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리스마스 베이비

“너는 아기예수님의 은총으로 태어났단다.” 어머니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어. 너는 그렇게 특별하고 귀한 아이란다.”

“그러면 누나랑 형은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던 의문을 무심코 내뱉자, 어머니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곤란한 듯이 웃었다.

“네 누나랑 형은, 그냥 낳았지.”

열여섯 살인 누나는 공부를 잘했다. 누나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가족들은 물이며 군것질거리를 챙겨주었고 누나는 그런 것을 가방에 쑤셔 넣고 금방 다시 나갔다. 그렇게 누나가 나가고 나면 가족들은 학원이니, 도쿄대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 열세 살인 형은 운동을 잘하고 발이 넓었다. 언젠가는 집안의 사업을 이어받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츠키 집안의 막내인 슈는, 여섯 살이다. 형과는 일곱 살 차이가 나는 막내둥이. 언제나 형과 누나를 챙기는 어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서, 슈는 곧잘 목놓아 울었다. 큰 소리로 울수록 부모님은 다급히 달려와서 슈를 보아준다.

“이제 괜찮니, 슈?”

“훌쩍……, 네.”

“응. 이제 울지 말고 의젓하게 있자, 착한 아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손으로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고는 뒤돌아 서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얼핏 들었던 것도 같고, 정확히 듣지 못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해한 뜻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귀찮아.

그래서 이츠키 슈는 여섯 살에 보란 듯 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의 뜻을, 당시 슈는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어렴풋이는 이해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얻은, 바라지 않았던 애물단지. 작고 귀여우니 예뻐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어서 가끔은 귀찮은. 슈는 이츠키 가의 사람답게, 혹은 그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영리했으므로 어른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렇게 슈는 ‘귀찮지 않은’ 아이가 되었다. 얌전하고 영리해서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 그게 슈가 주로 듣는 칭찬의 내용이었다.

“오늘도 착하게 잘 지냈구나. 슈는 워낙 혼자서도 잘하니까 다행이지.”

“네.”

그렇게 부모님이 일을 나간 낮 동안 슈는 집에서 누나가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들을 들고 인형놀이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 하나를 돌보는 소꿉놀이를 했다.

 

 

 

2. 혼자서도 잘하는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법은 없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는 특히나 더 그랬다. 그래서 이츠키 슈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낯으로 처음 말을 나누는 아이의 앞섶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으씨, 더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야, 괜찮냐? 그만 울어.”

지금 괜찮아 보이냐! 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말 대신 눈물만 다시 엉엉 치솟을 뿐이었다.

“너 진짜 울보구나.”

그 말이 억울해서 슈는 다시 훌쩍훌쩍 울었다. 내가,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닌데! 하지만 역시 말이 나오는 대신 뜨거운 눈물만 계속 치솟는다.

“애들이 널 궁금해해서 그래. 이쪽에서 제일 큰 집에 복숭아같이 생긴 애가 사는데,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잘 분간도 안 가고 집에서 인형놀이만 한다고. 근데 너는 애들이 말을 걸어도 상대를 잘 안 했잖아.”

“그럼, 훌쩍, 내 탓이란 거야? 상대? 담 너머로 돌이나 던지는데?”

“돌? 심한데? 야. 너네 엄마아빠한테 일러라.”

“아, 안 돼.”

“왜?”

슈는 혼자서도 잘하니까. 줄곧 듣는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튼, 안 돼.”

빨간 머리카락이 이쪽저쪽으로 뻗친 사내아이는 슈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 어쩌게? 너 사람 곤란하게 만든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뭐? 너, 도와준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래?”

“……훌쩍, 도와달라고 안, 훌쩍, 했거든. 훌쩍. 그래도 고마워.”

슈가 계속 훌쩍거리며 눈을 훔치자 아이는 한숨을 푸 내쉬었다.

“뭐. 됐고, 지금 문제는 저 인형인데. 손이 닿으려나?”

아이가 가리키는 큰 나무 위에는 아까 다른 아이들이 빼앗아 던진 슈의 봉제인형이 걸려있었다.

“중요한 거야?”

슈는 마지막으로 눈을 훔치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긴 그러니까 울었겠지. 어, 닿을 것도 같은데…….”

기를 쓰고 나뭇가지로 손을 뻗던 아이가 가까스로 인형의 다리 끝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체중을 실어 잡아당겼다.

“어. 빼냈다! 그런데 왜 이것밖에 없지……. 어?”

자그만 인형 다리를 들고 황망해하던 아이의 지척 앞에, 다리가 찢어져 떨어진 인형의 몸통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파랗게 질린 얼굴로 히끅, 히끅 딸꾹질을 하는 슈가 보인다.

“으, 으, 윽…….”

“야, 잠깐. 야. 설마 또…….”

“으아아아아앙!”

정신없이 눈물이 났다. 서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동네 애들이 괴롭히는 것도, 난데없이 인형을 뺏긴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망가져 버리다니! 우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마저 서러웠다. 아이들이 울보라고 놀리는데 반박할 말이 없다. 아직도 이렇게 울보인 걸 부모님이 아시면 어떡하지. 그 모든 게 서러워서 히끅히끅 울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이가 머쓱하게 등을 쿡쿡 찔렀다.

