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즈너 테크닉

2. 부실에서 혼자 다섯 배역을 하던 남자를 목격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히비키 와타루는 연극부의 부장이 되었고, 이츠키 슈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친우라고 하는 게 좋을까? 적어도 동아리의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만큼 친해진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여전히, 연극부의 연기는 슈의 성에 차지 않는다.

“호쿠토 군, 집중하세요. 여기가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카이가 수줍은 소년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에요!”

“하지만 집중이 될 턱이 없잖은가. 눈의 여왕도 부장, 게르다도 부장……. 결국 부원은 우리 둘만 남았는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

“아아, 보통 사람 둘이서 연극을 하는 건 어렵겠죠. 하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이 히비키 와타루가 부장인걸요? 일인극을 해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합니다!”

“……가끔 생각했지만, 당신 혼자 충분하다면 나까지 연극부에 필요한지 모르겠군. 차라리 나도 퇴부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그건 안 되죠, 안 돼요. 호쿠토 군이 이 연극부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데!”

“부장……. 매일 햇병아리 취급하더니 그래도 나를 배우로 인정해주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요! 호쿠토 군은 분명 뛰어나지만 저에 비하면 배우라고 할 수도 없죠. 그래도 제 연습을 봐줄 유일한 관객이니까요!”

“당장 퇴부하러 갈 거다. 말리지 마.”

방을 나가려는 호쿠토와 말리려는 와타루로 연극부실은 한참 난리가 났다. 물론 히비키 와타루는 본인의 말마따나 보통 사람 이상의 재주가 있었으므로 어렵잖게 호쿠토를 잡아 세울 수 있었다.

“아아, 호쿠토 군. 우리의 애정이 농담 한마디에 의심받을 정도였다니 슬픕니다! ― 우리라고 표현하지 마. 라고 호쿠토가 차갑게 덧붙였다. ― 당신을 위한 진심을 알아주세요. 호쿠토 군이 외로울까 봐 이렇게 고문 선생님을 모셔왔답니다~?”

“누가 고문이라는 거냐, 누가.”

“하지만, 슈. 당신이 의상도 만들고, 대본도 만들고, 이렇게 와서 연기지도까지 해주다니……. 그렇네요. 이건 고문이라기보다는 연극부 부장에 가깝네요! Amazing, 당신이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이 텐션의 와타루에게 일일이 반응할수록 더 말려들 뿐이다. 슈는 대답 대신 호쿠토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고생이 많겠군.”

호쿠토는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감격한 표정이었다.

“변태가며……, 아니, 히비키 부장의 친구라는 분이 맞는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두 배로 비난받는 게 아닌가 걱정했네요.”

“흥,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지. 안일하게 좋은 말만 해주려고 온 건 아니다.”

“그럼요, 그럼요. 슈는 첫 만남에서 무려 제 연기도 혹평했답니다? 긴장 바~짝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호쿠토 군?”

“예술에 이유 없는 비평은 하지 않는다. 그때 비평했던 건 와타루 네 연기가 내 평가선 아래였기 때문이야.”

한 치 흔들림 없이 대꾸하는 슈를 보며 호쿠토가 몸을 조금 움츠렸다.

“너무 걱정 마, 히비키 부장. 나도 연극부원인 이상 비평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정도라니, 조금 겁이 나는군…….”

“긴장했나요, 호쿠토 군!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이 내려갔네요, 가엾은 새끼오리처럼! 안 되죠, 모처럼 당신에게 꼭 맞는 배역을 준비했는데요. 제 애정을 매정하게 거부하는 당신처럼, 심장에 얼음 조각이 박힌 카이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위축되어 있어서야 슬프죠. 그러면 비평보다 먼저, 일단 이쪽에서 시범을 보여드리죠.”

일인극의 주인공마냥 속사포처럼 말을 퍼부은 와타루가 슈를 돌아보며 윙크했다. 무슨 의도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멀거니 마주보자 와타루가 슈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호쿠토 군은 발음도 대사도 정확하지만, 연기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슈와 함께 시범을 보여주죠. 자, 보세요. 눈의 여왕의 첫 번째 키스는.”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하얀 얼굴이 눈앞에 다가왔다.

