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쇠로 만든 머리가 무겁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시스템이 가동한 이래 언제고 그랬는데도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떠한 감각을 느꼈다. 이 감각이 무언지는 표현할 수 없다. 아무도 그녀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각’이 끊긴 것은 12614437초가 지난 어느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청각 센서를 자극하던 부글거리는 소리 대신 진폭 큰 소리가 울렸다.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그녀는 거꾸로 매달려 있던 유리관에서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더는 거품이 오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몸을 짓누르는 물의 압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각 센서가 처음으로 작동하여 눈앞의 사람을 인식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를 손안에 가볍게 쥐어 들고 있는 남자. 지팡이 끝에 유리 조각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빛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한참이나 유리관의 파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나?”

“있어야 합니까?”

성대를 울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청각 센서가 주제어장치에 전달하는 자신의 목소리는 상대의 것보다 가늘고 높았다. 그녀는 음성의 차이에서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인식했다. 남성과 여성.

“아니.”

그리고 가르치는 자와 따르는 자.

남자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유리 파편 사이에 묻혀 있는 해머를 찾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잡는다는 행위 역시 처음이어서, 그녀는 손잡이를 감아쥔 네 손가락을 원래대로 펴보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해머가 바닥에 떨어지고 유리가 조각나 주변에 튀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해머를 주웠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유리관의 잔해 위에 휘둘렀다.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다시 팔에 힘을 주어 휘두르자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의 얼굴에 발간 생채기가 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 같으니 가르쳐주지. 그건 분노라는 거다.”

가려운 어깻죽지와, 휘둘러 날려버리고 싶은 가슴의 무게와, 피를 닦으며 웃는 남자의 얼굴. 이 모든 것에 시작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일 거라고.

기록

린 슈바르처에게는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아마 8년 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의 기록은 부끄러워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버리지는 못했다. 낡은 노트 안에는 삐뚤빼뚤한 아이의 필체로 어머니가 재배하던 허브나, 엘리제와 함께 만든 눈사람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짤막한 글귀도 함께였다. 도와주세요, 모르겠다, 짜증나, 무서워.

표지에 가죽을 입힌, 아이가 쓰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노트는 어릴 적 설산에서 피투성이로 돌아온 이후 불안해하고 사람을 피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무언가 알 수 없고 불안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마주하는 게 먼저란다. 여기에 일기를 써 보렴.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날그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적으면 된단다.

과연 그때 아버지의 안배가 옳았었는지, 린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떠오르는 대로 노트에 의문점을 적어 나가던 어린 린은 자신에 대해 뭔가 석연찮은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택에서 눈을 뜨고 엘리제를 만나기 전의 기억이 없는 점이나, 인사를 하던 귀족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경멸 어린 수군거림의 실체나, 결국 아버지가 유미르에 틀어박힌 이유에 대해서.

바라지 않은 깨달음에는 질문과, 대답과, 울먹임과, 침묵이 이어졌다. 그날 아버지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겨울날, 제 몸보다 일곱 배는 큰 마수에 대해 느꼈던 뼈저린 공포는 자신에 대한 더 큰 공포가 되었다. 밤마다 어둠을 타고 증식하는 불안에 겁에 질려 떨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기는 한 걸까? 자신이 무언지 모르는데다 가족은 가족이 아니니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때부터 무엇이든 기록해서 정리하는 습관만은 몸에 배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밤마다 기숙사에서 린은 학생 수첩에서 쓸 만한 정보를 옮겨 적었다. 그날그날의 기억, 전투했던 상대나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요리의 레시피나 낚은 물고기의 종류부터 읽은 책과 신문의 내용, 그리고 신경이 쓰이는 온갖 정보까지. 그저 적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책상에 바르게 앉아 펜촉을 잉크에 담가 사각사각 글을 적어나간 후, 짧게 명상을 하는 것이 일과의 마무리가 되었다.

