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슈

사투리 검수해주신 캣님 감사합니당! 갑자기 얀데레 뽕이 차서 그만…
어둡고 칙칙한 내용. 과거날조 가정폭력 쩌는 캐붕 얀데레 주의, 중간에 낀 에이치 주의

 

 

* * *

 

 

1. 눈치를 보며 올려다보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눈초리가 기분나쁘다며 손찌검을 했다. 항상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은 그림자로 어두웠다. 아버지는 임신한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할 만큼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으나 인내심이 많지는 않았다. 거나하게 취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는 미카를 피도 안 섞인 녀석이라고 불렀다. 아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맞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머니는 집안 가득 드리운 그늘 속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숨겼다.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를 드리운 어머니는, 미카가 서툰 솜씨로 일을 돕거나 꽃을 꺾어오면 얼굴을 들고 환하게도 웃었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내는 어머니는 퍽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반짝거리는 것, 알록달록한 것, 화려한 것을 찾아다녔다.

어느 겨울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트리를 만들었다. 나무의 주변에 달콤한 사탕과 빛나는 별을 달았다. 색색의 전구가 반짝거렸다. 둘이 함께 학교에서 배운 캐롤을 흥얼거리는 동안, 아버지가 들어왔다. 이런 거나 하고 있으니 집안이 이 꼴이지. 작은 트리를 후려치려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처음으로 막아섰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의 손목을 잡은 미카는, 더 이상 아버지를 마냥 올려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망함과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아버지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겨울 외투 주머니에 비상금 몇 장을 챙겨서 후다닥 집을 뛰쳐나왔다. 서리서리 내리는 눈발이 코와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걸을수록 뺨이 빨갛게 곱고 귀가 떨어질 듯 얼어붙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이나 거리를 서성거리다 번화가에서 가장 큰 매장에 들어갔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연말의 베이커리에서 구석의 빈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 뺨을 녹이며 버터와 밀가루 냄새를 맡다가, 배에서 커다랗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수치심을 따질 상황이 아닌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구 들은 사람은 없겠지. 달아오른 뺨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한쪽 안구를 잘못 끼운 건가?”

“누, 누굽니꺼?!”

“나는 이츠키 슈. 유메노사키 학원의 제왕이다.”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2. “한 시간 지났다. 씻는 건 자유지만, 원래 이렇게 동작이 굼뜬 건가?”

“아니, 내는……, 거품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신기해서 말입니더.”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핑계였다. 호텔 욕조에서 몽실몽실 장미향이 나는 거품에 감싸인 채 미카는 멍하니 생각했다. 일단 따라오기는 했지만 대체 뭐하는 사람인 걸까? 역시 그런 취향인 걸까? 몸을 요구하려나? 그렇다면 오히려 목적이 확실하니 다행이다. 이상한 빌미로 협박하지 않는다면 하루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운을 띄웠다.

“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래 받아도 되나 모르겠습니더.”

“흥. 혼자서 쓰기는 넓은 방인데, 네 녀석이 내내 거기 앉아있는 꼴도 못 봐주겠고 말이다. 기껏해야 중학생인가? 집을 나왔지? 억지로 사정을 묻지는 않겠어. 내일은 제대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집은, 싫은데.”

“흠.”

무심코 내뱉은 말에 상대가 잔소리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별 말 없이 수긍한 듯했다. 걱정해주는 소리에 뾰쪽한 소리로 받아친 꼴이라 괜히 무안해져, 다른 말을 붙여보았다.

“그쪽은, 이쪽 사람 아니지예? 뭐하러 여기까지 왔심꺼? 관광 왔답니꺼?”

“말은 편하게 해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날 것 같은데 거북하군. 나도 고등학교 1학년이다.”

“엑……. 그런데 혼자 여기까지 왔습니꺼? ……와, 왔나?”

“전시회를 보러 왔다.”

“그것때매 혼자서 왔다고?”

