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합작 – 그라레그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

파자마가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뉘이자 자동으로 불이 꺼진다. 눈을 감자 목이 죄인다. 숨이 막힌다.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머리맡의 장 위로 손을 뻗는다. 한 움큼 약을 쥐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입에 털어넣는다. 독한 약이 금세 녹아나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화끈거린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고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귀를 찌르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떴을 때, 뺨 위에 눅눅한 짠내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증세가 개선되었다고 생각해 눕기 전 미리 약을 먹어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주치의와 센서 레코드 전문가를 급히 다시 초빙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결국 이러한 증세에 대해서 뚜렷하게 알아낸 것은 없다. 그저 그의 ‘죽음’이 재생되는 순간 지각 정보가 사라지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흩어졌고, 그렇게 발생한 ‘오염’의 잔해가 남았다고만 추론하고 있을 뿐. 확실한 치료 방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해결된 채이다.

그라이바흐의 죽음의 원인 역시 미해결이다. 매일 치안관리국을 방문하여 담당 수사관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있지만 항상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 흔적이 끊겨 버린다. 당국의 수사력을 의심해본 적은 일찍이 없었는데도 스무 날 동안이나 뚜렷한 진척이 없다.

사실은, 그간의 스무 날이 무엇을 하면서 지나갔는지 또렷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흐릿한 감상 삭혀지지 않는 감정 꽉 막힌 울분과 발작적으로 방망이질하는 맥박. 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나간 오늘이 스물 한번째 날. 홍보국에서 이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의하지만 역시 아직까지는 거절하고 있는 중이다. ‘오염’의 후유증이 더욱 안정될 때까지 기자 초청은 최대한 연기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 정리할 것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슬슬 공석인 그라이바흐의 후임에 대해 결정을 내릴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토마타의 연구에 있어서 그라이바흐에 비견될만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기에 홍보국과의 회의가 끝난 후 형질 연구소를 방문해 보았다. 나와 메르키오르 그리고 그라이바흐의 유전자 정보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연구소에는 우리 유전자의 외형정보까지 세밀하게 저장되어 있었고 나는 입체영상을 통해 그라이바흐의 유전자를 다시 발현시켰을 때의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영상을 바라보다가 치워주길 부탁했다. 영상은 웃고 있는데도 왼쪽 뺨에 보조개가 더욱 깊게 파이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반쯤 접히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새로 만드는 개체는 그라이바흐가 아니며 연구의 공석을 당장 메울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가지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연구소를 나서는 길에 눈발이 날렸다. 가을 날짜에 걸맞지 않은 싸리눈이 나뭇가지 위로 걸려 한 겹씩 쌓였다. 그러고보니 그간 기상조절장치에 대해서 지시하는 것을 한참이나 잊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는, 고의로 눈이 내리도록 기상조절장치를 조절하기도 했었지만.

겨울의 한 달에 다섯 번쯤이었다. 사실 눈이란 것은 썩 효율적인 기후는 아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눈발이 희게 희게 흩날리고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그라이바흐만이 뚜렷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날에 당신과 나는 손을 맞잡고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세상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보이는 것은 그 뿐이었던, 어깨에 진 모든 것을 잊고 다만 당신의 여자로 있을 수 있었던 찰나. 한참을 단둘만이 눈 속에 묻혀 있다가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면 곧 녹아버렸고 이 순간도 잠시뿐임을 깨달은 나는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돌려놓았다. 그럴 때면 그는 말했다. 나보다 안정적으로 인민을 통치하는 오토마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나는 그 진심이 금방 녹아버리는 거짓이라도 좋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상 가운데, 잠시간의 오류였는지 눈이 그쳤다.

세계의 외각선이 머리 아플 정도로 또렷한 색채가 되어 아프게 눈을 찔렀다. 어지러워 욕지기가 났다. 몸이 떨렸다. 구역질을 하다 손을 옆으로 뻗어 허공을 낚았다. 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 이 메스꺼움이 오염 같은 것일 리 없다. 당신이 없는 세상부터가 이 몸에 오염이었다. 당신이 사라진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라이바흐, 당신이 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지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어.

