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갈고 갈아 인연을 엮고 엮어
둥글게 빚고 빚어 발끝에 세고 세어
밤 지새 그리다가 그칠 시 되었다니
이제야 눈 감고서 꿈이 계속하더라.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애를 써 되짚어도 어느 시점 혹은 어느 순간이 시작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첫 만남조차도 불명확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만나 무엇을 했는지 무엇 하나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다만 어느 먼 훗날 내면에 침잠해 센스 레코드의 기억을 찬찬히 살필 때 시작도, 끝도, 순서도 없이 불티처럼 피어나는 장면과 감정들. 어린 숨결과, 부드러운 손의 감촉과, 짐짓 짓궂은 목소리로 서로 반론을 제기해보곤 했던 사상과 이론, 그러다가도 머리를 맞대고 밤 새워 읽었던 연인들의 비극.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때리면 다시 손을 맞잡고 굳이 서로 맞추어 걸었던 발소리까지.
기억과 장면은 죄 불씨처럼 단편적이지만 불길이 붙어 훗날까지 오래도록 이어져간 것들이 있었다. 가령 오토마타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짬이 날 때마다 발맞춰 연습했던 둘만의 춤이 있었으며, 언제든 상대는 서로뿐이니 이야기할 때 눈을 돌리지 말자고 귓가에 속달거렸던 약속이 있었다. 열두 살이었다. 열두 살배기 아이들의 약속은 각자가 머리가 굵어 소녀가 냉엄한 감시자로 불리고 소년이 천재 공학사로 불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작 열두 살짜리들이 그러했느냐면 정말로 그랬다. 열두 살이라고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종이에 물에 스미듯 당연하게 사랑했고 아침 해가 그림자를 자르듯 막힘없이 자라났다. 여느 연인들처럼 마음이 자라고 몸도 자랐다. 세상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드물게 의견이 맞지 않아 입술을 삐죽이면 그 위로 새처럼 입을 맞추고 곧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이렇듯 정책이나 기술, 현안 따위를 토의하는 것이 세계를 위하여 만들어진 자들의 일상이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몇 번인가는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헤치고 기지개를 켜고 머리까지 풀어헤쳤다.
그런 후에는 종일 나가서 들어오지 않기도 했고 아예 방에서 나가지 않기도 했다. 간식과 책과 옷가지가 굴러다녔다. 레드그레이브가 둘둘 말린 이불 안에서 맨발을 내밀고 발끝을 까딱거리면 그라이바흐가 꽃을 꺾어다 이불 속에 파묻힌 여자의 얼굴 아래 들이밀었다. 여자는 간지럽다고 웃고 이불이 흔들리다가 남자의 품 안으로 넘어져 버렸다. 꽃이 쏟아졌다.
레드그레이브는 꽃을 좋아했다. 여행을 갈 때마다 높이 자란 꽃나무나 간혹 보이는 화분부터 길 가장자리에 핀 들꽃까지 찬찬히 살폈다. 그라이바흐는 사진을 좋아했다. 그는 꽃 속에 있는 레드그레이브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보면 초점이 흔들렸다. 어느새 화면을 가득 채운 얼굴이 렌즈를 향해 웃음을 짓고 그만 어지러워 사진기를 놓으면 이미 꽃이 코앞이었다. 뺨에서 보조개에서 꽃내음이 일었다.
그라이바흐는 저택을 얻자마자 거대한 정원을 가꾸었다. 가히 예술가의 것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이 정원은 간혹 오토마타가 연주하는 음악부터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까지 완벽하게 관리되었다. 품종에 따라 칼같이 열을 나누어 정갈하게 가꾼 화단의 꽃을 레드그레이브는 제멋대로 꺾어다 향기를 맡았다. 그러라고 있는 정원이었다. 정원에서 가장 성심껏 관리되는 부분은 바닥이었다. 바닥에 어느 날카로운 물체도 두지 않는 것. 레드그레이브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맨발로 풀을 밟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세심한 관리는 물론 그라이바흐가 세심하게 조정한 오토마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아름다운 인형들은 대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라이바흐는 자신이 손으로 빚는 인형들이 어느 한 여자를 너무 닮지는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지혜로운 레드그레이브는 연인을 위하여 평소에는 이러한 것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척, 모르는 체를 해 주었지만 가끔은 이 남자를 놀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인형이 이렇게나 아름다우니, 그라이바흐 씨는 연인이 필요가 없겠네요.”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연인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수 있겠는걸.”