“그래. 가출하는 불량한 녀석이라도 이 입장권에 쓰인 글은 읽을 수 있겠지. 고딕 그로테스크 미술전, 보이나? 뭐 이렇게 얘기해도 너 같은 범인凡人의 미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야……, 이거 가고일이고마. 이런 게 잔뜩 있다는긴가? 볼만하겠구마.”

“미술에 대해 아나?”

“그냥, 내 무서운 걸 쪼매 좋아해서……..”

탐색하듯이 날카로운 눈빛에 미카는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해서 대답했다. 그리고 곧 슈가 자신의 가운 아래 목덜미와 가슴을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카는 잽싸게 옷깃을 끌어올려 멍자국이 남은 목을 가렸다. 하지만 반사적인 반응도 소용 없이 슈가 검지를 멍자국 위에 올리고 목을 따라 천천히 훑었다. 손길을 따라 머리끝까지 소름이 올랐다. 얼굴을 닿을 듯 가까이 대고 빤히 바라보던 슈가 한손으로 가운을 끌어내렸다. 깡마른 상체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여, 역시 그거였나? 아까 걱정하는 척 하던 건 위장이었나? 미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응이 빠르군. 못 먹어도 자세와 균형은 괜찮고. 몸의 조형도 좋고, 얼굴도 괜찮은데……, 그렇군. 소재는 상당한데, 자국과 흠집이 많아. 취급이 험하군.”

“……?”

“너. Valkyrie에 들어와라.”

“??????”

 

 

 

 

3. 자기 전에 단 것을 먹는 것이 습관이었다. 사탕을 꺼내려고 바구니를 뒤적거리던 미카는, 붉은 색 사탕을 찾지 못해 물건을 잔뜩 헤집다가 바닥에 깔린 표를 발견했다. 어쩐지 한숨이 났다. 그 사람에게 받았던 Valkyrie 공연의 특등석 티켓. 그렇대도 공연 하나 보려고 그쪽까지 가기는 역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알아보니 못해도 만 엔은 하는 물건이었다. 암표로 팔면 값을 뻥튀기해서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미카는 이도저도 못하고 바구니를 계속 뒤적거리다가 작은 곰인형을 꺼냈다. 호텔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구멍난 테디베어였다. 어디서 더러운 걸 주워오냐고 호통을 치던 슈는, 버려진 곰이 꼭 자신 같다는 미카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 앉아 바늘귀에 실을 꿰기 시작했다.

미카는 잠들지 못하고 곰인형의 배 위에 실로 막은 까끌한 땜빵 부분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4. 스테이지는 바닥이 꽤 높았다. 관계자석이니만큼 무대가 가까이 보였지만 대신 관람하려면 꽤 고개를 들어야 해서 목이 아팠다. 수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려 긴장되었다. 역시, 이런 곳은 나랑 안 어울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무대 정중앙에 핀 조명이 꽂히며 그가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들며 양손을 지휘하듯 올리자 웅성거리던 관중이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두컴컴한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광선 속에 무대 구석구석 장식한 황동의 마감재와 금빛의 추녀가 빛난다. 서로 짜맞춘 백여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끼릭거린다. 톱니바퀴의 움직임에 맞추어 바닥에서 금발의 아름다운 인형들이 춤을 춘다.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와, 어슴푸레 빛나는 조명과,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주 소리가 하나가 된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눈 앞에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망설임도 불안감도 없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 가느다란 손끝으로 세계를 지휘한다. 황홀감으로 눈이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곧이어 음악에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얹혔다. 허리를 곧게 펴고 만족스러운 미소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5. 기대에 미치지 못해 늘 타박을 들을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츠키 슈는 마치 미카의 아버지라도 된 마냥 행동했다. 잔소리를 하고, 행동거지를 타박하고, 설교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때리지 않는다. 저녁마다 몸의 치수를 재며 근력이 부족하다고 야단치고는 아침마다 영양표를 따져가며 음식을 하고, 심한 말을 한 후에도 끝까지 연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는 꼭 아버지 같지만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니 심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새 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으면 지켜보는 스승님의 눈끝이 가늘어지고, 긴장으로 아랫배가 조여오지만, 마침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렇게나 까다로운 남자의 합격선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츠키 슈는 천재였다. 제왕이나 신이라고 하는 말이 이 학원에서는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에 따라 연습한 자신이 완성하는 무대에서, Valkyrie는 최강이다. 학원의 학생들은 Valkyrie의 멤버인 미카를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생전 처음 겪는 그런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높은 스테이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늘, 낮은 곳에서 상대를 올려다 보았으니까.