남은 삶이 너무나 길어.

 

너무나 길었던 삶, 당신이 사라진 지 204948일째 되는 밤이다. 지상은 당신의 의지대로 다시 오토마타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것이고, 당신이 원했던 대로 이 세계를 통치하는 여자 역시 오토마타다. 오랜만에 눈발을 낚았다.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웃음이 났다.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

[콥블린] 생화

그는 검은 옷을 입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빳빳이도 다린 양복, 바지 주머니에 슬쩍 찔러넣은 왼손, 오른 손목과 팔꿈치에만 눈에 띄게 남은 구김 자국. 포마드로 한 올 삐짐 없이 넘긴 금발, 뒤로 넘어갈 정도로 당당하게 젖힌 상체와 딱 벌어진 어깨. 그 모두가 왕의 상징이다.

밤거리는 검다. 그는 밤거리의 왕이다. 특히나 오늘은 폭군이다. 호박색 눈을 범처럼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다 거슬리는 것이 눈에 띄는 대로 발길질을 하고 포효를 지른다. 그는 그래도 여자는 차지 않았다. 구두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대신 손이 벗다시피 한 여자들의 가슴을 몇 번 주무른다.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른다. 낄낄거리며 웃기도 하고 놀라서 몸을 뒤로 빼기도 한다. 몸을 빼면 왕이 주사를 부린다. 아가씨 몇 명은 그만 깜짝 놀라 울어버렸다. 질질 짜는 소리마저 왕의 심기를 거스를지 모르니, 옆에서 빨리 자리를 빠져나가라고 눈치를 준다. 남은 아가씨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입가가 굳었다. 속으로는 아까 울음을 터뜨리고 빠져나간 아가씨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가씨들은 자기들이 일회용 꽃으로 서 있는 걸 알고 최선을 다해 웃는다. 그러라고 있는 아가씨들이었다.

콥은 속이 시원했다. 그래, 그게 다들 살아가는 법이지. 콥은 최선을 다해 가슴을 피고 쉬지 않고 포효했다. 그러라고 있는 왕의 자리였다. 엿 같은 밤거리. 엿 같은 인생. 언제 머리에 총구멍이 날지 모르는 일회용 인생. 어쨌거나, 오늘 밤거리에서만큼은 그가 왕이다. 뻣뻣한 플라스틱 조화가 되어 피어 있는 아가씨들을 차례로 주무르다 보니 조화가 아닌 게 하나 있었다.

“이건 뭐야?”

왕의 시선은 정확히 소녀의 흉부에 꽂혀 있다. 어린 나이에 인생 망친 계집들이야 한둘이려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린 거야 그 알 바 아니다. 뒷골목 계집 같지 않게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것도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젖가슴이 없다시피 한 것도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사실, 별 변태 같은 새끼들 취향 다 있나보네 하고 비웃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계집애 그 자체였다. 웃고 있지도 않고 뻣뻣하게 서 있지도 않고 바닥에 시든 풀 같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릎을 감싸 안은 계집애. 왕을 봐도 놀라는 척도 않고 멀거니 눈동자만 들다 만 계집애. 콥은 발길질을 했다. 시들어가는 풀이 고대로 엎질러졌다. 주변 아가씨들만 움찔하고 말았다. 이건 순 죽어가는 풀이었다. 옆으로 미끄러진 채로 계집아이는 밀랍 같은 목을 살짝 틀었다.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아?”

어안이 벙벙해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괜찮냐고 묻는 거야.

“이거 미친 년 아니야.”

재차 구둣발을 높이 드는 순간 소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에 대강 감겨 있던 붕대가 주륵 흘러내렸다. 구슬처럼 파란 오른쪽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이 곧 반달로 휘었다. 소녀가 웃자 까닭 모를 현기증이 일었다.

“당신 오늘 친구를 잃었잖아. 외롭지 않아?”

파란 안광이 유난히 번쩍인다 싶더니 순간 검은 밤거리가 하얗게 바랬다. 영사기로 띄운 영상처럼 과거가 돌아갔다. 그래, 오늘 콥은 자신을 믿는 친구를 불러냈다. 바람 부는 밤에 친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빵 하는 총성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콥은 비틀거리며 이마를 쥐었다.

