달라졌으면 하는 바. 꿈.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통과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나 꿈을 그려야 하나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가령… 아까 말했던 것처럼 밤에 잠이 들어서 꿈을 꿀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렴. 꿈 속에서 몽롱하고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는 상태 말이야. 그럴 때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힘들겠지? 사람은 그렇게 꿈 없이 길을 헤맬 때도 있는 거란다.”

“그러면요, 선생님. 지금 이것도 꿈인가요?”

나는 꽃향기가 맡고 싶었다. 병실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건강해지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쇠하고 잘못된 자세로 잠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을 잃었다. 숲에는 꽃이 지천인 시기여도 나는 미셸이 가져다주는 꽃밖에 볼 수가 없었고 책 속에 끼워 말린 압화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아프고 나면 사람은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릴 수 있는 꿈은 오래 전에 시들어 말랐다.

“그래, 꿈이야.”

상냥한 선생님의 가운 위에서 약품 냄새가 알싸하게 풍겨와 코를 찔렀다. 몽롱하게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다행이다.”

나는 선생님의 몸 위로 미끄러졌다. 단단한 두 팔이 맥없는 내 등허리를 받아드는 것을 느꼈고, 멀리서 사각사각 무언가 기록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으로 그날 꿈은 끝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책은 없었다. 커튼 사이로 보일 듯 말듯 가는 빛줄기가 새어 들어와 시트 위로 드리워지고 그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새하얀 방 창가로 걸어가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손을 뻗어 투명한 유리창에 온통 하얗게 입김이 서릴 때까지 한참이나 어루만졌다.

[알렉에우] 회고

미에자 출신의 젊은이들이 참여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전술 회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들은 이성적이면서도 열정적으로 즐기듯이 토론했고 다툼이 일어나거나 과열될 참이면 알렉산드로스가 능란하게 분위기를 풀었다. 사랑받는 왕자. 그를 믿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젊은이들 사이에 있었다. 그럼에도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주도하는 전술 회의가 썩 달갑지는 않았다.

회의 중 알렉산드로스는 간혹 현재 발언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가 있었다. 에우메네스는 그 눈에서 기울어진 유리 같은 불안정성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볼 때면, 마치 뱀이 몸 주변으로 축축한 비늘을 감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식자를 물어뜯고 확인하는 것 같은 눈을 마주하는 것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에우메네스는 부러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회의에서도 그렇게 몇 번의 눈짓이 오갔고, 회의가 슬슬 마무리되면서 소란스러워질 때 즈음 에우메네스는 주변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페르디카스가 일어서 있었고 레온나토스가 그 옆에 붙어 있으니 저들의 뒤로 슬쩍 빠져나가면 무사히 회의장을 나갈 수 있다. 에우메네스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명지휘관도 미처 고려하지 못한 요소가 하나 있었으니,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움직임을 유의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저기 이타카의 왕이 폴리페모스의 동굴을 탈출하시네.”

뭐야, 서기관님. 술자리에 참석하기 싫으신 겁니까? 그러시면 안 되죠~ 젊은이들 모두 한 마디씩 거들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이게, 에우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가 주도하는 회의가 달갑지 않은 이유였다.

 

회의장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었다. 멀쩡하게 대화하는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적당히 말 상대를 해주면서 술을 홀짝이면 서기관을 취하게 해보겠다 오기를 부리는 젊은이들 몇이 그를 상대하다가 먼저 고꾸라졌다. 젊은이들의 본성을 관찰하기에 나쁜 기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상념에 젖어 다시 술잔을 다시 들이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하는군.”

“전하.”

“술이 약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빠져나가려고 건가?”

“도서관에 필사를 부탁한 책이 오늘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거 특별한 날에 억지로 붙잡은 것 같아서 미안한걸.”

“꼭 오늘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회의 후의 여가라면 술자리보다는 책이 좋아요.”

다소 건방진 대답이지만 왕자라면 이 정도 의견 표출로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알렉산드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자네는 무장보다는 지장, 아킬레우스보다는 오디세우스다 이거지.”

“전하. 전하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믿으십니까?”

전부터 신경 쓰이는 터였다. 필리포스 왕이 입버릇처럼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를 신화와 미신의 세계에서 떼어 놔야 해. 만약에 왕자가 그런 취급을 기분나빠하고 있다면, 술김에 나온 약간의 실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에우메네스. 오디세우스의 여로를 확인해 볼 생각은 없나?”

왕자가 취한 것일까 생각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에우메네스의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지구(地球)의 저편을 말하는 거야.”

눈이 마주쳤다. 알렉산드로스가 눈썹을 휘며 미소를 짓자 뱀의 머리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뱀이.