“추위를 잊게 합니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남았다. 화를 내야 할까? 슈는 앞을 흘끗 쳐다보았다. 호쿠토는 여전히 진지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입술이 보이지 않는 각도니 그저 흉내인 척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보세요, 이게 현실과 유리된 카이의 놀란 얼굴이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키스는.”

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가를 간지럽히는 감촉에 가볍게 응하여 입을 벌리다, 와타루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찌릿 노려보자 와타루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친지와 가족을 잊게 하는 키스입니다. 그렇게 카이는 두 번의 키스를 받고 눈의 여왕에게 홀려서 그녀를 따라가는 거죠.”

-칫. 작게 혀를 차고 슈는 다시 호쿠토의 안색을 살폈다. 이상한 낌새를 맡지 못했는지 후배는 그저 순수하게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진실한 감정이 느껴지네요. 시범 감사합니다.”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슈는 그저 고개를 가볍게 까닥인 후 와타루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앗, 그렇게 만지면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섬세하게 다뤄주세요?”

“머리카락이잖아, 머리카락.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저 녀석이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지, 카게히라 앞에서는 하지 마.”

“어라. 아직도 게르다를 잊지 못한 건가요, 카이 군?”

와타루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세 번째 키스를 해버릴 거예요. 긴 꿈에 빠지는 키스예요.”

“마음대로 해.”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입술에 아까의 감촉이 남아있었다.

 

하류 악당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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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은 사자전역에 관련된 사료를 읽던 중, 당시대에 나타났다는 마수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스케치라고 표현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단출한 실루엣의 그림이 어쩐지 눈을 사로잡았다. 독을 품은 숨을 한 번 내쉬면 생물을 시체로 만들고, 반나절 만에 제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는 검은 용은 그 자신도 시체마냥 뼈대만 있었다.

왜 하필 이런 형태를 하게 되었을까? 원래는 이 생물도 따뜻한 살과 피를 갖고 있던 게 아닐까? 제 숨에서 독기로 인해 자신마저 곯아 없어진 게 아닐까, 그러고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움직였던 걸까.

“헛소리네.”

열변을 펼치는 미하엘에게 동료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료도 찾기 힘든 그런 전설 같은 걸 연구하겠다고? 도력혁명의 시대에 소설이라도 쓸 셈이야? 이봐, 차라리 경제학 같은 걸 연구하지 그래. 우리 새 후원자는 실용성 있는 분야를 좋아한다고.”

그래도 어딘가에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전설 속에 남은 생물의 희소한 모습에 호기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 정도 말이 트였다 싶은 사람이면 매번 용의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모두 마지못해 웃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미하엘을 핀잔할 뿐이었다.

그래서 미하엘은 용의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앞서 자신을 몽상가라고 무시하던 사람을 연구 성과로 압도하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

비록 가장 관심 있던 분야에 매진하지 못했더라도, 결국 서른의 나이에 제국학술원의 조교수라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꽤나 어깨 펴고 다닐만한 인생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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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소년

어려서 머리가 여물지 못하고 몸도 작았던 시절에, 훨씬 더 자그마한 새를 주운 적이 있다. 싸늘한 바닥에서 가냘픈 날갯죽지를 몇 번이고 파닥거리던 아기 새는 조금도 공중에 뜨지 못하고 마침내 바닥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린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자그마한 생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드러난 배 위에 손을 살짝 대니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이 느껴졌다.

불편한 연회를 견디다 못해서 슬쩍 테라스로 빠져나온 참이었다. 연회장에 이 새를 들고 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비웃음을 사겠지, 비난받을 짓을 한 거지. 나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새는 도와주어야만 한다. 어쩌지도 못하고 두 손 안에 새를 꼭 쥐고서 찾아간 예배당에서 시스터가 말했다.

“어미에게서 떨어져서 며칠은 방치된 모양이에요. 날개도 많이 상했네요. 좀 더 따뜻한 곳에서 돌보고 지켜봐야 예후를 알 것 같은데, 돌볼 사람이 있을는지 걱정이네요.”