그라이바흐는 그만 피식 웃고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렇게 있는데.”
이쯤까지 떠올리면 레드그레이브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두 사람이 서로를 너무도 거짓말처럼 또렷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드그레이브는 그가 그녀를 혹은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따위는 감히 가늠해보려 들지 않는다. 온 곳도 갈 곳도 없는 마음을 형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 꺼진 잿더미에서 불티 몇 점이 소리 없이 피어오른다.
물론 그들도 사람이라 언제나 뜻이 일치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각자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레드그레이브는 사람에, 그라이바흐는 기계에 애정을 느꼈다.
이것은 응당 여자 쪽이 밑지는 태생이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현명한 레드그레이브는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과 기계 사이의 어딘가에 두는 것으로 이러한 불만을 메꾸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라이바흐가 세계를 지도하는 오토마타의 개발을 세 번째로 언급했던 날, 레드그레이브는 그가 훌륭한 솜씨로 우려 준 홍차를 손에 대지 않고 놔두었다.
“그라이바흐. 기계가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하는 게 바로 그런 기계의 개발이야. 목적을 부정할 수는 없어. 가치를 창조하는 오토마타 말이지.”
“가치? 잘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는?”
“바로 그게 가장 어려운 점이지.”
그라이바흐는 제법 열정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뚜렷하게 실체가 없는 관념 같은 것들. 어쩌면, 그래.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정형화하기 어려운 것. 그렇지만 머지않았어. 내 오토마타들은 점점 사람을 닮아가고 있어. 기계가 정말로 실체 없는 관념을 추구할 수만 있다면 네가 하는 인민을 보살피는 일도 대신해 도울 수 있을 거야. 요즘 부쩍 피곤해 보인다고, 레드그레이브.”
“그라이바흐. 그런 건 지금 내게 필요 없어.”
레드그레이브는 그를 보고 웃어보였으나 명백히 웃음기가 없는 눈을 숨기지도 않았다.
“통치자인 내 앞에서 그런 얘기를 자꾸 하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당신은 나를 지배하려는 거지? 내가 필요한 건 당신 본인의 도움인데. 나를 정말로 도울 생각은 없는 거야.”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뒤늦게 당황한 낯빛이 하얬다.
“아니야, 그런 게. 나는 언제고 너의 편이야, 레드그레이브.”
“그러면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내 손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해. 네가 손을 내밀면 언제든 손을 잡아줄게.”
“언제든?”
“언제든.”
레드그레이브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자 큰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이름을 부르자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서로를 부르고 거듭 불렀다. 불안이 있는 만큼 메꾸기 위해 손을 겹쳤다. 입술을 겹치고 몸을 겹치고도 더 가까워지지 못해 파고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바로바로 위안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크고 작은 다툼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 번도 다른 상대에게 눈을 돌려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간혹 의문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레드그레이브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왜 우리는 서로여야만 했을까?
우리가 반드시 사랑해야만 했을까?
답은 없었다. 그들은 시작도 모를 때부터 남매이자 연인이었다. 그렇게 당연하게도 평생을 함께했다.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느 연인들처럼 싸우고 소원해졌다. 역시,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는다. 따져 보면야 이것저것이 많지만 의미는 없다. 서로의 분야가 달랐던 것, 가끔 내색하는 서운함도 무시했던 것, 업무와 선천적인 신체의 한계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룰 수 없었던 것, 생일 밤 인사를 빼먹었던 일이나 아팠던 곳은 괜찮으냐는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순간까지, 수없는 기억의 단편을 돌이켜 보아야 어쩌지 못할 후회만 속절없이 남아 괴로울 일이고. 그저 태어나 당연하게도 사랑했듯이 때가 오자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한낮의 열정이 사그라지고.
