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주간_미카슈 주제 : 계절

저번주 주제였는데 계절감은 워낙 좋아하는 소재라 놓치고싶지 않아서 ^^; 괜찮겠지요.. 계속 참여에 의의를 두는 정도로 단문입니다.

 

***

 

지하 라이브하우스가 툭탁거리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 대기실 벽 윗쪽으로 난 창문에 네모나게 재단한 에어캡을 대던 미카가 흘끗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안 비뚤어졌나?”

“왼쪽을 조금 더 올리지……. 좋아. 나쁘지 않군.”

슈가 찍 소리나게 테이프를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스승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알았대? 스승님네 집은 거 뭐냐, 반듯한 저택이잖아. 이런 잡일은 한 번도 안해봤을 것 같은데.”

“이러고 있는 게 다 네 녀석 때문이잖나. 아이돌의 기분은 체력 관리인데, 아무리 날씨가 쌀쌀해졌다고 해도 잔기침이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잠깐 기침했다, 잠깐. 끄응, 솔직히 스승님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은데…….”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제왕은 제왕이니 제왕인 거야. 이제 다 끝났으니 저기 불이나 켜거라.”

“으응……. 뭐, 스승님은 빵만 먹고서도 라이브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니까 반박할 말이 없고마. 난로는 또 어디서 구해왔대.”

미카가 허리를 굽히고 한참을 끙끙대자 대기실 소파 옆에 있던 난로에 불이 들어왔다.

“스승님도 그만하고 이리와서 앉아라.”

미카가 옆자리를 두드렸다. 슈가 묵묵히 따라 앉기 무섭게, 방의 불빛이 몇 번 깜박거리더니 어둑해졌다.

“전등을 갈아야겠군.”

언제 날이 저물었는지 벌써 바깥은 어두웠다. 타닥, 타닥 붉게 타오르는 난롯불이 안 그래도 빛 없는 지하에서 가장 밝은 불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께 내일 하교하면서 사오자. 근데 난롯불도 좀 불안한 것 같다?”

“땔감을 더 넣어야겠구나.”

“어, 잠깐만 기다려봐라.”

미카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대기실 앞에는, 양손 가득 마른 낙엽더미를 모아들고 온 미카가 있었다.

“이 앞에 잔뜩 떨어져 있던 게 생각났다. 이거면 되겠지.”

얼굴에 지푸라기를 묻힌 채 환하게 웃는 미카를 보면서 슈는 혀를 쯧 차고는 뺨에 손을 올려 풀을 떼어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한두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슈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카에게서 낙엽더미를 받아들었다.

“손이 차구나. 내가 나갔다 올 걸 그랬군.”

“괜찮다.”

집게로 난롯불에 마른 낙엽더미를 밀어넣는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낙엽이라니, 벌써 가을이구나. 언제 이렇게 금방 계절이 바뀌었는지 모르겠군. 시간도, 벌써 밤인가?”

두 사람은 어둑한 방에서 나란히 난롯가에 앉아 불빛을 쬐었다. 묘하게 고즈넉한 방에서 타닥타닥, 낙엽 타들어가는 소리만 계속 난다.

“모두 어느새 변해버려. 카게히라. 네 녀석도 말이다. 비실비실 말라서 남 눈치를 보면서,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금방 픽 쓰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슈의 얼굴을 미카가 제 어깨 위로 당겼다.

“졸리면 이대로 좀 자자. 어두컴컴한데 난롯불 쬐고 있으니까 노곤노곤하지.”

“……따뜻하네.”

“응. 따뜻하네.”

아직 몸에 밖에 나갔을 때의 한기가 남아있는 채로 그렇게 말했다. 눈앞에 너울거리는 불빛을 한참 바라보던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 자?”

대답은 없었다. 꾹 다문 입술, 감은 채로 가볍게 흔들리는 눈꺼풀, 대답 대신 몸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 소리.

두근, 두근.

타닥타닥 타오르는 난로 불빛이 창백한 얼굴 위에 아롱거리고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떨어진다. 미카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에, 미카는 침묵 아닌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집게를 들어 애꿎은 낙엽더미를 쿡쿡 찔렀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나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 흘러간다. 세상 모든 것이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간다. 계절은 지나가고, 낙엽은 떨어지고, 날이 쌀쌀해지고, 밤은 깊어가고, 우리의 심장이 뛰고 감정도 바뀌어 가는 시간.

별의 파편

여름이었다. 햇빛이 바닥까지 내리쬐어 달구고 매미가 병처럼 숨 막히게 울었다. 그리고 지금은 야외 수업이다. 아무리 유메노사키가 해안이라고 해도,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드는 날씨에는 별 수가 없는지 건장한 고등학생들도 뜨거운 볕에 하나 둘씩 녹아내려갔다. 하물며 원체 약골인 녀석은 어떠랴.

“차라리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케이토, 기상조절센터에 연락해볼까? 몇 억엔 정도 부르면 되려나?”

“정신 차려.”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에이치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아 보였다. 제대로 더위를 먹었는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진심인데. 나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건 싫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야외수업 같은 건 교사에게 부탁해서 빼도 되지 않아? 이제 2학년인데 적당히 타협해줄걸.”