“그러면 제가 집에서 돌볼게요. 새가 날아가는 게 보고 싶어요.”

“이 애가 날 때까지 회복하고 자라려면 못해도 보름은 걸릴 거예요.”

“괜찮아요. 제가 계속 지켜볼게요.”

“도련님이 지나가는 생물에 이렇게 애착을 갖다니 별일이네요. 예배당 여자아이들이 보면 질투하겠어요, 후후.”

“그냥, 날아가는 게 보고 싶을 뿐이에요.”

“네. 그게 문제라면 문제겠네요.”

시스터는 아기 새를 볼 때와 꼭 같은 눈빛으로 어린 린을 내려다보았다.

“한 생명을 길들인다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무겁답니다. 새가 날지 못할 수도 있어요, 만약의 얘기지만요. 날아간 후에는, 걱정되기 시작할 거예요. 이미 사람 손을 탔는데 바깥에서 괜찮을까, 폭풍을 만나 떨어지지는 않을까. 그래도 정을 주실 건가요? 그리워하고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때, 어떻게 대답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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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가 미카 입양하는 얘기

 

 

애완동물을 데려오는 감각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본가에서 순종적이며 얌전했고, 색이 예쁘고 보기 좋았으며, 밥도 그리 많이 먹지 않았다. 선뜻 손을 내밀자 믿을 수 없다는 듯 깜박대는 두 눈이 인형 같았다. 앞으로 이 무해하고 무력한 생물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는 전능감이 있었다.

가엾은 아이를 데려와 멀끔하게 키워내, 결혼까지 지켜보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청결한 옷을 입고, 예절을 배우고, 훌륭한 숙녀로 자라난 코제트가 외간남자와 결혼해 떠나자 장 발장은 결국 상심하고 쇠약해져 죽고 말았던가? 느닷없이 불길한 결말이 떠올라 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유메노사키 학원의 ‘제왕’인 자신이 그렇게 몰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명예, 돈, 친구가 있으면 세상 대부분의 일은 쉬워진다. 이츠키 슈는 열일곱의 나이에 세 가지를 전부 갖추고 있었다. 안 그래도 늘 내심 본가에서 나오고 싶었고, 마침 저번 방송의 출연료가 들어와 통장의 잔고도 적지 않게 두둑하니,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였다. 이츠키 슈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졸졸 따라오던 카게히라가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파란색과 노란색의 눈동자 두 쌍이, 깜박깜박. 티 없이 서글서글 말간 눈동자와, 치켜 올라간 눈매와, 희고 갸름한 턱선과, 빼빼 말랐지만 제대로 자리 잡은 골격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소재인지도 모르는 예술품이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허름한 옷에 둘둘 싸인 채 반짝반짝. 위아래로 훑어보며 씩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카게히라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허둥거리다 멍청하게 마주 웃는다. 이 이츠키 슈쯤 되니까 이렇게 먼지투성이가 된 소재도 발굴해내는 것이다. 노력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범재들이, 오기인이라고 불리는 친우 녀석들이 아름다운 Valkyrie의 새 멤버를 보고 경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니토를 발굴해 최고의 인형으로 조율했듯이, 이 녀석은 그 누구보다도 오롯이 빛나는 보석으로 연마될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대충의 코스는 정해두었다. 집은 작업할 공간이 딸린 곳으로 세 채를 봐두었고, 세탁기와 청소기는 소음이 적은 것으로, 식기와 가재도구 몇 가지는 일단 집에서 안 쓰는 것을 정리해 꾸려놓았다. 그러므로 갓 상경한 카게히라와는 가장 먼저 집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이 이츠키 슈의 안목에 달할 리는 없지만, 동거인의 최소한의 동의는 구하는 것이 좋겠지.

첫 번째 집은 마트와 상점가에 인접해 있었다. 소란스러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학원에 등하교하는 동선이 가장 가까운 곳이다. 계약료는 조금 비싸지만 봐둔 곳 중 가장 잔여공간이 넓은 집이었다. 집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심플한 마감을 꼼꼼히 훑어보다가 뒤를 돌아보니, 카게히라는 침대 위에 앉아 퉁퉁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것 봐라, 스승님. 침대가 무지하게 크다. 쿠션도 좋구마! 내 집에서는 이불만 덮고 지냈는데, 이런 데서 자게 된다니 진짜 신기한기다.”