봄과 여름을 거치며 노트의 정보는 점점 풍족해졌다. 정보의 출처인 트리스타 역 근방의 기숙사나 VII반의 교실, 구교사, 혹은 교정 안의 이곳저곳을 볼 때마다 가슴 근처에서 뭉근히 부푸는 것이 있었다. 고양감이라고 하는 감정은 검술을 수련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전념하던 린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놓을 수가 없는 그런 것이어서, 린은 스스로에게 새기듯 일지를 적었다. 학생회의 일을 도우며 만난 사람들,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동료의 믿음. 처음으로 겪어 보는 유대를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적어나갔다.

계절은 깊어져 가을이 되고 노트의 내용은 넘칠 만큼 두터워졌다. 린의 마음도 그랬다. 학원제 무대를 준비하던 밤을 기억한다. 구교사를 빌렸던 학원제 준비일에, 밤늦게까지 리허설을 마치고 땀을 흘리며 탈진해 앉았던 돌 바닥의 시원함을 떠올리면 아직도 시린 기분이 들 정도로 선명히 기억한다. 모두와 전술 링크를 이어 물리친 적과, 오래 준비한 무대와, 뜨거운 모닥불이 타오르던 후야제. 그렇게 함께했던 동료 한 명 한 명의 행적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중 누군가는 헤어질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느꼈던 듯하다. 그렇기에 이자를 운운하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고작 그 정도가 그때 린이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어리광이었거늘, 간혹은 후회가 들고는 한다. 조금 더 그럴듯한 말을 할 수는 없었을까? 얼핏 미련을 보이는 그를 어떻게든 잡아두거나, 마음을 돌릴 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때 거기서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그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러나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다. 10월 30일, 린은 모든 소지품과 기록한 노트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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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 안에서 입맞춤을

문이 열리면서 지팡이 끝이 쓸려 드륵거리는 마찰음이 났다. 가장자리께에 살짝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나붓거렸다. 노이크롬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웃음기 섞인 탄성이 터졌다. 노이크롬의 아래에 나동그라진 스테이시아가 색색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있지, 나.”

노이크롬은 그 팔목을 잡아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만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하얀 장갑이 검은 장갑 위로 매끄러졌다.

“전부터 당신과 이렇게 춤을 추고 싶었어.”

아래에 깔렸던 스테이시아가 몸을 일으키자 이번에는 노이크롬이 바닥에 무너졌다. 스테이시아는 경쾌하게 앞으로 쭉 달려나갔다.

“너무 서두르잖아, 아냐, 아냐. 스텝은 번갈아 가면서 밟는 거야. 자, 이제는 내 차례!”

스테이시아가 몸을 빙그르 돌리고, 눈 깜빡할 새에 거대한 가위가 넘어진 노이크롬의 몸 위로 쇄도했다. 노이크롬은 흰 빛으로 형체를 바꾸었다. 빛은 다시 스테이시아의 앞에 모여 소녀의 형상이 되었다.

“음악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걸.”

눈앞에서 노이크롬이 내휘두른 지팡이를 붉은 가위로 막아내며 스테이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어. 우리 둘만 남았잖아. 그걸로 충분해.”

잠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힘에서 우위를 점한 스테이시아가 그대로 지팡이를 쳐냈다. 까만 막대가 데구루루 바닥을 굴렀다.

“춤에서 가장 중요한 리듬은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거든! 뭐, 우리 것은 인공 심장이지만.”

노이크롬은 뒤를 돌아 지팡이를 집으려고 했지만 스테이시아에게 손을 낚여 홱 끌어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녀는 소녀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다리에 무게를 실어 깔아 내리고, 상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자, 느껴지지? 기계장치의 얼음 심장이야.”

노이크롬은 그 손을 홱 뿌리쳤다. 경멸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스테이시아에게 다리가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채였다. 선홍빛 눈이, 붉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이 노이크롬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소녀는 창백하리만치 하얀 눈을 깜박거렸다.

“신은 창조물이 자신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던가? 우리의 신은 사람이니까, 우리 모습은 정교하게 사람을 의태했어.”

소녀가 소녀에게 몸을 맞붙였다.

“자아, 느껴지지. 심장 그리고 가슴.”