“그래도 수업을 그렇게 쉽게 빠지면 안 돼. 입원했을 때는 수업을 듣고 싶어도 못 듣는단 말이지……. 그러면 케이토. 잠깐 교실에서 내 체온조절 팩 좀 가져다줄래? 지금 갑자기 냉방을 쐬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묘하게 성실하게 구네. 그럼 일단 가져올 테니까 혹시라도 무리겠다 싶으면 얼른 들어가라. 아무튼, 네 녀석은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혹시라도 에이치의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지면 꼭 조퇴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을 옮기려는 찰나, 운동장 한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 수업은 조퇴하겠다.”

특유의 거만한 말투와 목소리. 제왕이라는 별명에 딱 어울려서,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츠키 슈임을 알 수 있었다.

“날씨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아. 이런 상태에서 연습해봤자 비효율적일 뿐이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에이치 쪽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제멋대로시네.”

영락없이 비웃는 목소리였다.

“제왕님은 날씨가 나쁘면 예정된 공연도 안 나가신다더라고. 케이토. 날씨도 더운데, 학교 옆 바다에 사람 한 명쯤 밀어버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에이치의 상태가 유독 안 좋아 보이는 건 어쩌면 날씨보다도 합동수업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치는 이츠키 슈를 싫어한다.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말투가 기분 나빠. 재능도 있으면서 공연에 날씨를 가리는 게 싫어. 나는 건강 때문에 필사적으로 먹는데, 멀쩡한 몸으로 음식을 가리는 게 싫어.

이츠키에게 삼류 글쟁이라고 핀잔을 듣는 나도 그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는다. 이렇게까지 이유가 많다면, 오히려 ‘그냥 싫어’에 가까운 게 아닌가. 어쩐지 녀석은 이렇게 이츠키가 보이기만 해도 기분 나쁜 표정으로 비꼬곤 했다.

하지만 정작 이츠키 쪽에서는 텐쇼인 에이치라는 사람을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는 소위 제왕이라는 별칭만큼이나 방약무인했으므로, 아무리 같은 학원의 학생회라도, 그리고 대재벌인 텐쇼인 가문의 자제라도 신경이나 쓰고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너는 대체 왜 그렇게 이츠키를 싫어하는 거야? 동기잖아. 별로 서로 말해본 적도 없지 않아?”

“날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그게 뭐야. 네가 야쿠자야? 지나가는 사람한테 너 눈이 마음에 안 든다고 돈이라도 뜯게?”

“내가 말해놓고도 웃기지만, 정말이야. 케이토는 왜 내 말을 안 믿어?”

“그게 무슨 대사야. 네가 내 여자친구냐?”

말해놓고 어쩐지 무안해지고 말았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크흠. 아무튼 솔직히 네 녀석의 피해망상처럼 들릴 뿐이다. 정 그렇게 느껴지면 이츠키한테 대놓고 말하든가.”

“아직은 안 돼. 알잖아, 케이토. 앗, 지금 봐!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잖아.”

“어디? 이츠키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잖아……?”

“그새 눈을 돌렸잖아! 칫, 분해.”

“역시 네 착각인 것 같…….”

“그런 소리 할 거면 내 팩이나 가져다 줘. 만약에 이대로 일사병으로 사망하면 염은 케이토가 해줄 거지?”

또, 이런 식이다. 사사건건 병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녀석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이 병약한 녀석이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얼른 입을 닫고 교실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녀석의 성격이 이렇게 엉망인 것에 대해서는 소꿉친구인 내가 책임지고 설명할 의무가 있다.

얼음 자국

“몸은 어떤가?”

A군이 후원자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단도직입적이네,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들어 남자를 마주보았다. 처음으로 대면하는 후원자는 꾹 다문 입가의 주름부터 네모진 안경까지 구석구석 완고한 인상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니 직선으로 굳어 있던 남자의 입매가 슬그머니 무너지며 웃음기가 돌았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미안하네. 아직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군. 자네는 내 오랜 친구를 무척 닮았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격의 없이 대하고 말았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실례했네요. 상태는 상당히 괜찮습니다. 모두 후원해주신 덕분이지요.”

“아직 조금 불편한 것 같은데?”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A군의 다리를 응시했다. 면밀히 확인하는 듯한 눈빛에 짐짓 가볍게 대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A군은 실없이 웃으며 앉아 있는 전동 휠체어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아하하, 아무래도요. 그렇지만 한동안은 무균실에서 나오지도 못했는걸요. 이 정도로 개선된 것만 해도 기적이죠.”

“그렇지. 자네의 몸은 엉망이었어. 조직과 세포를 완전히 재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걷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 가지도 못하고, 식사 대신 수액만 맞아야 했고…….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차도 마실 수 있으니까요. 으음…….”

“차가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여전히 탐색하는 것 같은 눈매에 A군은 가벼운 긴장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온도 적당하고, 꽃향기가 아주 향긋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원래는 녹차를 즐겼다네. 그런데 홍차를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마시다 보니 취향도 변하더군. 그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진즉 이 맛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어.”

“생각보다 다감하시네요.” 무심코 중얼거린 A군이 급히 덧붙였다. “아. 초면에 무례했네요. 죄송합니다, 하스미 케이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