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성

1. 크레니히는 사실상 집에 갇혀 자란 것과 진배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와 싸운 기억이 있다. 지금은 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하디 사소한 이유였다. 생떼를 부리며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다가, 갑자기 숨이 가쁘더니 곧 세상이 노랗게 회까닥 돌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가 크레니히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마르그리드는 크레니히를 집 밖에 홀로 두려 하지 않았고, 크레니히도 감히 어머니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깨어나 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며 눈물 젖은 뺨을 크레니히의 얼굴에 잔뜩 부비던 어머니의 볼에서는 소금기 짠 내음이 났다. 그 집은 소금으로 된 성이었다.

 

2. 로쏘, 라고 하면 화학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연구에 미친 천재는 새로운 연구거리를 또 잔뜩 만들어내고 감탄도 욕도 진탕 들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수식이나 법칙으로 정리하는 데 도가 텄지만 살면서 이성을 흐리게 하는 악마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악마는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홀리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더니 기어코 악귀로 붙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악마의 자식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악마의 새끼 아니랄까봐 과연 새끼 악마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소금 성에서 키운 악마. 그녀가 땀과 눈물로 쌓은 성에서 완성시킨 악마. 로쏘는 소금 성에 갇혀 있다.

 

3. 크레니히가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불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크레니히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확연하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동료를 툭툭 치면서 뭐라고 말을 했다. 동료는 고개를 젓다가 멋쩍은 듯 웃고는 크레니히 쪽으로 걸어왔다. 어머니 외에 한 명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크레니히는 어느 누가 자신을 보는 것도, 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빠짐없이 달가웠다.

“자, 크레니히. 저쪽에 가서 로쏘 아저씨에게 인사하렴. 오늘부터 네 양아버지가 될 분이시란다.”

열여섯 살까지 어머니와 단둘이만 지냈던 크레니히에게는 어느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도, 방금 들은 말의 내용도.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년은 아까 바라보던 남자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소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 하세요…….”

“팔자 더럽군.”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서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짓씹듯 말했다.

“너는 장례가 끝나면 나랑 같이 내 집에 갈 거서 거기서 지낼 거다.”

“감사합니다…….”

세상 물정엔 어두워도 최소한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건 알 수 있었던 크레니히는 빠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 말할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로쏘… 아저씨?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를 일은 없을 텐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4. “돈은 여기에 놔둘 테니 네가 알아서 해. 귀찮게 신경쓰게 하지 말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족하면 말을 하든가 말든가.”

로쏘의 집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자그만 방에 있는 것은 침대와 책상이 다였다. 낯선 곳에 있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집에 있다는 사실에 계속 심장이 두근거려 크레니히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밖에서 이따금 종이 넘기는 소리나 펜을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만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혹은 먹을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다. 처음 며칠은 굶었다. 그렇게 굶주린 눈에야 조악한 칼로리바나 식사대용 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대강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크레니히는 결국 혼자 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크레니히는 어머니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혼자서도 외출할 수 있었고, 혼자서 외출해야만 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혼탁하게 뒤섞여 눈물이 났다. 어색한 솜씨로 크레니히는 여러 가지 식재료를 집에 채워놓았다. 혼자서 식사를 하다가 이거 괜찮네요, 엄마. 하고 앞에 음식을 권할 뻔했다. 혼자였다.