소금 성

1. 크레니히는 사실상 집에 갇혀 자란 것과 진배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와 싸운 기억이 있다. 지금은 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하디 사소한 이유였다. 생떼를 부리며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다가, 갑자기 숨이 가쁘더니 곧 세상이 노랗게 회까닥 돌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가 크레니히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마르그리드는 크레니히를 집 밖에 홀로 두려 하지 않았고, 크레니히도 감히 어머니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깨어나 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며 눈물 젖은 뺨을 크레니히의 얼굴에 잔뜩 부비던 어머니의 볼에서는 소금기 짠 내음이 났다. 그 집은 소금으로 된 성이었다.

 

2. 로쏘, 라고 하면 화학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연구에 미친 천재는 새로운 연구거리를 또 잔뜩 만들어내고 감탄도 욕도 진탕 들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수식이나 법칙으로 정리하는 데 도가 텄지만 살면서 이성을 흐리게 하는 악마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악마는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홀리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더니 기어코 악귀로 붙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악마의 자식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악마의 새끼 아니랄까봐 과연 새끼 악마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소금 성에서 키운 악마. 그녀가 땀과 눈물로 쌓은 성에서 완성시킨 악마. 로쏘는 소금 성에 갇혀 있다.

 

3. 크레니히가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불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크레니히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확연하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동료를 툭툭 치면서 뭐라고 말을 했다. 동료는 고개를 젓다가 멋쩍은 듯 웃고는 크레니히 쪽으로 걸어왔다. 어머니 외에 한 명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크레니히는 어느 누가 자신을 보는 것도, 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빠짐없이 달가웠다.

“자, 크레니히. 저쪽에 가서 로쏘 아저씨에게 인사하렴. 오늘부터 네 양아버지가 될 분이시란다.”

열여섯 살까지 어머니와 단둘이만 지냈던 크레니히에게는 어느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도, 방금 들은 말의 내용도.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년은 아까 바라보던 남자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소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 하세요…….”

“팔자 더럽군.”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서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짓씹듯 말했다.

“너는 장례가 끝나면 나랑 같이 내 집에 갈 거서 거기서 지낼 거다.”

“감사합니다…….”

세상 물정엔 어두워도 최소한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건 알 수 있었던 크레니히는 빠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 말할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로쏘… 아저씨?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를 일은 없을 텐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4. “돈은 여기에 놔둘 테니 네가 알아서 해. 귀찮게 신경쓰게 하지 말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족하면 말을 하든가 말든가.”

로쏘의 집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자그만 방에 있는 것은 침대와 책상이 다였다. 낯선 곳에 있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집에 있다는 사실에 계속 심장이 두근거려 크레니히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밖에서 이따금 종이 넘기는 소리나 펜을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만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혹은 먹을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다. 처음 며칠은 굶었다. 그렇게 굶주린 눈에야 조악한 칼로리바나 식사대용 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대강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크레니히는 결국 혼자 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크레니히는 어머니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혼자서도 외출할 수 있었고, 혼자서 외출해야만 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혼탁하게 뒤섞여 눈물이 났다. 어색한 솜씨로 크레니히는 여러 가지 식재료를 집에 채워놓았다. 혼자서 식사를 하다가 이거 괜찮네요, 엄마. 하고 앞에 음식을 권할 뻔했다. 혼자였다.