“야, 그만 울고……. 우리 집에 가 볼래? 고쳐줄게.”

“흐, 흑, 이렇게 찢어진 걸 어떻게 고쳐! 으아아앙…….”

“내가 고치는 건 아니고. 우리 엄마가 바느질을 잘 하거든. 나도 놀면서 자주 바지가 찢어지는데, 엄마가 고쳐주면 감쪽같아. 인형도 금방 고칠 거야.”

“흐윽……. 진짜? 흑, 고칠 수 있어?”

그제야 조금 울음이 잦아드는 슈를 보면서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엄마한테 새것처럼 고쳐달라고 할게.”

확실하게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녀석을 달래고 봐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의 어머니는 기댈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3. 봄

걷는 내내 눈물이 그치질 않아서 어떤 정신으로 그 아이의 집까지 따라갔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긴 길을 걸었고, 길가에는 나무가 많아 새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야트막한 담장을 세운 집이 있었다. 아이는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쩌렁쩌렁 큰 소리로 인사했다.

“엄마! 나 왔어요! 친구도 데려왔어.”

“알았어, 쿠로. 들어와.”

슈는 앞장서는 아이, 쿠로의 눈치를 보다가 쿠로가 어서 들어오라는 듯 눈짓을 하자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 놓인 탁자 앞에는 하얗고 말쑥한 얼굴의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아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가만 들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인형 같네.’

슈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이름이 뭐니?”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슈는 갑작스런 질문에 흠칫 놀라 대답했다.

“이, 이츠키 슈, 입니다.”

“예의 바른 아이구나. 쿠로가 울렸니?”

당황한 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운 티가 나나? 슈는 눈가를 슥슥 비볐다.

“아, 아니에요…….”

“애들이 얘 인형을 뺏었어요. 내가 나무에서 빼내다가 이렇게 찢어졌어. 이것 좀 고쳐줘요.”

쿠로가 불쑥 내민 인형을 보고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인형 곳곳을 엄중한 눈길로 훑어보다가는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리는 슈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중한 물건이니?”

“네…….”

“그러면 최선을 다할게. 반짇고리를 가져와, 쿠로.”

“네!”

신이 나서 달려온 쿠로가 가져온 커다란 반짇고리를 앞에 놓고, 그녀는 엄중한 눈길로 실을 골라 바늘귀에 꿰었다. 슈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녀는 슈를 흘끗 보고는 탁자를 톡톡 쳤다. “여기 앉아서 가까이서 지켜보렴. 소중한 물건이잖니.” 슈가 곧바로 앞에 앉자 그녀는 작게 웃고는 붉은 실 끝에 야무지게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천 끝을 접고 시침질을 했다. 노래처럼 일정한 속도로 바늘을 찌르는 긴 손가락은 마디가 도드라지게 굵었다. 긴 금발이 흘러내려 손끝에 스치자 그녀는 작업하던 손을 올려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슈는 시선을 올려 그녀의 내리깐 눈매와 도자기처럼 창백한 뺨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예쁜 사람이었다. 어느새 인형은 안중에 없었다.

“자, 이렇게 붙이면 될까?”

“……네!”

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금방 사라진 그 미소가 언제라도 다시 떠오를까 슈는 바느질에 열중한 그녀의 얼굴을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고,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모양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작업을 마칠 때까지 웃지 않았다. 역시 인형 같은 사람이었다.

“자, 다 된 것 같구나. 마음에 드니?”

“네……, 고맙습니다.”

슈가 꾸벅 인사하자 빨래를 널던 쿠로가 덩달아 달려와서 고쳐진 인형을 뜯어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나 이런 걸 왜 갖고 노는지 모르겠어. 너, 남자애가 인형 갖고 논다고 애들이 놀리는 거잖아. 너도 로보트나 자동차 같은 거 갖고 놀래? 이런 거, 나무에 걸렸다고 망가지기나 하고 약하고 쓸모없잖아.”

너무한 소리에 반박할 말도 곧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다시 울음이, 날 것 같은데, 지금 울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꾸욱 다문 슈의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하니까 지켜주어야지.”

“왜요. 보통 남자애들은 센 걸 좋아해요.”

“그러면 너는 슈를 왜 도와줬니?”

그러자 쿠로는 잠깐 입안에서 소리를 우물거리더니 발개진 얼굴로 신기해서, 라든가 예뻐서, 친해지고 싶어서,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녀는 빙그레 웃더니 곧 다시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틀린 소리였다는 걸 너도 알지. 그럼 슈에게 사과해, 쿠로.”

“미안해.”

“잘 했어.”

조금 충격을 받아 굳은 채로 서 있는 슈에게 그녀가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쿠로랑 마당에서 놀고 있으렴. 간식이라도 해 줄테니까 먹고 들어가.”

그렇게 말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슈를 보고 그녀가 짧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여자의 얼굴을 보며 슈는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와주어서 고맙다? 바느질이 신기하다? 하지만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영 엉뚱한 소리였다.