그리고, 헤어짐도 왔을 뿐이라고.
수사국이 뒤집어졌다. 테크노크라트가 죽었다. 자살로 알려졌으니 드문 사인은 아니지만 통치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직접 조사를 하다가 실신 상태에 빠졌으므로 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이로써 ‘테크노크라트의 자살’이 ‘통치자의 연인의 피살’이 되고 만 것이다. 수사국의 요원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실체 없는 공포에 떨었다. 그들은 그만큼 바지런히 수사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레드그레이브가 직접 나서서 사건을 살피고 있는 이상 수사를 멈출 수도 없었다.
한참을 요원 대부분이 이 사건에 매달렸다. 죽은 남자의 시신을 수사국에 보관해 부검하고 해체하고 다시 부검했다. 그러던 중 레드그레이브는 문득 의문을 느낀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위한 수사인가? 이 수사에 더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비로소 국장이 열렸다. 그러나 시신을 최종적으로 수습한 시기가 사망일에 비해 너무 늦었기에 예식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다.
때를 놓쳐버린 식은 남자가 과시했던 위명에 비하기엔 조촐하고 쓸쓸했다. 부검을 다 마치고도 한참이나 지나버린 시신을 이제사 불에 태우고 뼛가루를 뿌렸다. 부연 것이 빈 공중에 날렸다. 매캐했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흐려질 때 레드그레이브는 무심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릴없이 그라이바흐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사랑이었던 유기물은 분해되고 산화되어 온 세계에 점점이 흩어질 터이다.
어쩌면 사랑하는 데 이유가 없었다는 말은 거짓인지도 모른다. 레드그레이브는 그간 잊고 있었던, 함께 있노라면 잊어도 좋았던 사실들을 뼈에 스미게 깨닫는다.
이유들. 그라이바흐가 드물게 그녀와 거의 동등한 위치의 사람이었던 것. 어려서부터 함께해온 시간이 길었던 것. 서로 대화하기에 걸맞은 지성을 갖추고 있던 것. 세계를 다스리는 업무에 그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를 개발하는 업무가 어울렸던 것. 그가 멀끔히 컸던 점이나 뻗치는 머리 아래 눈썹이 짙고 시선이 또렷했던 점 그리고 감히 세계의 지배자를 비평하고 갈망하는 남자였던 것, 연인에게 차를 권할 때 들던 손가락이나 그러면서 손을 잡고 웃을 때 굳은 눈매가 풀어지던 모양과, 그런 그가 그녀의 세상에 살아있었음. 그 모두 합쳐 그가 그녀의 사랑이여야만 했던 이유 자체의 이유. 이제는 없는 숨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신체와 함께했던 추억들. 레드그레이브는 허공을 쥐었다. 잡히지 않는다. 어느새 어두컴컴했다. 황혼녘이었다. 숨이 따시게 타오르던 그 시대는 저물고 세계는 스러져갔다.
레드그레이브는 식에서 돌아와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의 두 남녀는 행복해 보였다. 행복했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이른 저녁별이 빛났다. 별은 아득히 멀었다. 그녀는 큰 소리가 나게 창문을 닫았다. 열어놓은 서랍을 닫고 열쇠를 찾아 달칵 자물쇠를 채웠다. 이미 세상은 바뀌었다. 날이 저물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만물의 통치자였다. 없는 것에 고통을 느낄 당위는 없고 느끼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연상하게 하는 행위들을 그만두었다.
통치기구에 흐드러지던 풀꽃 덤불이 까맣게 졌다. 벽면마다 반사되던 음악이 잦아들었다. 이야기소리가 사그라들고 전설 속의 신들이 죽었다. 실체 없는 관념은 하나씩 사라지고 여분의 방마다 불이 하나씩 꺼졌다. 소음 없는 독방에서 비로소 레드그레이브는 평안해졌다. 업무에 전념하는 만큼 더욱 마음 깊이까지 가라앉아 평온해졌다.