몸이 좋지 못했던 소년은 해가 다 뜬 후에 일어나 저녁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조금씩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로쏘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레니히는 로쏘가 며칠씩 걸러서야 불규칙하게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일까, 어디서 지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그 순간 완전히 지쳐 있던 로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없는 것처럼 행동해. 좋아서 널 맡은 거 아니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소년은 방문 틈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흔적을 좇다가 결국 침대에서 훌쩍거리며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어났을 때, 크레니히는 휑하던 방 안에 책이며 노트며 장난감이며 못 보던 생활용품이 잔뜩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5. 꼬박 한 달이 지나자 크레니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혼자서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것도, 책을 찾아 읽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까지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로쏘라는 남자였다. 혹은 혼자 지내는 것이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크레니히 자신이 며칠, 혹은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집에서 나왔을 때 크레니히는 자신이 이제 어쩌려는 작정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알았고 도착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알았다. 구역 밖으로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라 종일 거리를 헤맸다. 날이 저물고 길을 잃었나, 이대로 어디도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싶을 때 즈음에야 낯익은 풍경, 낯익은 거리, 낯익은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헤매지 않았다. 발이 먼저 가는 대로 따르고 나니 십년 넘게 어머니와 함께 둘이 지냈던 집이 보였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오래된 집으로 향하던 크레니히는 집 정문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추었다. 어쩐지 시큰하고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열망이 더 강했기에 소년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집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쓰던 가구와 소품들 위에 추억이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추억을 되새기던 크레니히는 깊이 들어서서야 집 앞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 달을 비웠을 집이 먼지도 거미줄도 없고 누군가 지내는 것처럼 살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겁이 나서 제 어깨를 끌어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크레니히는 마침내 범인을 발견했다. 마르그리드가 주로 연구를 했던 방, 나무 의자 위에서 붉은 머리 남자는 소품처럼 당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특수목적 기계개발 성공사례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애를 써 되짚어도 어느 시점 혹은 어느 순간이 시작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첫 만남조차도 불명확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만나 무엇을 했는지 무엇 하나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다만 어느 먼 훗날 내면에 침잠해 센스 레코드의 기억을 찬찬히 살필 때 시작도, 끝도, 순서도 없이 불티처럼 피어나는 장면과 감정들. 어린 숨결과, 부드러운 손의 감촉과, 짐짓 짓궂은 목소리로 서로 반론을 제기해보곤 했던 사상과 이론, 그러다가도 머리를 맞대고 밤 새워 읽었던 연인들의 비극.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때리면 다시 손을 맞잡고 굳이 서로 맞추어 걸었던 발소리까지.

기억과 장면은 죄 불씨처럼 단편적이지만 불길이 붙어 훗날까지 오래도록 이어져간 것들이 있었다. 가령 오토마타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짬이 날 때마다 발맞춰 연습했던 둘만의 춤이 있었으며, 언제든 상대는 서로뿐이니 이야기할 때 눈을 돌리지 말자고 귓가에 속달거렸던 약속이 있었다. 열두 살이었다. 열두 살배기 아이들의 약속은 각자가 머리가 굵어 소녀가 냉엄한 감시자로 불리고 소년이 천재 공학사로 불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작 열두 살짜리들이 그러했느냐면 정말로 그랬다. 열두 살이라고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종이에 물에 스미듯 당연하게 사랑했고 아침 해가 그림자를 자르듯 막힘없이 자라났다. 여느 연인들처럼 마음이 자라고 몸도 자랐다. 세상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드물게 의견이 맞지 않아 입술을 삐죽이면 그 위로 새처럼 입을 맞추고 곧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이렇듯 정책이나 기술, 현안 따위를 토의하는 것이 세계를 위하여 만들어진 자들의 일상이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몇 번인가는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헤치고 기지개를 켜고 머리까지 풀어헤쳤다.

그런 후에는 종일 나가서 들어오지 않기도 했고 아예 방에서 나가지 않기도 했다. 간식과 책과 옷가지가 굴러다녔다. 레드그레이브가 둘둘 말린 이불 안에서 맨발을 내밀고 발끝을 까딱거리면 그라이바흐가 꽃을 꺾어다 이불 속에 파묻힌 여자의 얼굴 아래 들이밀었다. 여자는 간지럽다고 웃고 이불이 흔들리다가 남자의 품 안으로 넘어져 버렸다. 꽃이 쏟아졌다.

…(중략)…

그렇기에 그들은 여느 연인들처럼 싸우고 소원해졌다. 역시,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는다. 따져 보면야 이것저것이 많지만 의미는 없다. 서로의 분야가 달랐던 것, 가끔 내색하는 서운함도 무시했던 것, 업무와 선천적인 신체의 한계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룰 수 없었던 것, 생일 밤 인사를 빼먹었던 일이나 아팠던 곳은 괜찮으냐는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순간까지, 수없는 기억의 단편을 돌이켜 보아야 어쩌지 못할 후회만 속절없이 남아 괴로울 일이고. 그저 태어나 당연하게도 사랑했듯이 때가 오자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한낮의 열정이 사그라지고.

그리고, 헤어짐도 왔을 뿐이라고.

수사국이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