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night Blues

1. 십년 전, 저무는 저녁

밤이 되면 오는 것들이 있다. 어둑어둑 검게 지는 땅거미, 구름을 비추는 달, 멀리 야산에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와,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몰려다니는 오토바이, 반짝이는 별무리, 풀잎 위에 맺히는 이슬, 그리고 형. 형은 늘 밤에 왔다.

별들이 하나둘씩 눈을 뜨는 밤이면 어린 리츠도 반짝 눈이 뜨였다. 오늘 밤엔 형이 올까? 어둑어둑한 창가에 기대어 숨을 죽이고 문틈에 가만 귀를 기울이면 온갖 소리가 귓전에 부딪힌다.

건넛집 여자아이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좀 더 떨어진 곳에서 나이프가 사기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수레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나, 산기슭에서 새앙쥐가 짚단을 파먹는 소리와 귀를 긁는 모든 자잘한 소리들을 지나서 다시 방 안에는 제 작은 숨소리뿐. 기다림에 지쳐 리츠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밤에도 잠들었으면 좋았을걸.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시체처럼 방바닥에 누워, 한참을 눈만 깜박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개들끼리 서로 대답하듯 울음소리는 점점 크게 뭉쳐 화음이 되고, 그에 섞여 야산의 늑대 짖는 소리까지 울린다. 그때가 되면 리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홀린 듯 문을 열고 집을 나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닥타닥.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곧 아이는 날 듯이 밤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도 발걸음 못지않게 빠르게 뛰었다.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저녁, 저 멀리 우글거리는 개들의 그림자가 보이고, 그 가운데 검푸른 옷자락으로 몸을 감싼 밤의 왕. 형은 늘 밤에 개들과 함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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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향기 나는 당신의 미소에

“나는 오래는 못 살아. 잘해야 스무 살?”

그렇게 말하자 늘 그림같이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반짝이는 금발에 그늘이 지고 상냥한 눈웃음도 멎었다. 늘 휘장처럼 드리우고 있던 해사한 웃음을 잃은 로네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파르라니 생기가 없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회복할 시간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로네 펠트너. 네가 차기 리더감인 것도, 그래서 학교의 모든 아이들과 잘 지내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나는 거름회수팀이 될 생각도 없고, 설령 되더라도 열심히 일할 생각도 없어. 이래서야 금방 잘리고 끝이겠지.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찾으러 다닐 필요 없다고.”

쏘아붙이고 뒤돌아 떠나는 찰나, 무언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겨 딜마는 그만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찔,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가 곧 묘하게 폭신한 것 위로 떨어지는 감각. 딜마를 품에 받아 안은 로네가 얼굴을 닿을 듯 내려다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역시, 딜마. 내 파트너가 되어 줄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는 회수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뭣보다, 머지않아 죽을 거라고. 그런데 파트너라니. 동정인가? 오만인가?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수 없으니 화가 솟구치는 것이 먼저였다. 딜마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해 못 했어? 나는 시한부야. 스물도 못 돼서 죽을 거야. 지위든 권력이든 가지려 애를 써도 아무 의미 없다고!”

“하지만 알잖아, 딜마? 여기 있는 누구도 네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거. 늘 그런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있잖아.”

차마 부인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로네는 샐쭉 웃었다.

“그러니까 함께 일하자. 어차피 누구라도 언젠가는 죽을 거, 함께 최고의 마지막을 맞으면 되잖아? 있지, 딜마……. 나도 남한테 쉽게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거든. 네가 비밀을 알려줬으니까 나도 하나를 알려줄게. 어때, 괜찮지?”

아는 누군가가 시한부라는 사실은 그저 알기 부담스러울 뿐이다. 결코 ‘비밀을 알려주었다’고 표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네는 그 단어를 또릿하게 발음하며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닥거렸다. 귀에 소곤소곤 닿는 숨이 간지러워 딜마는 손끝이며 발끝을 움찔 움츠렸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있잖아, 딜마. 나는, 우리 집은 말이야, 사실은…….

