힛체는 독을 다루는 이방인이었고 힛클리마는 제사장이었다. 룩샨은 외지인의 자식이었고 룩샨 왕자는 국왕의 하나뿐인 적자였다. 실은 바뀐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룩샨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힛클리마에게 말하는 척을 했었다. 룩샨 왕자는 왕비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힛클리마에게 말했다.
“단순한 환청증세입니다.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어머니가 살해당했을 때 이미 몇년간 뼛속깊이 깨달은 바다.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최근 큰 일을 많이 겪어내셔서 심신이 불안정하신 모양입니다. 아마 오랫동안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왕자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었다. 룩샨이었던 시절 말해도 좋을 것과 말하기 조심스러운 것을 가리던 습관이 아직 남아있었다. 삼킨 말은 속에 간직할 수 있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왕자는 일단 의문을 눌러 담고 방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힛체는 그에게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 조언 덕분에 복수에 성공한 룩샨은 차분히 침대에 앉아 생각을 곰곰 정리해본다. 나는 어째서 환각을 겪는가.
룩샨은 일찍이 환각을 겪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안정을 취해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사랑에 배신당하자 사랑이라고 믿었던 증거를 피로 토하고 죽었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그녀의 마지막을 룩샨이 지켰다. 룩샨의 마지막도 그녀가 지킬 뻔했다. 그녀는 룩샨의 목을 조르다가 영문 모를 말을 잔뜩 쏟아냈다. 그때 들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단어의 나열이, 번들거리는 눈빛이 간헐적으로 눈과 귀를 메운다. 그녀는 나를 미워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를 저주하면서 죽은 것일까. 룩샨에게는 토할 것이 없었다. 욕지기가 올라와 시큼한 위액을 잔뜩 바닥에 게워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구토와 발작적인 악몽과 고열을 거듭하는 증세가 며칠간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사랑밖에 모르는 당신이 죽었듯이, 나도 당신을 따라 죽을 것이다. 국왕이 찾아와 심하게 앓는 왕자의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가엾은 왕자…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이렇게 앓을까. 그 간악한 왕비는 이제 없단다. 이제 안심하고 쉬거라.”
그녀가 없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또 귀에 선하게 들리는데.
‘나는 네 아버지를 도저히 저주할 수가 없으니. 네가 대신해.’
아, 룩샨은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감에 가슴이 메였다. 끅끅 우는 룩샨의 팔을 당황해 잡으려는 국왕의 손을 뿌리쳤다. 놀란 루테에게 룩샨은 입술 양끝을 말아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왕비는 국왕의 원수였다. 벨라는 룩샨의 벨라였다. 벨라는 룩샨을 미워하다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아버지 당신을 미워하다가 죽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저주하지 않은 것이다. 벨라는 죽지 못해 살았다. 룩샨은 살기 위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