“나는 약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가만 웃었다.

“슈.”

짧게 부르는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오래 남아 울렸다.

“약한 건 나쁜 게 아니야. 반드시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하지만…….”

“자, 이 인형을 봐. 약하지만 이렇게 곱고 예쁘잖니? 너는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

“네…….”

“그래, 그렇지만 얕보일 필요도 없겠지. 너는 부당한 일을 겪었으니까……. 그래도, 슈. 당장 외면받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잊지 마렴. 음, 조금 어려운 말이었을까?”

“아뇨.”

그러자 그녀는 다시 웃었다.

“슈는 똑똑하구나……. 그러면 부탁을 좀 할게. 쿠로랑 같이 마당에 가서 열매를 좀 따올래? 아직 조금 덜 익었지만, 아삭한 것도 아삭한 대로 맛있단다. 먹을 만할 거야.”

쿠로와 함께 마당으로 나가니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무에는 붉고 푸른 열매가 매달려 있고, 오후의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진다. 정원에는 나뭇가지 끝부터 담장을 타고 오른 덩굴과 바닥까지 온갖 꽃이 만발했다. 시큼한 풀 냄새, 열매 냄새, 그리고 달짝지근한 꽃향기가 뒤섞여 따뜻한 기운과 함께 코끝을 찔렀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마당으로 나가며 연 문에서 바람이 불어 긴 금발을 흐뜨러뜨린 그녀가 있었다. 웃음기 서린 얼굴 곁으로 가닥가닥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슈는 생각했다. 봄이구나.

 

 

 

4. 불변

슈는 봄이 깊어져 여름이 되고, 가을이 지나고 다시 다음 봄이 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렀다. 조금치 떨어진 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마당을 뛰어다니고, 산을 오르고 개울가에서 장난을 치고 집안에서 간식을 먹었다. 그녀가 고쳐준 인형은 여전히 서랍에 간직해 두었지만 예전처럼 열심히 인형놀이를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 어떤 인형보다 고운 것을 알았으므로. 슈는 마당에서 꽃을, 산에서 열매를, 개울가에서 조약돌을 주워서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말간 얼굴에 잠깐씩 스치는 미소가 좋았다. 그녀는 늘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녀는 도자기 인형처럼 곱고 곧게 머무르는 것이 더없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왜 그랬을까? 그때를 돌이키면 이츠키 슈는 자신이 정말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한다. 친구의 일을 도와주는 쿠로를 남기고 혼자 먼저 집에 들어가던 때,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손에는 색이 선명한 꽃을 세 송이 꺾어 들고, 받아든 당신의 미소를 상상하며 배시시 웃으며 돌아가면서도, 그것이 어떤 방향의 감정인지 명확히 갈피를 잡지는 못하던 행복했던 어린 시절.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고 보니 집안은 물 먹은 듯 조용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은 그녀는 인형처럼, 정말로 인형처럼 미동도 없었다.

“주무세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제는 정말로 그쳤다고 생각한 눈물이 솟는 것이 먼저였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슈는 입술을 짓씹으며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고 그녀의 어깨를 흔들고 수건에 찬물을 적셔 얼굴에 대었다. 그대로 얼마나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슈……?”

“네. 저예요. 주무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저 119를 불렀는데…….”

“고마워.”

그녀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의자에 반쯤 쓰러지다시피 휘청거리며 앉았다.

“괜찮으세요?”

“응……. 너무 걱정하지 마, 원래 가끔 이러니까.”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슈에게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 아니, 슈? 나는 원래 무술을 하던 사람이었단다. 내 입으로 제법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실력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근육이 약해지는 병에 걸렸어. 완전히 치료할 수도 없고, 병원에 가도 증세를 늦출 뿐이고……. 크게 운동을 하는 것도 어렵고, 무리하면 이렇게 쓰러지고 마는구나.”

“몰랐어요…….”

“그렇겠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싫지 않으세요?”

“확실히, 못 하게 된 것은 많구나. 산을 오르기도 어렵고, 너희와 더 놀아 주지도 못하고, 그래서 이렇게 수예를 시작했고……. 하지만 슈, 내가 전에 말했지.”

그녀가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비밀을 나누는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슈가 의자를 빼어 앉자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기울이고 천천히 말했다.

“약한 건 나쁜 게 아니란다. 반드시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이미 알고 있지, 슈?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안에 있어.”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봄처럼 따뜻하고, 목소리는 새벽처럼 청량하다. 방금까지 휘청이다가도 꼿꼿한 태도로 불변과 긍지를 말하는 그녀는 닦아 놓은 자개처럼 파르랗다. 그리고 부시게 눈물겹다. 그래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당신의 말이 옳았구나.
약하고 아름다운 것은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었구나.