에이케이

역시 가챠5성 리퀘받은 에이케이인데 케이토>에이치나 에이치+케이토같은 느낌이 되었네요. 싸움제에서 얘기하는 어린시절이 너무 귀여웠어요 ㅠㅠ!!!

 

***

 

1. 행사가 열린 지 사흘째, 호된 매질을 당했다.

불공을 드리는 행렬을 지켜보며 향로가 가득 찰 때마다 새것으로 갈고, 향이 떨어질 때마다 채워 넣는 것이 어린 케이토의 일이었다. 가장 쉬운 일이니까 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 케이토는 바닥까지 길게 떨어지는 승복을 입고 오도카니 한쪽에 앉았다. 햇볕 속에서 즐거운 얼굴로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방문객들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고즈넉이 그늘진 한구석의 어둠 속에, 사찰의 일부처럼 무릎을 꿇고 가만 앉아, 연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쪽을 신경쓰지 않도록. 그렇게 서로 신경쓰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불청객이 있었다. 야산에서 떠돌아다니며 가끔 절밥을 얻어먹는 고양이 녀석이 케이토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케이토가 앉은 그늘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야옹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과 앉아 있던 케이토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귀엽다며 깔깔 웃는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수군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경건하던 사찰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서, 케이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양이를 안고 뛰듯이 절간을 나섰다. 안아 든 채로 갑작스레 뛰어가자 고양이는 애옹애옹 울면서 발버둥을 쳤고 케이토의 콧등이며 팔에 발갛게 할퀸 자국이 생겼다. 부끄러움이 앞서 상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참을 뛰다 보니 문득 콧잔등이 시큰거려 케이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양이가 할퀸 상처에 서늘한 것이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개울에, 돌다리 위에 나풀나풀 눈발이 내려앉아 이미 반쯤 하얀 세상이 점점 더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케이토는 넋을 잃은 듯 새하얗게 빛나는 설국을 걸었다. 삼베로 만든 승복 자락이 눈 위에 질질 끌렸다. 사흘 만에 보는 세상에 눈이 부셔 케이토는 야산 꼭대기까지라도 올라가고 싶었다. 아니면 이 산을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나 눈이 내리면 산도 바다도, 개울도 도시도 세상 끝까지라도 새하얄 텐데.

눈에 젖어 무거워진 승복 자락을 끌고 돌아온 이미 절간은 난리였다. 향로가 넘쳐서 바닥에 그을린 자국이 생겼고 향이 동나서 불공을 드리려던 사람들이 길게 줄 선 채로 웅성거리다가 돌아갔다. 부모님께 불려간 후 종아리에 고양이가 할퀸 자국보다 훨씬 굵고 새빨간 자국이 여러 줄 생겼다. 매를 맞으며 이를 악물었지만 아픔보다도 아쉬움이 더 컸다. 아직 그 눈부신 설국을 끝까지 보지 못했는데.

 

 

2. 병원의 약물 냄새는 향 냄새와 비슷한 점이 있다. 코를 자르르 찌르고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병 냄새가 나는 침묵 속에 사람들은 애써 화사한 꽃을 들고 오고 부자연스럽게 소란을 떨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라앉아 있는 공간이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이런 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겠지. 그래서 에이치 녀석도 나가버린 걸까.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케이토를 알아본 사용인이 반갑게 부산을 떨었다.

“왔구나, 케이토. 어서 에이치 도련님 좀 찾아주련. 네가 오니 어쩐지 안심이구나. 얘기를 듣고 바로 널 보내주다니 그쪽 어르신도 친절하시지.”

행사에서 사고를 쳐서 반쯤 쫓겨난 거지만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케이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호화로울 정도로 넓은 병실은 주인 없이 빈 채, 뽑아 놓은 링거 선 몇 개만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 너는 이렇게 많은 사용인의 눈을 어떻게 피하고 사라진 걸까. 밖에 나갈 만한 곳이라도 있나 보려고 창가에 기대 선 케이토는 곧 선득한 느낌에 놀라 뒷걸음질쳤다. 대리석 창틀이 창 틈새로 조금씩 날아온 눈에 식어 서느렜다.