가끔 밤에는 집 앞을 걸으며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멀리서 지내면서 괜찮아? 같이 사는 사람들이 해코지하진 않고? 응, 괜찮다. 엄마. 내는 요즘 최고로 행복하다. 엄마야말로 잘 있나. 아빠가 손찌검 안 하고? 돈 보낼 테니께 괜히 아껴두지 말고, 엄마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슈가 홱 돌아보며 쏘아보았다.

“뭘 하고 이제야 오는 거냐. 밤바람이 찬데 그런 차림으로, 감기라도 걸려서 나의 완벽한 무대를 망칠 셈인가? 너는 Valkyrie의 귀중한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인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미안타, 스승님. 내 머리도 나쁘고 잘 하는 거 하나 없어서, 그래도 그만큼 뭐라도 더 열심히 하고 싶은기다. 뭐하노? 의상 만드나? 바느질 도와줄까?”

“윽, 들어오지 마라. 가까이 오지도 마라! 누가 작업중인 작품을 함부로 만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몸에 함부로 손대는 것도 싫다! 아무리 실패작이라도 좀 더 분별을 가져라, 카게히라!”

“헤헤, 미안타. 내 또 이렇다니께. 그래도 내 Valkyrie를 윽수로 좋아하니께 내일도 열심히 할께?”

“웃을 생각이 드나? 나는 지금 너를 야단친 거다. 이 정도 말로는 안 되나? 머리에 뇌가 안 들어있는 건가? 내일 무대는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들어가서 데워놓은 차를 마셔라.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이상한 녀석이군.”

“그러게. 이상하네.”

정말 이상하지. 나는 원래 쓰레기장에 사는 재투성이 까마귀였는데. 지금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된 것만 같아. 레몬 재운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웃음이 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6. 꿈은 깨어나라고 있는 것이다.

 

 

 

7. 낯선 사람이 집안에 있었다. 당당한 자세도 없이, 꺾이지 않는 눈빛도 긍지도 없이, 하루종일 인형과 함께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당혹스러웠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스승님, 스승님이다. 내가 언제고 좋아해 마지않았던 이츠키 슈다. 아버지, 하늘, 빛. 스승님은 언제나 완벽하다. 지금은 단지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 언제고 Valkyrie는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다.

 

 

 

8.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무대 자금이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스승님에게 크로와상을 사가고, 더는 받아주지 않는 예전 무대를 알아보다가 울컥 눈물이 났다.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힘들 리가 없다. 그렇다고 스승님이 잘못한 건 아니다. 스승님이 잘못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fine, 그때부터 리더였던 그 학생회장의 소행이다. 그와 대화한 이후로 스승님이 이상해졌다. 미카는 학생회실에 달려가 혼자 있던 텐쇼인 에이치의 옷깃을 잡았다. 학생회장이 정신없이 기침하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콜록, 콜록……. 이런 건 징계 사유야, 카게히라 군.”

“……무례하게 군 것은, 미안합니더. 하지만 대체 스승님한테 뭐라고 한 겁니꺼? 어떻게 했길래 그 고고하던 스승님이 저렇게 됐슴니꺼? 나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더! 뭘 어떻게 한 건지 알려라도 주이소!”

하지만 에이치는 되려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 이야기는 들었어. 응, 내가 이츠키 군을 도발하기는 했어. 하지만 나도 이츠키 군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신이 아니니까. 말 몇 마디에 그렇게 무너지다니, 무언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 이츠키 군에게나, Valkyrie 그 자체에.”