그날부터 슈는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그녀에게 바느질과 자수를 배우고, 그만 좀 뛰어놀라고 꾸지람을 듣고서 나갈 때에는 머문 곳에서 꼭 가장 예쁜 것을 골라서 집에 가져갔다. 꽃을 손에 받아들고 하얗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가슴에서 뭉근한 것이 피어 몸을 꽃처럼 채웠다. 꽃 몇 송이를 가져다주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개울가에서는 가장 예쁜 조약돌을, 산에서는 흐드러지게 핀 꽃을 모아 당신의 눈앞에 화단을 만들어 주고 싶었고 학교와 책에서는 진리를, 공연장에서는 화음을 보석상에서는 황금을, 그리고 연회장에서는 비단과 웃음과 향기를, 이츠키 슈는 그녀에게 이 세상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녀는 태양이고 세상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았다.

사람들은 자라며 변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건만 그녀는 집에 뿌리가 깊이 박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내내 늘 그렇게 파르랗게 아름다웠고 그러므로 슈도 변하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지고 아침마다 면도를 하기 시작한,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하얗고 마르고 아직도 인형과 바느질을 좋아하는 이츠키 슈는 가끔 생각한다. 누군가 이런 것을 알게 되면 내게 묻겠지. 그렇게 어려서 시작한 맹목이 사랑이냐고. 그러면 대답해야지. 이미 스스로 수천 번이나 물었으나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느냐고.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은 당신의 웃음의 파편인데.

아침마다 키를 쟀다. 얼른 자라고 싶다는 소년의 욕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슈는 식사를 많이 하지 않고도 위로 잡아 늘인 것처럼 빠르게 자랐다. 그리고 마침내 슈는 키 따위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키가 크든 작든, 어차피 감히 태양을 넘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태양을 바라보며 걷는 것만은 할 수 있겠지. 세상에 언제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아침마다 해가 뜨고 지고, 이 별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마음속에는 당신이 있는 것. 이츠키 슈는 강박적으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아름다운 당신에게 걸맞게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만을 솎아서 좁은 무대에 꽉꽉 눌러 담아 세상의 보물들을 당신의 앞에 선보일 요량이었다.

그러므로 슈는 먼 학교로 진학해 떠났다. 꿈꿀 수 없는 것은 감히 꿈꿀 수조차 없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놀라움은 주고 싶었다. 적어도, 언제까지나 조그만 아이이고 싶지는 않았다.

 

 

 

5. 일몰

오랜만에 들렀을 때 그녀는 눈에 띄게 마르고 쇠약해져 있었다. “너무 놀라지 마렴. 예상하고 있었어.”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병은 고쳐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왜 그런 표정을 하니.”

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꼭 예전처럼 작게 웃었다.

“고마워, 슈.”

“저에게 고마워하시면 안 돼요. 저는 해드리고 싶은 만큼 해드리지도 못 했고, 제가, 어떤 생각을…….”

“이렇게 찾아와준 걸로 충분해. 그러니까, 슈.”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했다.

“가끔 이렇게 찾아와주겠니? 나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

키류 씨는 언제나처럼 일로 바빴고, 쿠로는 싸움에 휘말려 있었고, 이츠키 슈는 어린 쿠로의 여동생과 함께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슈는 여전히 그 한순간 한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얼마 후 집에서는 한차례의 큰 울음과 고함과 멱살과 싸움과 비명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6. 잔해

암흑 속에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것들만이 남았다. 노력한 것과 쌓아온 모든 것이 빛을 잃고 껍데기 같은 자신이 남았다. 그렇게 방황하던 학교에서 금발의 소년을 보았다. 작고, 예쁘고, 웃는 얼굴이 그녀와 닮은 아이.

엉망진창이 된 학교의 시스템에 난색을 표하는 아이를 보면서 슈는 생각했다. 저 애를 도와준다고 해도,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언가를 만들고 모으고 애정을 두는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젠가는 사라질 텐데. 더 생각하기 전에 발이 먼저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약하고 아름다운 것은 지켜주어야지.

 

 

 

7. 일상

아침에는 자명종을 누르고 덜 깬 눈으로 커피를 내리고 계란을 부풀려 데운 다음 카게히라를 깨우는 것이 순서이다. 작년에 학원 입학을 권유해 데려온 아이인데,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양말을 뒤집어서 내놓으므로 오늘 아침도 꾸중을 해야만 했다. 카게히라가 먹기 좋게 살짝 태운 ― 어쩐지 음식이 어딘가 망가져 있어야 잘 먹는 녀석이었다 ― 달걀과 베이컨을 먹고, 함께 등교하며 옷깃을 고치라고 한참 잔소리를 하다 보면 건너편 골목에서 니토를 마주치고는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셋이 함께 수예부실로 먼저 들어가 몸에 이상은 없는지 점검한다.

“오늘은 정말 상태 좋다니까, 스승님.”

“그래도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잠자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좋을 거다.”

“그러지 말고, 스승님도 창가에 와서 햇빛이라도 쐬자. 봐, 벚꽃이 잔뜩 폈어. 이제 곧 축제를 시작하겠네.”

“흥, 인형 주제에 제법 기어오르는구나. 뭐 좋아, 보기 나쁘지는 않은 광경이구나.”