아직까지도 눈발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병원은 온갖 방 구석구석을 뒤지는 텐쇼인 가의 사용인들로 소란스러웠다. 설마 병약한 에이치가 이런 날씨에 밖에 나가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꿈이 크니까.’

정확히 말하면, 꿈만 크지. 매일같이 골골대느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그렇게 생각하며 꼭대기 3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케이토는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조그맣게 난 철문의 손잡이를 돌리자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주어 어깨로 문을 밀어보았다. 드르륵, 돌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에이치이이이이!”

그리고 갑자기 열린 문 쪽으로 바람이 불어 하얀 눈발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이쪽을 돌아보는 에이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녀석이 눈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것이 사람이라기보다는 눈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케이토.”

난간에 기대선 채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 조그맣다. 어서 달려가 외투를 걸쳐 주고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곧바로 떼었다. 시체라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체 뭐 하는 거냐, 네 녀석은! 이런 날씨에 바깥이라니 내일 제단에서 만나고 싶은 거지!”

“어떻게 찾아왔어?”

곧 끊길 듯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에이치는 작게 웃었다.

“아. 너도 설경이 보고 싶었구나. 어때, 케이토?”

에이치가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 난간 아래로, 까마득하게 설국이었다.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한쪽 멀리 눈 덮인 산에서부터, 저 멀리 얼어붙은 강물이 보이고, 길마다 건물마다 하얗게 쌓인 눈이 색색의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점점이 희게 빛나는 세상이 아득해 숨이 멎을 듯했다.

“정말 하얗다. 그렇지?”

그리고 눈을 맞아 반짝거리는 에이치의 얼굴은 설탕을 입힌 과자 같았다.

“도시 밖은 더 근사하겠지. 방에 가서 그려 줘, 케이토.”

“멋대로 나와 놓고 뭘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려고 하는 거야, 네 녀석은.”

“그야,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병실 안에만 있기 싫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왔으니까 괜찮아. 여기서 보는 것보다 네가 그려주는 게 더 근사해.”

이렇게 웃는 모습만 보면 말썽이라고는 부릴 줄 모르는 천사 같지. 금방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천사. 고운 설탕 과자는 곧 깨질 것처럼 보인다. 케이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3. 그날 밤은 에이치의 병실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결국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는 에이치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케이토. 여기 그려준 것들 직접 본 거야? 아니. 사실 나도 못 봤어. 그냥 상상이지. 그러면,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병원 옥상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누구라도 올려다볼 그런 곳으로……. 그때는 훨씬 근사한 경치를 보여 줄게……. 에이치는 계속 열에 들떠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이미 잠이 든 채였다. 이렇게 머리를 맞댄 채 잠이 들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될까. 얼굴에 닿는 숨이 기침처럼 잘았다. 퐁, 퐁, 퐁, 가는 날숨을 느끼며 케이토는 눈을 감았다. 꿈결에 퐁, 퐁, 퐁, 숨이 닿을 때마다 에이치가 하늘을 날다가, 설탕 과자처럼 웃다가, 창백한 시체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다시 하늘을 날다가 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저 높은 곳으로 갈 거야. 아무도 닿지 못할 곳으로, 누구라도 올려다볼 그런 곳으로 함께…….

에이안즈

단챠5성기념 리퀘 중 에이안즈입니다!
휘두르는 에이치와 마주 서는 안즈의 배틀노말이 좋은 느낌입니다.

***

안녕, 안즈쨩,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안색이 썩 좋지 않구나. 역시 너는 지나치게 무리하는 것 같아. 최근에 준비할 드림패스라도 있었던가? 미안해, 학생회장인데도 아직 비공식 드림패스는 전부 파악하지 못했거든. 아니면 역시 그 표정은 나 때문인 걸까. 나는 상대하기 거북한가? 그렇다면 조금 서운하구나. 나는 안즈쨩과 좀 더 친해지길 바라고 있거든. 어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차라도 한잔 하겠어? 때마침 학생회실도 비어 있단다.

“괜찮습니다.”