“쯧, 지금 뭐하는 거냐! 예의에 어긋난다. 내려와라, 카게히라!”

“아, 신난다! 스승님도 일로 와봐라. 이거 진짜 재밌는데.”

“그만 둬라, 카게히라!”

슈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무언가 둔탁하게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응아아……?”

멍한 얼굴로 일어난 미카의 몸 아래로, 아래로 푹 꺼진 매트리스가 힘없이 흔들렸다.

 

 

두 번째 집은 공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집 앞에 가만히 서서 냄새를 맡으면 공원의 풀냄새와 뒤섞인 꽃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곳으로, 바닥에 파스텔톤의 들꽃이 자잘하게 피어 있었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경이건만 카게히라는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시체마냥 힘없이 뒤를 질질 따라오는 녀석의 몸짓이 맘에 들지 않아 슈는 뒤따라오는 카게히라를 찌릿 노려보았다.

“카게히라.”

“응, 응아아! 스승님!”

“네 녀석이 살 집이다. 볼 마음이 없는 거냐?”

“아, 아니! 볼끼다, 볼끼다!”

“아주 땅바닥에 붙겠군. 도무지 못 봐주겠어. 잘 들어라, 카게히라. Valkyrie는 아첨하지 않는다. 한 번 실수했다고 고개를 내리지도 않는다! 내 인형이 되려면 그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쳐야겠군. 고작 몇 만 엔에 네 녀석을 내다버리지 말라는 거다. 얼굴을 들어라!”

“으응, 내 스승님 하는 말 뜻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억쑤로 멋지고마. 그라믄, 내도 같이 들어가서 보면 되는기가?”

“흥, 그 정도는 내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해라. 말을 잘 듣는 건 좋지만 너무 멍청한 인형은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까지 말한 후에야 카게히라는 좀 죽상이 풀려서 슬그머니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닐 테니 외지에 와서 이래저리 적응이 덜 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슈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지역에 터를 잡고 활동하던 미술가가 살던 곳이었다.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이 살기에는 조금 좁을지도 모르지만, 화가가 구석구석 아크릴로 그려 놓은 주변 꽃과 정경의 낙서가 마음에 들어 골라두었다. 집 자체만으로도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카게히라 녀석도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구석에 쭈그려 앉아 꽃의 그림을 들여다다보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신기하구마. 꽃 위에 있는 게 진짜 나비인 줄 알았데이. 근데 만져보니까 안 잡혀가꼬 아닌 줄 알았다. 어라, 까슬까슬하네.”

“잠깐, 카게히라……! 그건 건들지 마라!”

“어어, 떨어지네. 어어……?”

금방 날아갈 것 같던 금색 나비가 어느새 카게히라의 손끝에서 마른 물감 조각이 되어 부스러졌다. 옆에 서 있던 집주인이 발을 뚝 멈추고 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뭐지? 무해하고 무력하고 내가 돌봐주어야만 하는 생명체는, 어디로 갔지?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유리알 같은 눈을 예쁘게 깜박깜박하는 카게히라를 보며 멍하니 서 있던 슈는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 녀석은 비글이다. 귀엽고 작고 천사처럼 눈이 예쁘지만, 왕왕 뛰어다니며 발에 닿는 것마다 부서뜨려 버린다.

 

 

세 번째 집은, 지금까지 본 집들에 비하면 울타리도 낮고 단출했다. 워낙 조촐한 집이어서인지 집주인은 바쁜 용무가 있다고 집 앞까지 두 사람을 데려다주고 떠난 후였다. 어느새 오후가 되어 햇살이 가까웠고, 구름이 나지막이 벚꽃 가지 사이로 흘러갔다. 가지 끄트머리에 진한 분홍색 꽃망울이 움터 있었다. 카게히라 녀석이 입학해서 정신이 없을 때쯤 한창 벚꽃이 하얗게 흐드러지겠지. 슈는 발치에 떨어진 봉오리 하나를 주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내부 역시 단출했다. 목재로 댄 바닥에 늦은 햇빛이 쏟아들었다. 슈는 상처가 많은 바닥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무던하고 아늑한 방에는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있었다. 어릴 때 자주 놀러가던 친구의 집을 닮은 듯도 했다. 집이 갈 곳이 되지 못하는 아이가 지내기에는, 어쩌면 오히려 이런 곳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슈 자신이 그랬듯이.