문득문득, 그들의 미소와 미소가 잔해 같은 슈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래서 진심으로 마주보거나 똑바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당신이 없는 세상의 공기는 독소 같고 당신의 부재를 떠올리는 매 순간 가슴 바닥이 무너질 것 같아. 그래도 이 세상 약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내버려 둘 수 없었어. 내버려 둘 수 없었어. 그리고 소중해졌어.

 

 

 

8. 비명

학교 최강의 유닛이라고 자부하던 Valkyrie의 노랫소리가 비명 같았다. 금이 간 유리나 앤틱 인형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나듯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청춘의 파편에 가슴께가 찔려 피와 눈물이 흐른다. 높이 있는 것일수록 더 빠르게 추락한다.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현실감이 없어 도리어 황홀하도록 비참한 순간에 학생회장이 손짓했다. 그리고 천사 같은 얼굴로 웃었다.

“내 뜻대로 춤춰주어서 고마워.”

그리고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원망해? 내가 너희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알고 있지, 이츠키 군? 너는 원래 망가져 있던 사람이고, 나는 거기 살짝 힘을 주었을 뿐이야. 굳이 내가 밀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깨질 너희였어.”

대답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대기실을 나오자 니토와 카게히라는 눈치를 보며 선뜻 다가오지 못한다. 그 머뭇거림에서 슈는 자신을 읽었다. 노래를 부르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연습해 훌륭한 노래를 해낸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부르지 않게 시킨 덕분에 서로 화음이 전혀 맞지 않는 노래였다. 깨어지는 비명 같은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렇구나. 나는 지켜주고 싶다는 명목하에 너희를 깎아내고 내 멋대로 재단하고 있었구나.

내가 너희를 망쳤구나. 이미 내 인생을 망친 주제에 남을 이끌려고 들어서 너희까지 망치고 말았구나.
슈는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죄송해요.

 

 

 

9. 생일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용서받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이츠키 슈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음 생일을 맞았다. 그리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들이 이름을 얻었다. 세상에 다시 아름다운 것들이 생겼고, 어쩌면, 놀랍게도, 다시 무언가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들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에 놀라서 눈을 뜨니 미카가 요란하게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뭐……뭐냐, 카게히라!”

“생일 축하해, 스승님!”

“제발, 좁은 장소에서 폭죽 같은 걸 터뜨리지 말라는 거다!”

답지 않게 새벽에 일어난 미카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어디서 사왔는지 모를 케익을 먹고 교실에 들어가니 급우들이 한 마디씩을 건넨다. “여, 이츠키. 생일이라며.” “나이를 먹었으면 이제 교복도 교칙에 맞게 입는 게 어떠냐.” “와하하! 생일 축하한다, 이츠키!” “후후. 이츠키 군은 인기가 많구나.” 듣기 싫은 목소리가 있었기에 무시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는다.

점심때 즈음,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오니 책상 위에 선물 꾸러미가 놓여있었다. 누가 준 거지?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을 하자 카오루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뒷문 쪽을 가리켰다.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나즈나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선전포고하듯이 씩씩하게 말한다.

“생일 축하한다고. 이츠키. 고맙다는 말은, 예전에 했던 것 같고.”

반쯤 소리지른 나즈나는 곧 자기 반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검은색에 붉은 리본을 단 포장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치아키가 시끄러운 목소리로 주변을 맴돈다.

“이츠키, 지금 우는 건가? 하하, 감동받은 남자의 눈물은 정열과 같지! 소리내어 울어라, 이츠키!”

“시끄럽다, 모리사와. 울고 있지도 않고, 제발 네 자리로 돌아가…….”

“하지만, 지금의 느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닌가? 언제까지 혼자서만 감당하려고 하지 말라고. 너는 흔들려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남자고,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이렇게 괜찮아지지 않았나.”

“……그렇군.”

목이 메었다. 슈는 고개를 들어 먼 창밖을 내다보다가 눈이 부셔 손으로 눈 위를 반쯤 가렸다.
여전히 태양은 찬란하게 빛나고, 이 세상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10. 슈

너는 예수님의 은총으로 태어났단다. 너의 이름은 주님을 부르는 호칭과 같았지. 너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었고 너를 배신한 사람도 이해하고 약한 이들을 지키려 들었지. 그래서, 슈(しゅう). 너는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전 날에 태어났단다. 너는 신으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네가 자신의 약함에 절망해 쓰러져 죽고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것을 알아. 너를 지금까지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나는 잘 알아. 너는 총명하니까.

그러면, 슈. 부탁을 좀 할게. 쿠로랑 같이 세상에 나가서 열매를 좀 따먹겠니? 지금쯤이면 잘 익었을 거야. 설익은 것도, 씁쓸한 것도 나름대로 맛있단다. 먹을 만할 거야.

어느 병

#주간_미카슈 주제 : 애정
슈그녀 기반의 미카슈.

 

***

 

이츠키 슈는 작은 것들을 좋아한다. 키가 작고 채 팔다리가 여물지 못한 어린아이. 조밀하게 잡아 실을 박은 공단 프릴. 가느다란 은사를 정교하게 엮은 토션 레이스. 그 얼굴 안에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도자기 인형. 바람이 훅 불거나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작고 가볍고 바람에 쉽게 흩날리는 것들.