“이 년, 뭐야! 대체 뭐하는 년이야!”

“걱정 마, 당신을 놀리는 거 아니야.”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까지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소녀의 팔은 너무 작고 가녀려서 콥을 다 안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소녀는 되는 한껏 콥을 끌어안았다. 피 냄새 밴 양복 위로 작은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나도 믿었던 사람들을 잃었거든.”

완전히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당장 소녀를 다시 걷어차 떼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꽉, 있는 힘을 다하여, 일말의 악의도 없이 닿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고, 밤거리가 더 이상 까맣고 엿같지만은 않고 하얗고 덥게도 느껴져서. 자신에게 꼭 매달려서 들썩이는 어깨를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그 밤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고, 소녀가 그 듣던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소녀를 주워간 지 두 보름도 더 지나서였다.

금방 죽어버릴 것 같던 풀은 물만 좀 축여줬다고 금세 생생하게 살아났다. 키우는 보람이 있었다. 밀랍 같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부스스하던 머리에서는 윤이 났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원래 너 만한 애들은 그만한 거냐, 아니면 니가 작은 거냐? 와, 이건 진짜 심하네. 어떤 미친놈이 저걸 데려가려나.”

마녀가 키득거렸다. 역시 미친년이다 싶어 질린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이블린은 콥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미친놈.”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저거, 진짜 미친 년 아니야. 그래도 웃고 있는 마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렇게 엿같지만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얬다.

사약 합작 – 마르루디마르

1. 기억

높지도 낮지도 않은 탁자지만 아주 어린 루디아가 올라가기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팔을 뻗어 바둥거리자 등 뒤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양 겨드랑이 밑으로 아버지의 큰 손이 쑥 들어왔다. 몸이 번쩍 들려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바닥이 아래로 빠르게 쑥 꺼지고 어느새 루디아는 턱 하고 탁자 위에 올라서 있었다. 태양빛 속에서 팔랑팔랑 날갯짓하던 노랑나비가 가까워진 듯하면서도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고 아른거렸다. 계속 팔을 휘젓는 루디아를 보면서 아버지는 계속 웃기만 했다. 저도 모르게 울상이 될 때 쯤 시야에 그림자가 졌다. 곱디고운 나비 위로 더 고운 손이 겹쳐졌다. 어머니는 손 안의 나비가 상하지 않도록 둥글게 낀 깍지 틈새를 루디아의 눈앞에 가져다대고 살짝 보여주었다. 햇빛이 충만한 날이었다. 어머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란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아 날갯짓이 금색으로 아른거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어머니의 안경알 위에도 황금빛 잔상이 반사되어 남실거렸다. 어머니는 환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2. 여자

여자는 짧은 하늘색의 단발을 하고 있었다. 속눈썹이 아주 짙었고 루디아가 온 것도 모른 채 습관대로 연홍빛 입술을 비죽이며 서류를 탐독하고 있었다. 프로폰드 내부에 들어오고도 여자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은 요행이라 모르는 체 지나가려 했지만 눈 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음에 거슬려 차마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만 시선을 들켜버렸다. 내리깔고 있던 여자의 눈꺼풀이 살풋 들렸다.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지긋지긋한 여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빙긋이 웃었다. 당혹해 살짝 얼굴을 붉힌 루디아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는 미소가 짙어졌다.

“안경, 신기하니?”

“벗지 그래요. 실체도 없는 여자가 안경이라니 우습네.”

 

 

3. 소용돌이

언제부터인가 그저 쫓기고 있었다. 오염자. 현상범. 소용돌이에 침식된 괴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납득하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저항하다 보니 보랏빛의 힘이 칼날이 되어 주위를 난사했다. 피가 튀었다. 루디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쓰러져 가는 부모님이 루디아에게 묵빛 검을 쥐어주었다. 꺼져 가는 마지막 힘으로 루디아의 손을 몇 번이고 부여잡고 쓰다듬었다. 눈앞의 장면으로부터 도망치고 힘닿는 데까지 도망쳐서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도 보지 못하고 뛰고 또 뛰다 보니 흑과 백의 세계에 들어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색조차도 없었다. 머릿속이 새까맣다가 새하얗다가 했다. 루디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

“엄마.”