몸이 좋지 못했던 소년은 해가 다 뜬 후에 일어나 저녁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조금씩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로쏘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레니히는 로쏘가 며칠씩 걸러서야 불규칙하게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일까, 어디서 지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그 순간 완전히 지쳐 있던 로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없는 것처럼 행동해. 좋아서 널 맡은 거 아니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소년은 방문 틈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흔적을 좇다가 결국 침대에서 훌쩍거리며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어났을 때, 크레니히는 휑하던 방 안에 책이며 노트며 장난감이며 못 보던 생활용품이 잔뜩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5. 꼬박 한 달이 지나자 크레니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혼자서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것도, 책을 찾아 읽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까지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로쏘라는 남자였다. 혹은 혼자 지내는 것이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크레니히 자신이 며칠, 혹은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집에서 나왔을 때 크레니히는 자신이 이제 어쩌려는 작정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알았고 도착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알았다. 구역 밖으로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라 종일 거리를 헤맸다. 날이 저물고 길을 잃었나, 이대로 어디도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싶을 때 즈음에야 낯익은 풍경, 낯익은 거리, 낯익은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헤매지 않았다. 발이 먼저 가는 대로 따르고 나니 십년 넘게 어머니와 함께 둘이 지냈던 집이 보였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오래된 집으로 향하던 크레니히는 집 정문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추었다. 어쩐지 시큰하고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열망이 더 강했기에 소년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집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쓰던 가구와 소품들 위에 추억이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추억을 되새기던 크레니히는 깊이 들어서서야 집 앞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 달을 비웠을 집이 먼지도 거미줄도 없고 누군가 지내는 것처럼 살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겁이 나서 제 어깨를 끌어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크레니히는 마침내 범인을 발견했다. 마르그리드가 주로 연구를 했던 방, 나무 의자 위에서 붉은 머리 남자는 소품처럼 당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특수목적 기계개발 성공사례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애를 써 되짚어도 어느 시점 혹은 어느 순간이 시작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첫 만남조차도 불명확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만나 무엇을 했는지 무엇 하나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다만 어느 먼 훗날 내면에 침잠해 센스 레코드의 기억을 찬찬히 살필 때 시작도, 끝도, 순서도 없이 불티처럼 피어나는 장면과 감정들. 어린 숨결과, 부드러운 손의 감촉과, 짐짓 짓궂은 목소리로 서로 반론을 제기해보곤 했던 사상과 이론, 그러다가도 머리를 맞대고 밤 새워 읽었던 연인들의 비극.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때리면 다시 손을 맞잡고 굳이 서로 맞추어 걸었던 발소리까지.

기억과 장면은 죄 불씨처럼 단편적이지만 불길이 붙어 훗날까지 오래도록 이어져간 것들이 있었다. 가령 오토마타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짬이 날 때마다 발맞춰 연습했던 둘만의 춤이 있었으며, 언제든 상대는 서로뿐이니 이야기할 때 눈을 돌리지 말자고 귓가에 속달거렸던 약속이 있었다. 열두 살이었다. 열두 살배기 아이들의 약속은 각자가 머리가 굵어 소녀가 냉엄한 감시자로 불리고 소년이 천재 공학사로 불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작 열두 살짜리들이 그러했느냐면 정말로 그랬다. 열두 살이라고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종이에 물에 스미듯 당연하게 사랑했고 아침 해가 그림자를 자르듯 막힘없이 자라났다. 여느 연인들처럼 마음이 자라고 몸도 자랐다. 세상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드물게 의견이 맞지 않아 입술을 삐죽이면 그 위로 새처럼 입을 맞추고 곧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이렇듯 정책이나 기술, 현안 따위를 토의하는 것이 세계를 위하여 만들어진 자들의 일상이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몇 번인가는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헤치고 기지개를 켜고 머리까지 풀어헤쳤다.

그런 후에는 종일 나가서 들어오지 않기도 했고 아예 방에서 나가지 않기도 했다. 간식과 책과 옷가지가 굴러다녔다. 레드그레이브가 둘둘 말린 이불 안에서 맨발을 내밀고 발끝을 까딱거리면 그라이바흐가 꽃을 꺾어다 이불 속에 파묻힌 여자의 얼굴 아래 들이밀었다. 여자는 간지럽다고 웃고 이불이 흔들리다가 남자의 품 안으로 넘어져 버렸다. 꽃이 쏟아졌다.