본래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고 존재가 흐릿해서 곧 사라지더라도 크게 이목을 끌지 못할, 금방 사라질 것들을 사랑하는 습관. 카게히라 미카는 그런 습관은 질병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약한 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게 되고, 가치 없는 것에 집착한다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랑하는 것이 스러질 때마다 상처받고. 그런 식으로 인생에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이라면 애정보다는 질병에 가깝겠지.

아마도 이 질병은, 전염성이었던 모양이다.

***

사자를 동경했더니 털을 벗고 작은 고양이가 된 꼴이었다. 그것도 처량하게 울며 길을 떠도는 고양이. 동경해 올려다보던 사람을 곁에서 보살피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가령, 금발머리의 여인을 작고 소년 이츠키 슈가 얼마나 사랑했는지의 여부 같은 것들. 어린아이의 부인에 대한 짝사랑이라니 흩날리는 눈송이보다도 의미없는 것이었을 텐데, 이츠키 슈는 이렇게 멀쑥하게 커서 끝끝내 그녀를 자신보다 훨씬 작은 존재로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새싹이 고목이 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거대하게 자라난 사랑. 일생을 꽉 메운 그런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 따위는 정말로 눈송이처럼 사소한 것이 틀림없어서, 카게히라 미카는 가끔 사랑하는 상대에게 묻고 싶어졌다. 스승님, 스승님은 이런 걸 어떻게 견뎠어?

그해 겨울은 혹한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부쩍 추워진 탓에 슈의 몸상태가 좋지 못해서 ― 물론 날씨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더 클 거라고 미카는 짐작했다 ― Valkyrie의 연습은 한참이나 소강상태였고 두 사람은 수예부실에서 모포를 덮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슈는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옆에 두고 홀짝이며 의상을 만들고는 했고, 미카는 차를 끓여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게나 섬세하고 부서질 것 같은 사람인지 이전에는 몰랐지.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사랑하는 병이 옮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카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바느질에 열중한 스승님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도중 슈가 갑자기 옷감을 탁상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을 반쯤 열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해 창문 밖은 흰빛이 완연하게 빛나는 설국이었다.

“얼레, 언제 이렇게 눈이 내렸대. 스승님 눈싸움 좋아하나?”

“별로.”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아는 사람의 장례식날, 눈이 내렸어.”

그렇게 말하며 슈는 아까까지 바느질을 하던 손가락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눈송이가 붉은 손끝에 스치다가, 체온에 닿아 곧 녹아내린다.

“그때도 꼭 이렇게 폭설이었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묘소에서 장례 절차를 밟는 데 애를 먹었어. 세상 모든 게 서럽더군. 눈 따위가 펑펑 내려서 그분의 장례를 방해하는 것도 서럽고,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어버린 것도, 내 기원이 조금도 닿지 못한 것도 서럽고……. 그리고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오후가 되어서 햇빛이 내리쬐자 눈이 또 금방 녹아버린 것도 서럽더군. 처음부터 내 마음은 덧없는 거였구나. 보답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나 혼자 바라보고 기리고 싶었는데, 그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거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전부 눈처럼 허망하게 녹아버린 거였구나.”

눈에 반사되는 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얼굴로 뇌까리는 낯빛이 창백했다.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슈는 멍한 표정의 미카를 돌아보고는 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잔뜩 횡설수설했군. 이렇게 말해봐야 너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잊어라.”

“그치만, 스승님.”

미카는 이를 악물었다.

“눈도 오래 쌓이면, 얼음이 되잖나. 무게가 실리면, 가지가 부러지거나 천막이 무너지거나 하기도 하고.”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덧없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하면 어때. 눈이 많이 내렸으면, 누군가는 그 흔적을 좇아갈 수도 있는 거잖아. 스승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말을 마치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해받을 리가 없다. 이 마음은 부인을 사랑하는 아이만큼이나 처량하고 손끝에서 방금 녹은 눈송이만큼 덧없는 것이다. 십년간 외사랑을 간직한 사람에게 고작 한두 해 곁에 있던 사람의 마음이 닿을 리 없다. 내게는 녹지 않는 폭설이지만 당신에게는 작은 눈송이일 뿐이겠지.

바라보는 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있을까. 알리고 싶었다.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적어도 응답을 느끼고 싶었다. 눌러둔 마음과 함께 욕심이 가슴 속을 뭉텅뭉텅 비집고 나왔다. 몇 년이고 당신을 지켜본 내 무게는 이제 당신에게 조금쯤 얹혔을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미카는 겨우 눈을 들어 상대의 표정을 확인해 보았다.

슈는 웃고 있었다.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이. 눈매가 둥글게 휘고 청보랏빛의 눈동자가 빛나고 둥글게 올라온 뺨이 발갛다. 감사와 연민과 감탄이, 뭉근한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 오롯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눈앞이 아찔하고 눈시울이 뜨거워 미카는 눈을 들었다.
창 너머로 잔뜩 쌓인 눈의 무게에 휘어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그 추운 겨울에는 못된 전염병이 돌았다. 서로를 연민하고 사랑하는 병이 옮았다.