“단출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군. 네가 보기엔 어때, 카게히라.”

카게히라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거렸다. 그 모습이 답답해 혀를 찼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아니, 스승님 좋은 방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내가 보는 게 뭐 중요하나.”

“젠장, 네 녀석이 뭐라도 말을 해야 내가 결정을 하지 않겠어!”

답답함을 못 이겨 빽 소리를 지르자 카게히라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대……, 대체 뭐냐!”

“미안하다. 내, 너무 신나서……. 스승님이, ‘우리 집을 보러 가자’고 하는 게 너무 신나서, 내 스승님한테 얹혀사려는 것뿐인디, 속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 같다. 미안타, 스승님. 내 미안타, 흐윽…….”

“시끄럽다,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해라!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는, 아부지 집에 신세지는 거였으니께……, 우리 집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래서 내 주제도 모르고 내 집 고르는 것마냥 신나버린기다. 내 그만 스승님 방해하지 않고 바로 짐 싸서 조용히 집에 돌아갈게. 집 보상비는, 어떻게든 부쳐서 갚을 테니께. 너무 심려치 말고……. 고마웠다, 스승님.”

젠장. 슈는 혀를 쯧 차고 훌쩍이는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급히 손을 당기자 손등을 덮은 소매가 걷혀 까만 멍자국이 드러났다.

애완동물을 데려오는 감각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불결한 곳에서 제 어버이에게 천대당하며 불우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는 비쩍 마른 강아지나 까마귀 같은 녀석을, 내가 어서 구해주어야 한다는 정의감이나 불안감에 사로잡혀 급하게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훌쩍이고 있는 녀석을 보았을 때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동정인지, 방치된 예술품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욕심 섞인 섣부른 충동이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고작 열일곱 살짜리 고등학생이 한 살 어린 아이를 일부러 데려오겠다고 생각했던 그 충동적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카게히라 미카가 발갛게 부은 두 눈을 들어 슈를 쳐다보았다. 이츠키 슈는 아마 이런 것이 자신의 인형에 대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카게히라.”

“으응.”

“이 나를 뭘로 보는 거지?!”

슈가 다시 얼굴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미카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크게 떴다.

“그저 심심해서 너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나? 내 인형은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그저 멋으로 유메노사키의 제왕이라고 생각하나? 최소한 네 녀석의 버러지 같은 품행을 감싸줄 정도의 소양은 있다는 거다. Valkyrie는 완벽이다. 네 녀석이 아무리 거치적거리는 실패작이어도 내 실과 설계로 감출 수 있어. 그리고, 마드모아젤을 봐라. 오래된 앤틱 인형이지만 내 소중한 보물이지. 설령 시간이 지나 네놈이 폐품이 되고,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어도 내가 공들이면 다시 조율해낼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와서 멋대로 벗어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는 이미 내 실 안에 있어. 이해했나? 그 학습능력 없는 머리에도 이 정도로 말해 뒀으면 알아들었겠지?”

“으응, 아니…….”

다시 뒷목이 띵해왔다. 혈압이 팍 오르는데 카게히라가 헤헤 웃었다. 그러고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글은, 눈만큼은 천사처럼 예쁘던가.

“스승님 하는 말, 내는 제대로 모르겠고……. 그래도 이기는 알 것 같다. 스승님은 내 행운이다. 아부지랑은 반대야. 고마워서 우짜지. 내는, 이렇게 재주도 재물도 없고 실수투성이라, 스승님한테 보답할 방법이 하나도 없는디. 지금 내 이렇게 빈손이라, 주고 싶어도 줄 게 하나도 없다…….”