“이제는 Valkyrie를 음해하는 깁니꺼?”

“글쎄, 외부인인 나보다는 아무래도 네가 더 잘 알겠지……. 안 그래, 카게히라 군?”

“그런 소리, 내는 듣지 않겠습니더. 사람을 결딴내 놓고, 정도가 지나칩니더.”

“그렇지만 역시, 카게히라 군에게는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학생회장은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는다.

 

 

 

9. 허탈하게 돌아온 집에서는 슈가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당연하게 마드모아젤이 놓여 있다. 한때는 나즈나와 마드모아젤의 반짝이는 금발을 동경했었다.

‘무언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 ‘

알고 있었다. 늘 곁에 있으면서, 그렇게 온 신경을 쏟아 바라보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독선적인 리더와, 그가 사랑한 죽은 여자와, 그 여자를 투영해 바라본 멤버와, 지나치게 편집증적인 노력과, 과로와, 스트레스와, 폭언과, 마스터라는 호칭까지. 무엇 하나 금방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도 지금도, 안다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미카는 허리를 굽혀,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슈의 손을 뒤에서 잡았다. 슈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어딜 갔었나, 카게히라.”

“미안타, 내가 너무 늦었제. 스승님, 내 밖에서 붕어빵이랑 크로와상도 사왔으니께. 쫌만 묵자.”

“이제는 너까지 나를 배신할 셈인가?”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의심하지 마라. 내가 스승님을 배신할 턱이 있나.”

“그래. 그래야지, 카게히라.”

미카는 슈의 곁에 바싹 붙었다. 웅크린 슈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대로 멈추었다. 이제 슈는 미카가 가까이 와도 야단치지 않는다.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가냘프게 하얀 얼굴이 오롯이 이쪽을 바라본다. 곱슬거리는 앞머리로 덮인 곧은 이마 아래, 말간 보라색 눈이 어서 다가와 도와달라는 기색을 띄고 눈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무대를 준비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흘끗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이, 이제는 미카만을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미카는 손을 잡고 슈를 끌어올렸다. 이끌려 올라오는 손은, 한때 높다란 무대 가운데서 거대한 세상을 지휘하던 손목은 가까이에서 볼수록 하얗고 가늘다.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한다고 손찌검이라도 한다면, 바로 한손으로 쥘 수 있을 것 같다. 숨이 가까이 닿는다. 인형처럼 창백한 뺨이 바로 곁에 있었다. 기묘한 충족감이 죄악감처럼 아랫배에 스민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보니까

‘카게히라 군에게는,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아?’

목소리가 최면처럼 머릿속을 울린다. 미카는 슈의 마른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서, 머리에서 열이 올랐다. 꿀꺽,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렸다.

“스승님. 내는…….”

“뭐냐, 카게히라.”

“미안하다. 내가, 내가 진짜 미안하다…….”

어쩌질 못하고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미카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꺽꺽 울었다. 이건, 숫제 패륜이다. 슈의 앞에서는 아닌 체 하지만 완전한 배신자이다. 이럴 수는 없다. 쓰레기장에서 구해 준 은인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고마운 마음과 애틋한 감정과 미안한 생각과 자기혐오가 어지럽게 뒤섞여 올라 미카는 한참이나 그렇게 목놓아 울고 말았다.

이제 미카는 더 열심히 뛰어다닌다. 접시를 닦고, 무대를 찾고,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Valkyrie를 홍보하고, 크로와상을 사고, 집에 늦지 않게 들어가고, 슈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준다. 슈가 나락까지 떨어진다면 함께 가겠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학생회장의 말이나, 지난 날의 과오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Valkyrie는 다시 명예롭게 천계를 비행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은망덕하다.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 나는 분명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벼락을 내릴 신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 곁에 있다.