…(중략)…

그렇기에 그들은 여느 연인들처럼 싸우고 소원해졌다. 역시,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는다. 따져 보면야 이것저것이 많지만 의미는 없다. 서로의 분야가 달랐던 것, 가끔 내색하는 서운함도 무시했던 것, 업무와 선천적인 신체의 한계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룰 수 없었던 것, 생일 밤 인사를 빼먹었던 일이나 아팠던 곳은 괜찮으냐는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순간까지, 수없는 기억의 단편을 돌이켜 보아야 어쩌지 못할 후회만 속절없이 남아 괴로울 일이고. 그저 태어나 당연하게도 사랑했듯이 때가 오자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한낮의 열정이 사그라지고.

그리고, 헤어짐도 왔을 뿐이라고.

수사국이 뒤집어졌다.

연구일지

1. 미제(謎濟)

로쏘라는 남자는 뼈에 스미게 현실적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모든 상태와 이치는 공식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런 남자에게 그녀는 신비를 말했다. 이미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 있지만 없는 것. 그게 바로 나야, 로쏘. 반듯한 이 세상에 바이러스와도 같은 그녀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손으로 껴안거나 입술을 댈 때면 로쏘는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감각’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놀라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얻은 몸, 실체가 없는 몸. 그런 몸의 그녀에게는 고통도 쾌락도 반 푼짜리였다.

있거나 없는 몸에 체류하는 감각들에 그녀는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그도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혔다. 그녀는 극도의 쾌락 혹은 극도의 고통만이 겨우 의미를 가지는 그런 몸을 가졌고 그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순순히 협조해 영상을 취했다.

레지멘트 부지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로쏘는 혼자 우산을 썼다. 그녀에게는 빗방울의 차가움이나 신체의 건강 따위는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음이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자욱 질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쏘는 옆에 함께 걷는 여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척하지만 자꾸만 흘끔흘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빗방울이 똑 똑 떨어져 흐르는 그 목덜미.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그녀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길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이 교차하고, 눈앞의 남자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로쏘는 마주하고, 그는 그녀의 기대대로 당황하는 대신 눈썹을 찌푸리고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문득 느낀다. 감각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 푼어치 몸에 지금 닿는 빗방울이 지나치게 춥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하게 연구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그들은 평범하게 함께하고 평범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반 푼짜리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아이를 좇는 어머니의 망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로쏘와 함께하고 예전에 어느 남자와 그랬듯이 연애하고 핀잔을 주고 함께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입을 맞추고 연구를 하다가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그는 머쓱하게 검은 턱시도를 입고 식을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를 하고 신랑의 얼굴이 붉어지면 너도 사랑을 할 줄 아냐고 모두가 그를 놀렸겠지.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그녀에게 진심이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녀도 신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쾌락은 진짜배기고 어쩌면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건강했을 수도 있고 건강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로쏘는 결코 마르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안다. 알기에 슬프다.

그리고 망상의 효력은 잠시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 그녀는 우산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실체를 드론 속으로 숨기고 투영된 몸이 드론 안으로 사라지면서 찰나의 생각도 죽었다. 그 남자가 희구하는 것이 원래 그런 반 푼어치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우산을 내리고 한숨을 쉬며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힌다.

 

 

2. 가설(假設)

로쏘에게 행운이나 불운 따위의 개념은 본디 큰 의미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는 우수하고 남은 상대적으로 지루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그저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받아들이기 따라 행운일수도 불운일수도 있었다. 타인과 궤를 달리하여 동떨어진 수재의 이야기는 이미 흔한 소재거리였기에 로쏘는 이에 관련하여 한껏 감정을 부풀리려는 시도는 진작 그만두었다.

다만 그는 그때그때 스스로 마음 가는 대로 연구하고 탐구했다. 굳이 만족이냐 불만족이냐 따지자면, 로쏘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다. 연구 소재를 직접 채취하여 탐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고, 본래는 금지된 자료에 대량 접촉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귀중한 연구거리도 있었다.