모순

#주간_미카슈 주제 : 모순

NTR, 앵스트, 약간의 수위성 주의. 커플이 아닌 것 같지만 마음의 눈으로 읽읍시다

 

***

 

어릴 적 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어들은 늘 비슷했다. 아름답고, 인간을 쉽게 사랑하고, 세상에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미지근한 물을 채운 욕조에 손을 담그고 슈의 하얀 살결을 닦아내면서 미카는 이야기 속의 인어들을 떠올렸다. 세상이 그리운 듯, 세상을 떠날 듯 야트막한 물 속에 잠겨 지느러미를 꿈틀대는 인어들. 뽀그르르. 욕조에서 포말이 일었다. 민감한 부위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긁어내자 슈가 읏, 하고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제지하지는 않는다. 미카는 허벅지 안쪽의 붉은 자국 위에 비누를 대고 문질렀다.

“안 지워지네.”

“쯧. 웬만하면 자국은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 남자랑은 오래 안 만나는 게 낫겠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응, 스승님이 알아서 하겠지.”

스승님은 완벽하니까. 미카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자 슈가 문득 가려운 듯 물 속에 잠긴 다리를 꼬았다. 지느러미를 꿈틀대듯이. 아름답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고 세상에서 금방 떠나버리는 인어들. 미카는 손에 꽃 향기가 나는 거품을 묻혀 남은 정사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혹여나 거칠게 만지면 당신의 비늘이 상할까, 정성스러운 손길로 닦아내었다.

이츠키 슈가 느닷없는 커밍아웃을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남자가 더 좋아. 헤에, 그랬구나. 미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람을 만날 거다. 공개연애를 한다는긴가? 아이돌 활동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섹스하고 싶은 거야.”

이츠키 슈는 보통 아홉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나가서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들어왔다. 가끔은 한시나 두시까지 늦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카게히라 미카는 사탕을 씹거나, TV를 보고 청소를 하면서 새벽을 샌다. 심야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없이 웃다가, 벨이 울리는대로 현관으로 달려가서 벌컥 문을 열면 선글라스를 쓰고 화보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슈가 문앞에 있었다. 미카가 손을 내밀면, 슈는 미카의 부축을 받고, 꼿꼿이 서 있던 품새가 곧바로 무너진다.

“무리한 거 아니가?”

“…친구와 같이 오겠다는 제안이 와서 받았는데. 지독했어.”

“싫으면 안 받으면 되잖나.”

“싫지 않으니까 받은 거다.”

아니, 하고 싶었으니까 받았지. 미카는 더 말하지 않고 욕실 불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몸의 이츠키 슈가 따라들어온다. 욕조에 받아둔 물에 첨벙, 주저앉은 슈가 몸을 늘어뜨리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화나지 않아, 카게히라?”

“윽, 냄새……. 스승님, 술 마셨나? 어쩐지 오늘따라 더 늦더라.”

“같은 그룹 멤버인데 밤마다 섹스하러 다니고. 그것도 매번 다른 남자들이랑. 기분나쁘지 않냐고.”

“이상한 소리네. 고등학생 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스승님이 어디서 뭘 하든, 나한테 스승님은 최고다. 천재고, 완벽이고,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사람이다.”

“남의 흔적을 닦으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그런 건 상관없대도. 어쨌든 우리 스승님이잖아.”

슈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 너는 내가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 난 그래서 무서웠어.”

“스승님 말은 고등학생 때도 그랬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스승님 일에 따지고 들 수는 없잖나? 그치만, 스승님 몸 걱정이 되긴 해. 요새 너무 험하게 하는 것 같은데, 좀 쉬면 안 되나?”

“해도해도 채워지지 않아서 그래.”

“으응, 그럼 스승님이 알아서 하겠지.”

슈는 눈살을 찌푸렸다. 뜨거운 물을 채운 욕실이 온통 더운 증기로 텁텁해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일어나서 대충 몸을 닦는데, 미카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스승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기다.”

 

그날 밤 침실에는 파자마를 입은 미카가 쿠션 몇 개를 들고 나타났다. 헐렁한 파자마 자락을 팔락거리며 몽실몽실 솜이 빵빵한 쿠션을 슈의 몸 주변에 잔뜩 가져다 놓는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냐?”

“오늘의 스승님은 왠지 혼자 둘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미카는 슈의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괜찮지, 스승님?”

“괜찮아.”

등 뒤에서 금방 잠든 미카가 색색 뱉는 숨이 닿는 것을 느끼며, 슈는 계속 주문처럼 되뇌었다. 괜찮아. 지금 이대로 괜찮아.