고인 물 안에서 퇴색은 수면에 떨어진 종이가 바닥에 가라앉듯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세계를 위해 태어난 생애 처음 느끼는 감정의 검은 뿌리가 있었다.
‘지칠 것 같아.’
레드그레이브는 이를 쉽사리 무시했다. 연인의 부재를 거쳐 감정의 외면에 익숙해진 덕이다. 파동 없는 수면 아래에서 그녀는 수십 년간 통치에 전념했다. 언론을 통제하기도 하고, 폭동을 저지한 후 미소를 띠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동안 서서히 깊고 넓게 뻗은 뿌리는 어느 날 그녀가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던 중에 끄트머리를 드러냈다.
아무리 평화로운 세계라 해도 소요는 끊일 리 없으나 이번에 보고받은 사안은 좀 특별했다. 수십 년 전 해결했다고 넘긴 것이 오래 곪아 몸집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사정이 어떻든 최적의 해결 방안을 고안해내는 것이 바로 레드그레이브의 업무였다. 명민한 두뇌가 사안이 해결될 시기를 계산했다. 수백 년 후였다. 지난 수십 년을 돌이키고 앞으로의 수백 년을 가늠하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었네. 오랜 시간이겠어. 나는 언제 쉴 수 있을까?’
그날 오후에 노화방지를 위한 메인테넌스가 있었다. 몸을 뉘이자 수십의 단말이 손끝과 발끝에 연결되고 몸속에 체액이 주입되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시간과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방으로 돌아온 레드그레이브는 책상의 작은 서랍에 손을 올렸다. 마흔 해 만인데 손은 열쇠를 두었던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오래 방치한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억지로 집어넣자 처음에는 뻑뻑했으나 곧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높은 마찰음과 함께 사진 속 행복한 남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레드그레이브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젊었을 적과 지금의 자신이 다른 것이 너무나도 없었던 것이다.
목이 가늘고 등이 곧게 뻗어 얼굴에는 잡티가 없었다. 속눈썹이 선명한 눈동자 위에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달라진 것이라고는 머리카락이 말리는 모양 정도였다. 모습이 지금과 너무도 다르지 않아 레드그레이브는 몸서리쳤다. 그럼에도 또한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웃는 표정과 그리고, 또.
그녀는 그의 주검을 지워주길 요청했던 마흔 해 전처럼 사진을 책상 위에 뒤집어놓고 그 뒷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견의 노화만 늦춘다고 마음의 퇴색을 늦출 수 있었던가? 피부를 잡아 늘여도 세포는 낡지 않았던가? 레드그레이브는 계산했다. 지난 일흔 해를 돌이키고 앞으로의 수백 해를 가늠했다. 이미 열정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심신은 불가분이라, 어느 순간 깜박 불이 꺼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위험요인을 제거하자.
죽음과 흡사한 시술의 앞에 레드그레이브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리가 없었다. 휴식할 수 없는 이가 맞는 휴식이었다. 의료용 침대 위에서 그녀는 옷을 벗고, 몸까지 가볍게 벗어내 뿌리를 뽑아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레드그레이브는 드디어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들어낸 뇌가 수조 속에서 부글거리는 거품을 내며 까무룩 무의식으로 가라앉았다. 이 휴식은 기이하게도 휴식이라기에는 너무도 달콤했다.
무엇도 없었다. 온 곳도 갈 곳도 없이 불씨가 피었다. 마침내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노인이 잊은 꿈을 헤맸다.
약속과,
꽃과,
웃음과,
빛
정처 없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당초 생각보다 긴 여섯 세기가 지나 있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변해버린 세계를 이해하는 데 다소 애를 써야만 했다. 그녀가 구석구석 다스렸던 세계로부터 긴 세월이 지나 있던 것은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났다. 그녀는 이 세계를 다시 주인으로서 다스릴 것이므로 세계에 더는 없는 것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사라진 지도 속 지명이나, 엔지니어의 부패와 함께 사라진 통치기구들, 맥이 끊겨 잊혀버린 자동기계의 기술, 없어진 기념일 혹은 수백 년 동안 남아있을 리 없는 어느 책상의 서랍 같은 것들.