“쯧, 보답할 생각 따위 말아라. 네 녀석이 나한테 보답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릴 해야지. 주제넘다, 카게히라.”

“그래, 생각났다! 그라믄 나도 스승님이 폐품이 되어도 안 버릴게! 스승님이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어도 내가 옆에서 조율해줄게!”

“뭐어어? 감히 네 녀석이 유메노사키의 제왕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역시 미안타, 내 이렇게 눈치가 읎어서! 그치만, 지금 줄 게 없으니 나중에 갚는 수밖에 읎잖나.”

“쯧, 됐다. 말을 말자. 앞으로 가르칠 게 잔뜩이겠군. 네 그 빈 머리에 교양과 복종을 채워넣어 주지. 나는 네 녀석에게 도움 받을 정도로 형편없지 않아. 내 조율과 인도는 완벽하니, 너는 이제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인형으로 명령만 가만 따르면 되는 거다. 니토, 니토를 만나야겠군……. 니토를 보면 너도 완벽한 인형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될 거다.”

“응! 그 윽수로 이쁜 누나 내도 좋다!”

“형이다.”

“에에엑? 거짓말! 내를 바보로 아는기지! 안 속는다!”

“하아……, 말을 말자. 내일 보면 알겠지.”

“응아, 놀리지 마라!”

카게히라는 작은 새처럼 쉴 새 없이도 떠들었다. 빈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날이 저물었고, 봄이 되고, 벚꽃이 피었다가는 졌다. 그렇게 아늑한 집에서 마드모아젤의 낡은 안구를 두어 번 바꾸어 줄 때까지 시간이 흘렀다.

 

미카가 죽은 미카슈

 

 

이름 모를 열병. 한 사람의 사망원인으로 머리에 새기기에는 지나치게 덧없는 단어였다. 문득, 카게히라 미카가 꼭 그런 모양으로 자신에게서 사라지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번듯한 이름도, 흔적도 자취도 없이, 처음부터 그에게 없었던 것처럼. 하기사 그랬다면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했을 리 없다. 이츠키 슈는 지금 남극에 있다.

사망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것은 슈가 어리석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결코 위생상태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곳에서 오래 지냈고, 그런 일을 했었다. 언제 어느 균이 몸에 들어 언제부터 약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응당 그래야 했던 것처럼 미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기 위해 마지막까지 따져보는 것이 이츠키 슈가 그 어리석은 까마귀를 위해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어리석음이었다.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고, 늘 실수투성이에, 과거까지 무던하게 곱지 못해 그렇게 죽어버린 그 아이였으나 마지막 모습만큼은 더없이 인형다웠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진즉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야만 했다. 사투리도 표준어도 되지 못하는 말을 더듬거리다가 못 들어주겠다고 호통을 치자 아이는 내가 뭐 그렇지, 하며 헤헤 웃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카게히라 미카는 완벽하게 바른 표준어를 일상에서 구사했다. 하면 되는데 안 하고 있었나. 그러게, 스승님. 내가 멍청했네.

실수가 잦던 아이가 제로콤마 일 초까지 어긋나지 않는 무대를 섰다. 노래하는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초조할 때 자꾸 다리를 떨고 손가락을 깨물던 아이가 이제는 시선을 곧게 두고 허리를 꼿꼿이 했다. 그렇게 차례차례 슈가 지적하던 모든 것이 ‘고쳐졌을’ 때,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 나는 이제 괜찮은 인형이야? 슈가 무덤한 목소리로, 그렇군. 이제 꽤 흠잡을 데가 없게 되었군. 흠 없는 인형이다. 이렇게 대답하자 미카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말했다. 스승님. 나 얼마 남지 않았어.