루디아는 홀린 듯이 소리의 진원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색이 있었다. 사람이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머리칼의 여자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했다.

“울지 마, 아가. 내 아가…”

아직도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아가, 엄마는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목숨 같은 건 아깝지 않아…”

 

 

4. 바다

루디아는 부러 여자의 머리색에 의식을 집중하고는 했다. 어머니의 머리는 태양같은 금발이었지만 여자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파란 바다가 떠올랐다. 루디아는 여자가 판데모니움의 정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용돌이 안팎을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루디아에게 접근하는 것도 의도가 뻔했다. 루디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 외부에서 이런 저런 음식도 구하고 정보도 알아와야만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 내부로 도망쳐 쉬어야만 했다. 그러면 꼭 그 여자가 루디아에게 접근했다. 친한 척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치근덕거렸다. 어머니처럼 어르기도 했다. 그러면 루디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여자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넘실대는 파란 바다 같은 머리칼을 보면서 되뇌는 것이다. 여자는 루디아의 어머니가 아니고, 루디아는 여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대신에 그렇게 보면 볼수록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처럼 안경을 쓴 모습은 담담히 볼 수가 없었다. 다가가 안경을 벗겨 내자 여자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는 가까워진 루디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역시 여자는 아름다웠다. 살결은 매끄러웠고 웃음 지을 때면 볼우물이 깊게 패였으며 눈동자는 살면서 본 그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처연했다. 한두 번 지은 웃음이었으면 그렇게 유혹적일 리가 없었다. 유혹이 진심이었으면 그렇게 애달픈 눈일 리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 때 여자의 입술이 소리 없이 두 번 벌렸다 오므렸다 했다.

‘아가.’

눈부터 뺨, 입가까지가 달아올랐다. 루디아는 다시 정신없이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의 머리칼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코끝까지 바다 냄새가 났다. 쏴아 하고 파도가 쳤다. 하얀 거품이 일었다. 몸에 부딪혀 오는 포말이 알알이 부서져 뺨을 뜨겁게 적시고 루디아는 눈을 감았다.

황혼분이 부족합니다… 황혼분 주세요…

아이들의 심장이 아직 덜 여물어서 한 뼘 주먹 안에 들어왔을 때의 습관이다. 지루한 수업 중에 그라이바흐는 자꾸 딴 구석으로 눈을 돌렸고 전날 밤에도 자기만의 연구에 몰두하던 메르키오르는 졸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고 레드그레이브는 앞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는 듯 하다가 슬쩍 손을 양옆으로 내밀어 사내아이 둘을 꼬집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제 얼얼한 옆구리를 만지는 아이들에게 레드그레이브는 수고했다며 뺨에 입을 쪽 하고 맞췄다. 그라이바흐를 먼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스쳐지나가는 입술을 통해 심장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가볍게 살짝.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메르키오르에게 애정어린 입맞춤을 좀 더 길게.

그 때마다 까닭도 모르고 벌렁거리던 메르키오르의 부연 심장에 내용물이 점점 단단히 들어차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레드그레이브의 아름다움을 볼수록 메르키오르의 가슴에 자라나는 것은 추한 것뿐이었다. 열등감. 질투. 의심. 피해망상. 혐오. 그는 나날이 조금씩 더 의심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거늘. 추하고 괴로운 감정이 거꾸로 흐르는 피를 타고 200억제곱이 될 때까지 의심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거늘, 이 세계의 어머니는 모든 어리석은 이들을 사랑하고 이끌도록 여성으로 만들어졌으므로. 그녀는 각별히 가엾은 어린 아이같은 그의 형제를 더욱 어여삐 여겨 사랑했거늘. 레드그레이브는 메르키오르의 발작적인 행위를 장난치는 아이를 보는 어머니처럼 어여삐 보았고 그 감정이 광기에 달해서 세계를 집어삼켰을 때도 그랬다.