 

다음 날은 모처럼 스케쥴이 없는 날이어서 아침부터 청소를 했다. 이불빨래를 하고, 비누거품을 내서 욕실을 닦고, 서로 장난으로 거품을 얼굴에 묻히다가 웃어버리고, 같이 손을 잡고 청소기를 돌리고, 노곤노곤하게 지친 밤에는 배달음식을 시키고서 TV에 나오는 고전 로맨스 영화를 틀고. 귓가에 샹송이 들리고 흑백 화면의 불빛이 얼굴 위에 아른거리는 동안 미카가 오늘은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슈가 쿠션을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오늘은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씩 웃자 미카가 영문을 몰라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바보처럼 헤헤 웃는다. 뺨을 살짝 꼬집자 입술을 삐죽이다가도 뭐가 그리 좋은지 곧 다시 하얗게 웃는다. 지직거리는 TV화면이 미카의 웃는 뺨 위에 아롱거리는 것을 보며 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은 나는 연애도 섹스도 필요없었던 거지. 너의 몇 번의 눈길, 몇 번의 손길. 사실은 그거면 넘치고도 남아서 울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난 그게 무서웠던 거지.

계절

#주간_미카슈 주제 : 계절

저번주 주제였는데 계절감은 워낙 좋아하는 소재라 놓치고싶지 않아서 ^^; 괜찮겠지요.. 계속 참여에 의의를 두는 정도로 단문입니다.

 

***

 

지하 라이브하우스가 툭탁거리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 대기실 벽 윗쪽으로 난 창문에 네모나게 재단한 에어캡을 대던 미카가 흘끗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안 비뚤어졌나?”

“왼쪽을 조금 더 올리지……. 좋아. 나쁘지 않군.”

슈가 찍 소리나게 테이프를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스승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알았대? 스승님네 집은 거 뭐냐, 반듯한 저택이잖아. 이런 잡일은 한 번도 안해봤을 것 같은데.”

“이러고 있는 게 다 네 녀석 때문이잖나. 아이돌의 기분은 체력 관리인데, 아무리 날씨가 쌀쌀해졌다고 해도 잔기침이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잠깐 기침했다, 잠깐. 끄응, 솔직히 스승님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은데…….”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제왕은 제왕이니 제왕인 거야. 이제 다 끝났으니 저기 불이나 켜거라.”

“으응……. 뭐, 스승님은 빵만 먹고서도 라이브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니까 반박할 말이 없고마. 난로는 또 어디서 구해왔대.”

미카가 허리를 굽히고 한참을 끙끙대자 대기실 소파 옆에 있던 난로에 불이 들어왔다.

“스승님도 그만하고 이리와서 앉아라.”

미카가 옆자리를 두드렸다. 슈가 묵묵히 따라 앉기 무섭게, 방의 불빛이 몇 번 깜박거리더니 어둑해졌다.

“전등을 갈아야겠군.”

언제 날이 저물었는지 벌써 바깥은 어두웠다. 타닥, 타닥 붉게 타오르는 난롯불이 안 그래도 빛 없는 지하에서 가장 밝은 불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께 내일 하교하면서 사오자. 근데 난롯불도 좀 불안한 것 같다?”

“땔감을 더 넣어야겠구나.”

“어, 잠깐만 기다려봐라.”

미카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대기실 앞에는, 양손 가득 마른 낙엽더미를 모아들고 온 미카가 있었다.

“이 앞에 잔뜩 떨어져 있던 게 생각났다. 이거면 되겠지.”

얼굴에 지푸라기를 묻힌 채 환하게 웃는 미카를 보면서 슈는 혀를 쯧 차고는 뺨에 손을 올려 풀을 떼어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한두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슈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카에게서 낙엽더미를 받아들었다.

“손이 차구나. 내가 나갔다 올 걸 그랬군.”

“괜찮다.”

집게로 난롯불에 마른 낙엽더미를 밀어넣는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낙엽이라니, 벌써 가을이구나. 언제 이렇게 금방 계절이 바뀌었는지 모르겠군. 시간도, 벌써 밤인가?”

두 사람은 어둑한 방에서 나란히 난롯가에 앉아 불빛을 쬐었다. 묘하게 고즈넉한 방에서 타닥타닥, 낙엽 타들어가는 소리만 계속 난다.

“모두 어느새 변해버려. 카게히라. 네 녀석도 말이다. 비실비실 말라서 남 눈치를 보면서,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금방 픽 쓰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슈의 얼굴을 미카가 제 어깨 위로 당겼다.

“졸리면 이대로 좀 자자. 어두컴컴한데 난롯불 쬐고 있으니까 노곤노곤하지.”

“……따뜻하네.”

“응. 따뜻하네.”

아직 몸에 밖에 나갔을 때의 한기가 남아있는 채로 그렇게 말했다. 눈앞에 너울거리는 불빛을 한참 바라보던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 자?”

대답은 없었다. 꾹 다문 입술, 감은 채로 가볍게 흔들리는 눈꺼풀, 대답 대신 몸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 소리.

두근, 두근.

타닥타닥 타오르는 난로 불빛이 창백한 얼굴 위에 아롱거리고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떨어진다. 미카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에, 미카는 침묵 아닌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집게를 들어 애꿎은 낙엽더미를 쿡쿡 찔렀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나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 흘러간다. 세상 모든 것이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간다. 계절은 지나가고, 낙엽은 떨어지고, 날이 쌀쌀해지고, 밤은 깊어가고, 우리의 심장이 뛰고 감정도 바뀌어 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