소금 성

1. 크레니히는 사실상 집에 갇혀 자란 것과 진배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와 싸운 기억이 있다. 지금은 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하디 사소한 이유였다. 생떼를 부리며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다가, 갑자기 숨이 가쁘더니 곧 세상이 노랗게 회까닥 돌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가 크레니히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마르그리드는 크레니히를 집 밖에 홀로 두려 하지 않았고, 크레니히도 감히 어머니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깨어나 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며 눈물 젖은 뺨을 크레니히의 얼굴에 잔뜩 부비던 어머니의 볼에서는 소금기 짠 내음이 났다. 그 집은 소금으로 된 성이었다.

 

 

2. 로쏘, 라고 하면 생화학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연구에 미친 천재는 새로운 연구거리를 또 잔뜩 만들어내고 감탄도 욕도 진탕 들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수식이나 법칙으로 정리하는 데 도가 텄지만 살면서 이성을 흐리게 하는 악마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악마는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홀리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더니 기어코 악귀로 붙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악마의 자식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악마의 새끼 아니랄까봐 과연 새끼 악마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소금 성에서 키운 악마. 그녀가 땀과 눈물로 쌓은 성에서 완성시킨 악마. 로쏘는 소금 성에 갇혀 있다.

 

 

3. 크레니히가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불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크레니히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확연히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동료를 툭툭 치면서 뭐라고 말을 했다. 동료는 고개를 젓다가 멋쩍은 듯 웃고는 크레니히 쪽으로 걸어왔다. 어머니 외에 한 명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크레니히는 어느 누가 자신을 보는 것도, 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빠짐없이 달가웠다.

“자, 크레니히. 저쪽에 가서 로쏘 아저씨에게 인사하렴. 오늘부터 네 양아버지가 될 분이시란다.”

열여섯 살까지 어머니와 단둘이만 지냈던 크레니히에게는 어느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도, 방금 들은 말의 내용도.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년은 아까 바라보던 남자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소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 하세요…….”

“팔자 더럽군.”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서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짓씹듯 말했다.

“너는 장례가 끝나면 나랑 같이 내 집에 갈 거서 거기서 지낼 거다.”

“감사합니다…….”

세상 물정엔 어두워도 최소한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건 알 수 있었던 크레니히는 빠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 말할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로쏘… 아저씨?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를 일은 없을 텐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4. “돈은 여기에 놔둘 테니 네가 알아서 해. 귀찮게 신경쓰게 하지 말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족하면 말을 하든가 말든가.”

로쏘의 집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자그만 방에 있는 것은 침대와 책상이 다였다. 낯선 곳에 있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집에 있다는 사실에 계속 심장이 두근거려 크레니히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밖에서 이따금 종이 넘기는 소리나 펜을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만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혹은 먹을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다. 처음 며칠은 굶었다. 그렇게 있는 대로 굶주린 후에야 조악한 칼로리바나 식사대용 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대강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크레니히는 결국 혼자 돈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크레니히는 어머니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는 혼자서도 외출할 수 있었고, 이제는 혼자서 외출해야만 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혼탁하게 뒤섞여 눈물이 났다. 어색한 솜씨로 크레니히는 여러 가지 식재료를 집에 채워놓았다. 혼자서 식사를 하다가 이거 괜찮네요, 엄마. 하고 앞에 음식을 권할 뻔했다. 혼자였다.

몸이 좋지 못했던 소년은 해가 다 뜬 후에 일어나 저녁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조금씩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로쏘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레니히는 로쏘가 며칠씩 걸러서야 불규칙하게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일까. 어디서 지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그 순간 완전히 지쳐 있던 로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없는 것처럼 행동해. 좋아서 널 맡은 거 아니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소년은 방문 틈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흔적을 좇다가 결국 침대에서 훌쩍거리며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어났을 때, 크레니히는 휑하던 방 안에 책이며 노트며 장난감이며 못 보던 생활용품이 잔뜩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5. 꼬박 한 달이 지나자 크레니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혼자서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것부터, 책을 찾아 읽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로쏘라는 남자였다. 혹은, 혼자 지내는 것이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크레니히 자신이 며칠, 혹은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집에서 나왔을 때 크레니히는 자신이 이제부터 어쩌려는 작정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알았고 도착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알았다. 구역 밖으로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라 종일 거리를 헤맸다. 날이 저물고 길을 잃었나, 이대로 어디도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싶을 때 즈음에야 낯익은 풍경, 낯익은 거리, 낯익은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헤매지 않았다. 발이 먼저 이끄는 대로 따르고 나니 십년 넘게 어머니와 둘이 함께 지냈던 집이 보였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오래된 집으로 향하던 크레니히는 집 정문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추었다. 어쩐지 시큰하고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열망이 더 강했기에 소년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집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쓰던 가구와 소품들 위에 추억이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추억을 되새기던 크레니히는 깊이 들어서서야 집 앞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 달을 비웠을 집이 먼지도 거미줄도 없고 누군가 지내는 것처럼 살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겁이 나서 제 어깨를 끌어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크레니히는 마침내 범인을 발견했다.