“내가 거꾸로 묻지. 자네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모두 꾸며낸 얘기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묘사는 과장되었을지라도 분명 영웅들의 묘사에 토대가 된, 실제의 영웅들이 있을 것이다. 용감무쌍한 아킬레우스, 현명한 오디세우스, 그 외 이름이 기록된 수천의 영웅들, 괴물이나 협력자로 묘사되는 이민족, 다른 문화, 여행…

“우리는 영웅이 될 걸세. 후대는 우리를 신화로 기억할 거야. 우리는 살아서는 지구의 저편을 보고 죽어서는 엘리시온에서 영원한 젊음을 얻어 쉬게 되는 거지. 낙원을 향해 동방으로 가자, 에우메네스.”

“엘리시온은 서쪽 끝이라고 나와있습니다만…”

“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구가 둥글다면 방향은 상관 없지 않겠어?”

“네, 네.”

웃음과 웃음이 교차했다. 왕자는 에우메네스가 제의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고, 이번 젊은이도 한참 술을 마시다가 결국 에우메네스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타카의 왕은 폴리메포스의 동굴을 빠져나와 고향으로 향했다. 마케도니아의 독주를 물처럼 들이킨 것은 역시 무리였는지 책을 읽다가 술기운이 몰려와 자꾸만 어질어질했다. 기다리던 책이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읽으려고 애를 쓰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 뱀이 몸을 감았다. 뱀은 왕자가 되어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세계의 끝까지, 영원한 낙원으로.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 잠이 깨었다. 숙취가 밀려와 윽, 하고 머리를 쥐고 어제 술자리에 어울렸던 것을 후회하면서, 비몽사몽간에 에우메네스는 생각했다.

그래, 당신은 그렇게 영원히 젊으리라.

[룩샨벨라] 고착

힛체는 독을 다루는 이방인이었고 힛클리마는 제사장이었다. 룩샨은 외지인의 자식이었고 룩샨 왕자는 국왕의 하나뿐인 적자였다. 실은 바뀐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룩샨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힛클리마에게 말하는 척을 했었다. 룩샨 왕자는 왕비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힛클리마에게 말했다.

“단순한 환청증세입니다.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어머니가 살해당했을 때 이미 몇년간 뼛속깊이 깨달은 바다.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최근 큰 일을 많이 겪어내셔서 심신이 불안정하신 모양입니다. 아마 오랫동안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왕자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었다. 룩샨이었던 시절 말해도 좋을 것과 말하기 조심스러운 것을 가리던 습관이 아직 남아있었다. 삼킨 말은 속에 간직할 수 있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왕자는 일단 의문을 눌러 담고 방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힛체는 그에게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 조언 덕분에 복수에 성공한 룩샨은 차분히 침대에 앉아 생각을 곰곰 정리해본다. 나는 어째서 환각을 겪는가.

룩샨은 일찍이 환각을 겪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안정을 취해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사랑에 배신당하자 사랑이라고 믿었던 증거를 피로 토하고 죽었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그녀의 마지막을 룩샨이 지켰다. 룩샨의 마지막도 그녀가 지킬 뻔했다. 그녀는 룩샨의 목을 조르다가 영문 모를 말을 잔뜩 쏟아냈다. 그때 들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단어의 나열이, 번들거리는 눈빛이 간헐적으로 눈과 귀를 메운다. 그녀는 나를 미워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를 저주하면서 죽은 것일까. 룩샨에게는 토할 것이 없었다. 욕지기가 올라와 시큼한 위액을 잔뜩 바닥에 게워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구토와 발작적인 악몽과 고열을 거듭하는 증세가 며칠간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사랑밖에 모르는 당신이 죽었듯이, 나도 당신을 따라 죽을 것이다. 국왕이 찾아와 심하게 앓는 왕자의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가엾은 왕자…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이렇게 앓을까. 그 간악한 왕비는 이제 없단다. 이제 안심하고 쉬거라.”

그녀가 없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또 귀에 선하게 들리는데.

‘나는 네 아버지를 도저히 저주할 수가 없으니. 네가 대신해.’

아, 룩샨은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감에 가슴이 메였다. 끅끅 우는 룩샨의 팔을 당황해 잡으려는 국왕의 손을 뿌리쳤다. 놀란 루테에게 룩샨은 입술 양끝을 말아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왕비는 국왕의 원수였다. 벨라는 룩샨의 벨라였다. 벨라는 룩샨을 미워하다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아버지 당신을 미워하다가 죽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저주하지 않은 것이다. 벨라는 죽지 못해 살았다. 룩샨은 살기 위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