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일지

1. 미제(謎濟)

로쏘라는 남자는 뼈에 스미게 현실적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모든 상태와 이치는 공식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런 남자에게 그녀는 신비를 말했다. 이미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 있지만 없는 것. 그게 바로 나야, 로쏘. 반듯한 이 세상에 바이러스와도 같은 그녀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손으로 껴안거나 입술을 댈 때면 로쏘는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감각’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놀라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얻은 몸, 실체가 없는 몸. 그런 몸의 그녀에게는 고통도 쾌락도 반 푼짜리였다.

있거나 없는 몸에 체류하는 감각들에 그녀는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그도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혔다. 그녀는 극도의 쾌락 혹은 극도의 고통만이 겨우 의미를 가지는 그런 몸을 가졌고 그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순순히 협조해 영상을 취했다.

레지멘트 부지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로쏘는 혼자 우산을 썼다. 그녀에게는 빗방울의 차가움이나 신체의 건강 따위는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음이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자욱 질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쏘는 옆에 함께 걷는 여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척하지만 자꾸만 흘끔흘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빗방울이 똑 똑 떨어져 흐르는 그 목덜미.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그녀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길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이 교차하고, 눈앞의 남자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로쏘는 마주하고, 그는 그녀의 기대대로 당황하는 대신 눈썹을 찌푸리고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문득 느낀다. 감각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 푼어치 몸에 지금 닿는 빗방울이 지나치게 춥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하게 연구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그들은 평범하게 함께하고 평범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반 푼짜리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아이를 좇는 어머니의 망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로쏘와 함께하고 예전에 어느 남자와 그랬듯이 연애하고 핀잔을 주고 함께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입을 맞추고 연구를 하다가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그는 머쓱하게 검은 턱시도를 입고 식을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를 하고 신랑의 얼굴이 붉어지면 너도 사랑을 할 줄 아냐고 모두가 그를 놀렸겠지.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그녀에게 진심이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녀도 신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쾌락은 진짜배기고 어쩌면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건강했을 수도 있고 건강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로쏘는 결코 마르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안다. 알기에 슬프다.

그리고 망상의 효력은 잠시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 그녀는 우산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실체를 드론 속으로 숨기고 투영된 몸이 드론 안으로 사라지면서 찰나의 생각도 죽었다. 그 남자가 희구하는 것이 원래 그런 반 푼어치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우산을 내리고 한숨을 쉬며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힌다.

 

 

2. 가설(假設)

로쏘에게 행운이나 불운 따위의 개념은 본디 큰 의미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는 우수하고 남은 상대적으로 지루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그저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받아들이기 따라 행운일수도 불운일수도 있었다. 타인과 궤를 달리하여 동떨어진 수재의 이야기는 이미 흔한 소재거리였기에 로쏘는 이에 관련하여 한껏 감정을 부풀리려는 시도는 진작 그만두었다.

다만 그는 그때그때 스스로 마음 가는 대로 연구하고 탐구했다. 굳이 만족이냐 불만족이냐 따지자면, 로쏘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다. 연구 소재를 직접 채취하여 탐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고, 본래는 금지된 자료에 대량 접촉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귀중한 연구거리도 있었다.

그러므로 탐구의 대상에는 가령, 이런 것들도 있었다; 이세계의 코어 생물은 체내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혹은, 임의의 생물체를 코어 생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코어화된 생물의 관심과 욕구는 죽은 순간의 상태로 고정된 것인가. 과연 동일한 관계성을 가진 존재가 새로 생긴다면, 피붙이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애착은 대상을 바꿀 것인가.

그러나 로쏘는 이 가설에 대한 입증 시도는 그만두었다. 어찌됐든 눈먼 애착의 대상이 아이에서 아이로 변하는 것뿐. 예상 가능한 결과에서 아무런 실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론이 자명한 실험은 시시하고 부질없었다. 못마땅했다. 삶에 모든 인간과 생물을 연구 대상으로 두어 무심했건만 정작 생물도 못 되는 것이 못마땅하고, 안쓰럽고, 끔찍스러워.

 

 

3. 실례(實例)

옛날 어느 구루(Guru)가, 세계를 폭파시켰다.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흥미를 가진 지가 이미 한참이었다. 지금 로쏘는 기어코 바로 그 구루의 앞에 있었다. 메르키오르를 만난 로쏘는 그가 궁금해 마지않던 독창적인 발상의 동기에 대해 들었다. 구구절절 케케묵은 옛 이야기들이었다.

“그 모든 성과가 한낱 여자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했다는 건가.”

언제나 표정이 미미하던 노인이 이 순간 얇은 입꼬리를 밀어 올린다. 기괴하게 늙은 얼굴 가득 주름이 진다. 명백하게 비웃음이다. 로쏘는 그만 비위가 확 상해버렸다.

 

 

4. 해(解)

욕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너무 말도 안 되게 커서 그는 구태여 감정의 크기를 쟀다. 그리움 한 줌, 열망 세 컵, 질투 일곱 톤.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수치들은 한없이 무한대에 수렴하고 무한의 값으로 공식을 도출했을 때 구해낸 해의 이름은 사랑. 이제 의미 없어진 고리타분한 측정치를 구깃구깃 손에 쥐고 그는 정량 없이 긴 한숨만 내쉰다.

아무리 사료를 뒤적거려도 사랑의 문제는 불가해라고만 쓰여 있었고 그녀는 불가해답게 생물도 아니 되는 것이 생물의 흉내를 냈다. 그의 곁에서 웃다가,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반쯤 뜨고,

“로쏘.”

“왜.”

“나는 답을 찾고 싶어. 진리를 구하고 싶어. 당신도 그렇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그래.”

여자는 망령처럼 소망을 읊조리고 남자는 망령을 닮아갔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신도 악마도 진리도 망집도 버러지도,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