마르그리드가 주로 연구를 했던 방, 나무 의자 위에서 붉은 머리의 남자는 소품처럼 당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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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그녀

CeZ0JQPUkAA3h4a 치님 슈그녀 그림 보고 써봤습니다! 동인설정이 가득이라 좀 2.5차창작같네요..ㅇ>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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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가본 지 올해로 꼭 삼 년이 되었다. 길다면 나름대로 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과 장면은 기억 속에 물감으로 마구 덧칠해놓은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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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언어

장미향기가 잔뜩 났어요. 아주 코를 찌를 지경이었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꽃에 둘러싸여 차 마시기를 좋아하시니, 장미를 산더미처럼 쌓아 보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시는 흰색 장미를 하얗고 하얗게 쌓았어요. 그런데 도무지 기분이 좋아지실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죠.

아, 이제 황제 폐하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려나요? 에이치는 학원을 졸업했으니까요.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니군요. 결코 잊지 못할 졸업식이었죠. 졸업식의 마지막 공연은 물론 학원 정점인 우리 「fine」이 맡았습니다. 아아, 「fine」의 「마지막」이라니 이 얼마나 유쾌하고 영광스러운가요?

귀여운 토리는 분명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알고 있어요. 제법 영악한 아이입니다. 작은 몸에 하얀 유닛복을 앙증맞게 걸치고 발을 구르고, 보는 사람이 웃음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애교를 부리죠. 그날은 특히나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답니다. 주인이 힘을 잔뜩 냈으니 원래도 완벽한 유즈루야 말할 여부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히비키 와타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무대에 입장할 때마다 탄성과 환호를 듣는 일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네, 확실히 그날의 공기에는 평소의 무대보다도 더 뜨겁고 애태우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의 등장입니다.

팡파르 속에서 황제 폐하가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거짓말처럼 환호성이 멎고 모두가 숨을 죽였어요. 에이치는 천사 같았어요.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가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랍니다. 갓 하늘에서 내려와서, 금방 다시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천사요. 희끄무레 웃는 에이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그 어느 무대에서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이것만은 제가 살아온 세월을 걸고 확언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습니다.

황제는 무대에서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학생회장이 병원에 실려가는 동안 졸업식은 끝났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꿈의 학원도, 한단지몽도, 무지갯빛의 서커스도 모두 끝났고 지금은 모라토리엄입니다.

그래도 아직 유예기간이 조금 남았죠. 원하던 대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거기에 조금 더 시간이 남았는데 왜 그리도 심통이 난 채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광대가 풀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에이치는 한 송이를 들고 장미 향기를 맡는 듯 얼굴을 가져다대더니 주먹을 쥐어 손에 쥔 꽃잎을 우그러뜨려버리더군요. 그리고 내던졌습니다.

“꽃이 마음에 차지 않나요?”

“응.”

참, 별일입니다. 곧 쓰러질 듯 아플 적에도 언변은 유창했던 우리 폐하가 아닙니까? 그런데 짧은 단답에 입조차도 꾹 닫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광대는 광대의 일을 하고, 폐하가 꽃이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성에 찰 만한 것을 가져와야죠.

그래서, 특히나 향이 빼어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장미를 대령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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