가엾은 어린 아이. 가엾은 메르키오르. 너의 청춘을 애도해.

오래도록 사랑했던 어리석은 아이의 까맣게 말라붙은 심장에 안식을 주기 위해 어머니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쿤샬롯] 스킬명 합작 – 상냥한 밤

모든 것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비단 내가 지금 이 빛이 없는 세계에 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후로 겪게 된 세상에 비하면 그때는 아픔이나 슬픔, 그리움조차도 없는 흐릿한 무채색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집이 있었다. 집 바깥으로는 풀이 있고 나무가 있었다. 가끔은 꽃도 있었다. 풀과 나무와 꽃은 집에서 멀어질수록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숲이라고 부르셨다. 숲에는 온통 안개가 자욱해서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숲 깊이로 들어갈수록 풀 비린내가 강해지는 것은 알았다. 풀냄새가 아직 싱그러운 숲의 초입에서 선생님은 멈추어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다. 나는 그 선율을 반주로 성가를 불렀다. 그러고 있으면 파랑새가 날아와 내 어깨 위로 앉았다. 금방 날아갈 것 같이 희미한 무게였다.

노래를 멈추고 새에게 손을 뻗었다. 흰 털을 부풀린 배가 퍽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가느스름한 숨결을 느끼고 있자니 선생님도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따라 손을 뻗으셨다. 새를 한 손으로 움켜쥔 선생님은 숲 깊은 방향으로 걸어가 나무에 대고 손을 누르셨다. 새가 좌우로 꽁지깃을 흔들면서 아까는 들어보지 못했던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나무 위로 빨간 얼룩이 튐과 동시에, 새의 울음과 움직임이 함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고는 멎었다. 선생님이 손을 놓으시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새는 붉은 자국과 함께 풀밭 속으로 툭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죽음이라는 거란다.”

무엇을 이르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알아들으셨다. 나는 언제고 선생님과 함께였으니까.

“죽음을 맞은 생물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돼. 이 새가 죽은 것은, 샬롯이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이기 때문이야. 샬롯은 순백의 소녀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다른 생명체와 닿았으니 이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거란다.”

이제와 생각하면 선생님은 내가 다른 생물과 닿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때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기에 다시 새에게 손을 뻗을까 생각하다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나는 움직이는 것에 닿고 싶었다.

“제가 순백의 소녀로 남아있어야 해요?”

“그렇단다.”

“그건 어째서예요?”

선생님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으셨다. 나는 그대로 우두커니 멈추었다. 손이 닿는 곳은 방금 새가 앉았던 자리였다. 선생님이 어깨를 누르는 힘은 자그마한 새의 무게보다 훨씬 느끼기가 쉬웠다. 그러나 그도 곧 사라졌다.

“자, 보렴. 새가 앉았던 흔적이 남았지.”

선생님이 내민 깃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야를 파랗게 휘저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단다. 백색에는 얼룩이 지고 세포는 독소로 오염돼. 인간은 노화해서 살가죽이 부패하고 정신이 혼탁해지지. 생을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나 인과에 개입하고 상념이 뒤죽박죽 얽히다 보면 결국 영혼은 가능성의 힘을 다해 소멸하고 만단다. 그게 이 세계의 순리야.”

이야기는 눈앞에 흔들리는 깃털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반대로,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닿아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아이가 있다면 무엇이든 정화할 수 있게 돼. 노화도, 흡혈귀의 주술도, 수많은 영혼을 삼켜서 수명을 늘린 악마에게 끼치는 저주도……. 나는 아주 오래 살면서 업을 쌓았기에 너를 필요로 해, 샬롯.”

이야기가 지나치게 어려웠기에 나는 손을 모아 쥐고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짧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사라졌으면 좋겠니?”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있었다.

“어째서 선생님은 그렇게 오래 사신 건가요?”

“복수를 위해서란다.”

“복수라는 건 뭔가요?”

선생님은 대답을 않고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셨다. 손에 얼굴이 더 가득 닿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손을 금세 아래로 치우셨다.