그러므로 탐구의 대상에는 가령, 이런 것들도 있었다; 이세계의 코어 생물은 체내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혹은, 임의의 생물체를 코어 생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코어화된 생물의 관심과 욕구는 죽은 순간의 상태로 고정된 것인가. 과연 동일한 관계성을 가진 존재가 새로 생긴다면, 피붙이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애착은 대상을 바꿀 것인가.

그러나 로쏘는 이 가설에 대한 입증 시도는 그만두었다. 어찌됐든 눈먼 애착의 대상이 아이에서 아이로 변하는 것뿐. 예상 가능한 결과에서 아무런 실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론이 자명한 실험은 시시하고 부질없었다. 못마땅했다. 삶에 모든 인간과 생물을 연구 대상으로 두어 무심했건만 정작 생물도 못 되는 것이 못마땅하고, 안쓰럽고, 끔찍스러워.

 

 

3. 실례(實例)

옛날 어느 구루(Guru)가, 세계를 폭파시켰다.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흥미를 가진 지가 이미 한참이었다. 지금 로쏘는 기어코 바로 그 구루의 앞에 있었다. 메르키오르를 만난 로쏘는 그가 궁금해 마지않던 독창적인 발상의 동기에 대해 들었다. 구구절절 케케묵은 옛 이야기들이었다.

“그 모든 성과가 한낱 여자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했다는 건가.”

언제나 표정이 미미하던 노인이 이 순간 얇은 입꼬리를 밀어 올린다. 기괴하게 늙은 얼굴 가득 주름이 진다. 명백하게 비웃음이다. 로쏘는 그만 비위가 확 상해버렸다.

 

 

4. 해(解)

욕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너무 말도 안 되게 커서 그는 구태여 감정의 크기를 쟀다. 그리움 한 줌, 열망 세 컵, 질투 일곱 톤.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수치들은 한없이 무한대에 수렴하고 무한의 값으로 공식을 도출했을 때 구해낸 해의 이름은 사랑. 이제 의미 없어진 고리타분한 측정치를 구깃구깃 손에 쥐고 그는 정량 없이 긴 한숨만 내쉰다.

아무리 사료를 뒤적거려도 사랑의 문제는 불가해라고만 쓰여 있었고 그녀는 불가해답게 생물도 아니 되는 것이 생물의 흉내를 냈다. 그의 곁에서 웃다가,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반쯤 뜨고,

“로쏘.”

“왜.”

“나는 답을 찾고 싶어. 진리를 구하고 싶어. 당신도 그렇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그래.”

여자는 망령처럼 소망을 읊조리고 남자는 망령을 닮아갔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신도 악마도 진리도 망집도 버러지도,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황혼녘 판데모니움

<step>

“춤을 춰요, 레드그레이브.”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선율에 맞춰 한참을 그림처럼 휘몰아치던 두 사람의 스텝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끝났다.

“언제나 완벽해. 훌륭해, 레드그레이브. 그렇지만 역시 난 이 쪽이 좋네.”

말을 하곤 그라이바흐는 장난스럽게 레드그레이브의 뺨을 잡았다. 레드그레이브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거?”

“그거.”

이어진 것은 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스텝이었다. 그것이라고 지칭은 했지만 그저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 장난처럼 연습하곤 하던 자기들만의 몸동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인지 곧 발이 엉키고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의 품 위로 쓰러졌다.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빙결>

레드그레이브는 겨울이면 기상조절장치를 한 달에 다섯 번쯤 고의로 조작했다.

눈이란 것은 사실 효율적인 기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흩날리는 눈발 속에,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라고 고하는 순간이,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속으로 온 세상이 묻히고 절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녀의 진심 담긴 허언이 세계로부터 차단되는 그 순간이.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 보지만 곧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꺼버리는 그 시절이.

레드그레이브는 오랜만에 눈발을 낚는다. 들고 온 사진은 판데모니움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되었고, 지상은 그의 의지대로 오토마타로 다시 차고,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손끝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하얗게 웃었다.

이거 봐,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