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 판데모니움

<step>

“춤을 춰요, 레드그레이브.”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선율에 맞춰 한참을 그림처럼 휘몰아치던 두 사람의 스텝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끝났다.

“언제나 완벽해. 훌륭해, 레드그레이브. 그렇지만 역시 난 이 쪽이 좋네.”

말을 하곤 그라이바흐는 장난스럽게 레드그레이브의 뺨을 잡았다. 레드그레이브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거?”

“그거.”

이어진 것은 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스텝이었다. 그것이라고 지칭은 했지만 그저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 장난처럼 연습하곤 하던 자기들만의 몸동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인지 곧 발이 엉키고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의 품 위로 쓰러졌다.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빙결>

레드그레이브는 겨울이면 기상조절장치를 한 달에 다섯 번쯤 고의로 조작했다.

눈이란 것은 사실 효율적인 기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흩날리는 눈발 속에,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라고 고하는 순간이,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속으로 온 세상이 묻히고 절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녀의 진심 담긴 허언이 세계로부터 차단되는 그 순간이.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 보지만 곧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꺼버리는 그 시절이.

레드그레이브는 오랜만에 눈발을 낚는다. 들고 온 사진은 판데모니움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되었고, 지상은 그의 의지대로 오토마타로 다시 차고,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손끝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하얗게 웃었다.

이거 봐,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