시체의 상체는 양호하다. 미카는 더 보기 싫게 야위기 전에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 남은 돈을 전부 흉터 수술비에 쏟아부었다. 더 이상 이츠키 슈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것을 바랄 것 같느냐고 소리를 지르자 미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서는 마드모아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스승님은 죽은 사람을 오래 기억하잖아. 만약에 내 인형을 만든다면 얼룩투성이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내 잘못이었을까? 나 때문에 그 아이가 비뚤어진 걸까? 돌이켜 보아도,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졸업 후에도 함께 살았다.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카가 장을 보고, 슈가 아침을 하고, 집 앞에 떨어진 벚꽃을 주워 마드모아젤의 머리에 장식하고, 무대를 연습하다가, 녹초가 되어 돌아와 바느질을 하다가, 슈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미카가 담요를 덮어주다가 뺨에 입을 살짝 맞추고, 슈가 그만 눈을 뜨면 불을 껐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고 난 후에는 별을 보았다. 쌀쌀한 새벽의 뜰에서 미카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별자리들의 이름을 불렀다.

스승님, 저거 보이나. 저쪽 밝은 별이 북극성이다. 응, 그 노란 별이랑, 그 아래 주황색 별 보이나. 거기까지 사이에 별 세개 보이제. 쭉 이어서, 고 옆에 있는 별들까지 하면 작은곰자리인기다. 곰 안같다고? 헤헤, 내 보기도 그래…. 근데 그거 아나? 북극성이란기는 정해진 게 아니라 그냥 천구 북쪽에 있는 별을 부르는기다. 오래 전에는 다른 별이 북극성이었다 카지 않나. 지금 남극성은 없고, 대신 남십자자리라고 길잡이별이 있거든. 건 위도가 높아서 지금 여기서는 못 보고, 훨씬 더 남쪽에, 내 고향에 가면 잠깐씩은 보인다. 언젠가는 스승님이랑 같이 보고 싶으네.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미안하다. 그런데 스승님 지금 얼굴 빨개지지 않았나? 농담이다. 깜깜해서 안 보이는걸. 반~짝 반짝 머리위에 도는 별만 보이지. 나는 별이 좋다.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안 변하잖나. 아무리 땅 위에서 사람들이 추태 부리고 난리를 쳐도 저건 반짝반짝, 안 변하는기다. 그러니까 이렇게 행복할 때 별을 봐 둬야지, 나중에 봐도 지금이 생각나지 않겠나.

돌이켜보면 카게히라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슈 자신이 얼마나 힘들지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녀석을 원망해도 되는 것이다. 운반중인 시신이 무거웠고, 얼어붙은 뺨에는 이제 감각이 없었으며, 팔과 다리가 뻣뻣했다. 미카가 죽은 후의 하루하루가 꼭 그랬다. 아침식사를 먹어줄 사람이 없었고, 꽃이 떨어져도 꺾어올 사람이 없었고, 옆에서 함께 잘 사람이 없었고, 카게히라 미카가 없었다. 집 안에, 자주 가던 가게에, 뜰에 무대에 거리에 세상에 우주에 아무 것도 없었다. 휑하니 비어 온통 새하얀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는 남극의 설원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무 의미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 남은 나에게 너는 무엇을 바라며 이런 것을 부탁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너에게 꽤 쌀쌀맞았다. 네 나름의 복수인 걸까. 이제 내게 정을 줄 수 있는 시간은 끝났기에 원망만이 남은 걸까. 그렇대도 마지막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설원 위에 미리 확인해둔 장소가 보인다. 슬슬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어떻게든 도착해냈다. 슈는 장치를 설치하고 시신을 바닥에 고정했다. 레이스와 원석과 금으로 점철된 의상 위에 천을 덮었다. 평균 영하 50도의 날씨에서, 너는 이제 얼어붙을 것이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되어, 완벽한 인형인 그대로. 흠결도 없이, 핏기도 체온도 세상에 남겨줄 사랑도 없이.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틀림없이 얼어붙을 것이므로. 슈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는데, 불빛도 건물도 없는 남극의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검게 빈 하늘에, 쏟아질 듯 별이 반짝거렸다. 눈이 멀 것처럼 빛이 알알이 충만했다. 시리도록 쏟아지는 빛의 향연 속에서 슈는 눈으로 더듬듯 푸른 빛깔의 별 네 개를 찾았다. 아무 것도 없는 남극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는 남십자자리. 아, 네가 가리켰던 별이다. 너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보던 별이 반짝인다. 봐, 카게히라. 우리가 저 우주에서 점멸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