“자. 이제 들어가자꾸나.”

사실 나는 집에 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집 안에는 움직이는 물체가 전혀 없었다. 숲과는 달리. 숲은 나와 다른 저절로 움직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렴풋이는 안개 낀 청록색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구석 총천연색으로 메워진 곳이 바로 숲이었다. 해가 뜨면 눈부신 새벽 어스름이 하늘을 채우다가 저녁이 되면 노을이 져 붉어졌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나부끼고 더 기다리면 잎새가 빛깔을 바꾸었다. 가끔은 산새나 토끼도 눈에 띄었다. 봄에는 분홍 주홍 색색의 꽃이 피지만 겨울이 되면 전부 얼어붙어 꽃도 동물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발이 날리는 광경은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무 밑둥에 앉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숲을 바라보며 저 청록의 안개 너머로 몸을 던지고 싶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고 있자면 선생님이 다가와 눈을 가렸고,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선생님과 나 둘 뿐. 나는 선생님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머나, 귀여운 아가씨로구나. 카렌베르크에게 이런 깜찍한 딸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아니면 새로운 취미?”

가슴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여자는 눈꼬리를 휘며 보랏빛 손톱을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인도로 며칠에 한 번씩 대성당에 앉아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부가 보이지 않는 기도실에서로, 나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볼 뿐 누구도 내게 말을 건 적은 없었다.

“손대지 마, 비르기트. 그 애는 ‘순백의 소녀’니까.”

“어머.”

여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호박색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그런 게 가능했던 거야? 그랬나 보네, 당신이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그래……. 그럼 내 집 안에다 손대지도 못하는 애를 들여다 놓은 거네? 재미없게.”

“장난치지 마, 비르기트…….”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이 애를 너에게 보여주러 온 거야. 내 불사는 이제 완전해. 비르기트,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당신이야말로 장난치지 마. 이런 반쪽짜리 불사를 가지고 와서 이 비르기트에게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본분을 잊은 심복 때문에 머리가 아파. 당신한테까지 신경 써 줄 의향은 없어.”

여자가 손톱으로 내 뺨을 콕 찔렀다. 따끔했다. 선생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했다.

“잠깐 다른 방 안에 들어가 있으렴, 샬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성이 오고가는 것을 처음 듣는 가슴이 새처럼 콩닥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도망치듯이 뒤를 돌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저택은 지나치게 크고 넓었으나 그간 내가 들어가 본 곳은 밀폐된 기도실 혹은 나지막한 천장의 오두막이 전부로, 고개를 들어도 천장까지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가 눌렸다. 심장이 계속 달음박칠쳤다.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걷고 또 걸으며 눈앞에 늘어선 방문 앞마다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원래 있던 집 안에는 선생님이라도 계셨으나 저택의 방 안을 들여다보면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으니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렇게 복도를 계속해서 걸었다.

처음에는 복도의 끝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걸으며 다가가 보니, 어둠 속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땅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처음 보았다. 아마 이런 공간을 지하라고 했던 것 같다. 계속 하던 그대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음에 실망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나직한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짐승의 숨처럼 그르렁대는 소리였다.

나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가 지하에 들어서니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훅 끼쳤다. 처음에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곧 희미한 불빛에 눈이 익어 겨우 앞으로 향할 수는 있었다. 처음 들어와 본 지하를 희미한 불빛과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에 의지하여 나아갔다.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두근거렸다.

아, 바로 그 순간이었지.

마침내 보인 것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생물과도 다른 형체였다. 사지는 인간을 닮았으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쇠와 같았고, 반원형의 두 뿔이 머리로부터 눈에 띄게 솟았다. 얼굴에는 살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듯 보이는 그 기묘한 형체는 바닥의 그림자에 붙들린 것처럼 앞으로 무너진 채 몸을 움찔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바깥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던 걸까, 아니면 사람을 닮은 동물인 걸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그가 번개같이 내 발목을 낚아채 나는 엉덩이부터 바닥에 굴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지하실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봤군. 이 모습.”