그럼에도,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수백 년도 더 전에 헤어진 사람이고 수억 일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인데 그녀는 간혹 그를 사랑했다. 사랑과 사랑은 그녀가 알게 혹은 모르게 움트고 피어나 그녀의 세상에 갖가지 꼴로 현현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세상을 위해 개발했던 고대의 기술을 계속해 찾았다. 묻힌 보물을 찾는 방랑객처럼 새로 만난 세계 곳곳을 뒤척였다. 덕분에 지상에는 다시금 오토마타가 퍼져나갔으나 또한 레드그레이브는 폭주하는 오토마타를 지극히도 싫어해 강퍅하게 제한했다. 자꾸만 기억이 이 세상을 지배했다. 여섯 세기 전 너무 늦어 조촐한 장례 날, 그녀의 손 안에서 퍼져나간 사랑이 부득부득 세상 곳곳에 안착해갔다.
시간에 삭아 헤진 줄로만 알았던 사랑의 산발에 뇌는 자꾸 뒤늦게 깨달아 흠칫 추억을 떤다. 수조 속에 보글거리며 기포가 오른다. 뇌가 된 여자는 아마 자신에게 실체가 없기에 실체 없는 관념을 유영하게 되는 것이리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주문한다. 몇 가지 특정한 요구도 함께였다. 사람의 꼴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몸이라면, 사람 간의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 다시 자신을 던지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그간의 형용할 수 없을 그 모든 지난 일들 다시금 겪을 것 없으리라고.
살이 없는 허벅지에 센서가 뻗었다. 체온 없는 손가락에 회로가 설치되었다. 모터가 허리를 지탱하고 몸 구석구석에 체액이 퍼졌다. 가냘픈 흉부부터 쇠로 되어 싸늘한 발가락 끝까지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신경이 닿았다. 그리고 드디어 뇌가 연결되었다. 인조 뉴런과 균형모듈과 수조를 전전하던 척수가 서로 연결되어 신경에 불을 지폈다. 수백 년 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땅을 디딘 발바닥이 갈가리 조각날 것 같았다. 옷에 닿은 부분마다 델 것 같았다. 관절 하나하나가 떨어질 듯 무거웠다. 모든 감각이 너무나 생소하고 너무나 버거웠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다. 구역질이 일었으나 토악질할 식도가 없었다. 공기가 전신을 바늘처럼 찔렀다. 레드그레이브는 이 세상을 버티지 못해 휘청거렸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탈진과 발작의 경계를 헤매던 신경이 자체의 안정을 위해 그녀의 기억 중 가장 익숙하고 가장 편안한 감각을 재생했다.
제일 먼저 손이 무언가에 감싸이는 느낌이 났다. 레드그레이브는 이 압력과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 발끝에서 고통이 가시고 정원의 잔디가 발바닥에 밟히는 듯했다. 누군가 뺨에 꽃잎을 가져다 대는 느낌이 나 간지러웠다. 다기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끝에 홍차 향이 스몄다. 청각 모듈에 낮은 목소리가 맺혔다. ‘나는 언제고 너의 편이야, 레드그레이브. 약속해.’ 곧 온몸이 따뜻해졌다. 연쇄하는 폭죽같이 옮겨붙는 들불같이 이제는 없는 것이 거듭해 발발한다.
대체가 온 곳도 갈 곳도 없는 것. 이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 레드그레이브는 거울에 손을 올린다. 반지르르한 면을 찬찬히 쓰다듬는다. 그러자 먼 약속처럼 기계가 손을 맞잡는다.
아. 없는 것이 실체를 보이니 이상하건만 따지고 보면 사랑은 이유도 없고 처음부터 경우도 경위도 없었다. 애초에 없던 것이니 없어졌다고 바뀔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또 문득 그를 사랑하고 만다. 수백 년 만에 어느 사랑의 이름이 거듭 불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