안즈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거절했다. 학생회장쯤 되는 사람을 대하기에는 너무나 미련 없는 태도라 나무라는 말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안즈쨩은 꼭 겁 먹은 토끼나 경계하는 사슴 같네. 긴장 좀 풀어,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사자가 아니라 텐쇼인 에이치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사자보다 무서운걸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저도 모르게 입을 내밀고 볼을 푸우 부풀렸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치는 깃털처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게 싫은 거구나.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의 텐쇼인 에이치가 조금은 너에게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했어. 분명 너는 프로듀서고, 나는 네게 내 무대를 보였으니까. 하지만 나답지 않게 속단했던 모양이야. 역시 혁명가 소녀에게 fine의 무대는 지나치게 지루하고 고답적이었던 거지.”

“아니에요.”

이번 대답은 아까보다도 한층 더 빨랐다. 격렬한 부정이었다. 곧이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속도도 대답하는 속도 못지않았다. 과연 명석한 소녀라, 안즈는 이미 들킨 표정을 숨기려 애를 쓰는 대신 빠르게 상대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선배 때문이잖아요. 왜냐하면 선배가, 당신이, 왜…….”

끝까지 똑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말끝을 에이치가 낚아챘다.

“왜 내가 계속 너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물끄러미 응시하는 파르란 눈빛이 미동조차 없이 서늘했다. 얼마 전 공연에서 저를 바라보던 시선과 꼭 같아서 안즈는 꿀꺽 침을 삼켰다.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는 관객은 본래 공연자의 시선까지는 캐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관객 본인이 공연가의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에이치가 간주에서 목소리 끝을 늘어뜨리며 응시하는 시선, 몸 상태를 고려해 짤막하게 넣은 안무의 끝에 향하는 고갯짓의 방향, 무대를 오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며 위치를 확인하는 눈짓까지 전부가 관람석의 안즈를 내내 곤혹스럽게 했다.

“그걸 알았다면 왜냐고 묻지 않았어요.”

에이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턱을 괸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나도 그 애들 이상으로 너에게 인정받고 싶었단다, 안즈쨩.”

긴 금발머리가 눈앞에 매끄러져 안즈는 눈을 세게 깜박였다.

“어찌됐든간에 너는 이 학원의 유일한 프로듀서니까 말이야.”

“그러면 거리를 지켜 주세요. 프로듀서에게 예의를 지켜 주세요.”

안즈는 어느새 바짝 다가온 에이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부쩍 귀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발이 멎고 말았다.

“하지만 안즈쨩. 그 애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잖아.”

숨이 귀에 닿는 것 같다. 바로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 닿을 것만 같았다. 아니, 과대망상이야. 안즈는 침착하게, 천천히 뒤돌아 보았다.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하이얀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길고도 짤막한 침묵의 끝에 에이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나는 질투하고 있는 거야. 구애하고 있는 거지.”

결벽적으로 창백해 천사 같은 남자의 열렬한 어조와 말의 내용에 그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거절한다. 거절해야 한다. 그것만을 겨우 생각해내고 입을 여는 찰나 에이치가 검지를 들어 안즈의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이 학원의 한 명의 아이돌로서, 유일한 프로듀서에게 말이야.”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위세가 꺾였다고는 하나 상대는 이 유메노사키 학원에 군림하는 절대군주다. 여기서 흐트러지고 얕보여서야 트릭스타의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 라고 생각하며 안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곧이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 놀랄 만큼 형편없었다. 물기가 어려 완전히 토라진 어린애 같았다.

“나를 놀리고 있는 거죠?”

에이치는 잠시 대답 없이 안즈의 얼굴을 수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란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순수한 환희나 승리감 같은 것이 눈빛에 그득해 아이처럼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아이처럼 잔혹해 보이기도 했다.

“드디어 내 앞에서도 이런 표정을 하는구나.”

곧 에이치는 눈을 반 접어 실없이 웃었다.

“말했잖니. 긴장 좀 풀라고. 나는 지금 정말로 기뻐, 안즈쨩. 이제 토끼처럼 경계하지 않는 거지?”

좀 전까지의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텐쇼인 에이치는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아이처럼 하이얗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안즈도 그만 그대로 맥이 풀리고, 웃음이 날 듯 가슴께가 두근대어,

아. 그러니까 그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시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