‘그’는 속박된 채 얼굴만을 들어 내동댕이쳐진 나를 보고 있었다. 안광이 붉었고 숨소리는 인간과 짐승을 섞어놓은 듯 그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곧 멈추었다. 내 발목을 잡은 손부터 하얗게 인간의 살결로 바뀌고 있었다. 신체를 속박하고 있던 어둠도 곧 스르르 스러져 그는 윗몸을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이 희었고 연한 청록의 머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머리 사이로 드러난 귀는 뾰족했으나 그마저도 아주,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너…….”

그대로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가 씩 웃었다.

“추하지는 않군.”

만족한 듯 한결 누그러진, 아니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뿌리쳤다.

“다른 생명체에 닿으면 죽어.”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두커니 나를 보다 이윽고 물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다른 누가 그렇게 말한 거지?”

“……선생님이. 내가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아서 남에게 닿으려 하는 거라고.”

“선생님?”

“카렌베르크 선생님.”

그러자 그는 나도 선생님도 하지 않는, 처음 보는 방식으로 웃었다.

“아……그래. 정말 해 버렸군, 그 작자. 지금 속박이 풀린 것도 이해가 가. 그리고 그게 내 앞으로 떨어졌고.”

그러나 역시 퍽 아름다웠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내 옷 위로 살짝 드러난 목에 손을 대었다. 냉방에 방치되어 있던 살결의 싸늘함에 목에서부터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가만 그렇게 있자, 머리끝까지. 신기한 마음에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다른 생물과 닿는 게 싫어?”

“아니.”

“좋아?”

“응.”

“너, 이름이 뭐지?”

“샬롯.”

“그렇군. 샬롯.”

“응. 샬롯.”

목소리가 떨렸다. 다른 이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나가자, 샬롯.”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는 선생님이나 노래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보다도 훨씬 고왔다. 소리가 숨과 함께 귀에 닿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잠시 숨이 멎는가 했다.

“카렌베르크가 만든 아이라면 너는 분명 어딘가 갇혀서 거의 나오지 못했겠지. 그렇지? 다른 누구를 만나는 것도, 마음을 나누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겠지. 그러니 얼마나 갈망했을까. 다른 생명에게 끝없이 닿고 또 닿고 싶다고 느끼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 그건 외로움이라는 거다. 그러나 평생 외롭고자 하는 자는 없다. 갇혀 있던 너도, 나도. 이제부터는 다른 이와 마음껏 부대끼도록 해 줄게. 나와 함께 여기를 나가자, 샬롯.”

갑작스런 제안에 대답을 미처 못하는 내게 그가 다시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뭔가 변할 거라 생각하니?”

같은 것을 두고 선생님은 호기심이라, 그는 외로움이라 했다.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마주친 눈동자는 숲과 같이 안개 낀 청록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닥쳐올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고, 그것은 선생님과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외로움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팔을 올려 머리 위로 얹힌 무게에 손을 뻗었다. 무게가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내 눈가에 고인 물을 닦아냈다. 손에 얼굴이 더 가득 닿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지하의 먼지가 하얀 뺨 위에 묻었다.

모든 것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비단 내가 이 세계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외로운 공간을 나서자 내민 그 손을 맞잡은 후로 도착한 모든 세계의 감각이 갇혀 있던 내게는 인지의 극을 흔들어 달릴 만큼 아찔했기에. 맨발로 숲 속을 내달리고, 살에서 땀을 흘리고, 백색에 얼룩이 지고, 몸에서 피를 흘리며 새로이 만나는 모든 세상이 내게 형용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희열이고 행복이었기에. 그리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곧 내 기억은 끊긴 채로 이 빛 없는 세계에 오게 되기에. 그러나 그날이 아주 상냥한 밤이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가 서 있는 지금은, 얼어붙은 밤이다. 선생님은 내가 죽음을 맞으면 다른 이와 헤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으셨다. 어둠 속 그가 가르쳐 준 외로움이 죽음과 함께 손끝에 아리게 스민다. 추억만이 행복을 만들어 나는 눈발을 맞아 곱은 손을 감싸 쥐며 이것이 그의 서늘한 손이라 꿈을 꾼다.

아아, 그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