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린 슈바르처에게는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아마 8년 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의 기록은 부끄러워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버리지는 못했다. 낡은 노트 안에는 삐뚤빼뚤한 아이의 필체로 어머니가 재배하던 허브나, 엘리제와 함께 만든 눈사람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짤막한 글귀도 함께였다. 도와주세요, 모르겠다, 짜증나, 무서워.

표지에 가죽을 입힌, 아이가 쓰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노트는 어릴 적 설산에서 피투성이로 돌아온 이후 불안해하고 사람을 피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무언가 알 수 없고 불안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마주하는 게 먼저란다. 여기에 일기를 써 보렴.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날그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적으면 된단다.

과연 그때 아버지의 안배가 옳았었는지, 린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떠오르는 대로 노트에 의문점을 적어 나가던 어린 린은 자신에 대해 뭔가 석연찮은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택에서 눈을 뜨고 엘리제를 만나기 전의 기억이 없는 점이나, 인사를 하던 귀족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경멸 어린 수군거림의 실체나, 결국 아버지가 유미르에 틀어박힌 이유에 대해서.

바라지 않은 깨달음에는 질문과, 대답과, 울먹임과, 침묵이 이어졌다. 그날 아버지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겨울날, 제 몸보다 일곱 배는 큰 마수에 대해 느꼈던 뼈저린 공포는 자신에 대한 더 큰 공포가 되었다. 밤마다 어둠을 타고 증식하는 불안에 겁에 질려 떨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기는 한 걸까? 자신이 무언지 모르는데다 가족은 가족이 아니니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때부터 무엇이든 기록해서 정리하는 습관만은 몸에 배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밤마다 기숙사에서 린은 학생 수첩에서 쓸 만한 정보를 옮겨 적었다. 그날그날의 기억, 전투했던 상대나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요리의 레시피나 낚은 물고기의 종류부터 읽은 책과 신문의 내용, 그리고 신경이 쓰이는 온갖 정보까지. 그저 적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책상에 바르게 앉아 펜촉을 잉크에 담가 사각사각 글을 적어나간 후, 짧게 명상을 하는 것이 일과의 마무리가 되었다.

봄과 여름을 거치며 노트의 정보는 점점 풍족해졌다. 정보의 출처인 트리스타 역 근방의 기숙사나 VII반의 교실, 구교사, 혹은 교정 안의 이곳저곳을 볼 때마다 가슴 근처에서 뭉근히 부푸는 것이 있었다. 고양감이라고 하는 감정은 검술을 수련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전념하던 린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놓을 수가 없는 그런 것이어서, 린은 스스로에게 새기듯 일지를 적었다. 학생회의 일을 도우며 만난 사람들,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동료의 믿음. 처음으로 겪어 보는 유대를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적어나갔다.

계절은 깊어져 가을이 되고 노트의 내용은 넘칠 만큼 두터워졌다. 린의 마음도 그랬다. 학원제 무대를 준비하던 밤을 기억한다. 구교사를 빌렸던 학원제 준비일에, 밤늦게까지 리허설을 마치고 땀을 흘리며 탈진해 앉았던 돌 바닥의 시원함을 떠올리면 아직도 시린 기분이 들 정도로 선명히 기억한다. 모두와 전술 링크를 이어 물리친 적과, 오래 준비한 무대와, 뜨거운 모닥불이 타오르던 후야제. 그렇게 함께했던 동료 한 명 한 명의 행적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중 누군가는 헤어질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느꼈던 듯하다. 그렇기에 이자를 운운하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고작 그 정도가 그때 린이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어리광이었거늘, 간혹은 후회가 들고는 한다. 조금 더 그럴듯한 말을 할 수는 없었을까? 얼핏 미련을 보이는 그를 어떻게든 잡아두거나, 마음을 돌릴 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때 거기서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그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러나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다. 10월 30일, 린은 모든 소지품과 기록한 노트를 잃어버렸다.

 

때로는 잃음으로부터 발생하는 마음이 있다. 분노와 좌절과 초조함과 그리움. 어딘가로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그 모든 기록들. 설산은 그저 새하얗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린은 마수보다도 8년 전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자신이 무서웠다. 손에 남은 것은 검뿐이고 저에게 남은 것은 몸뿐이니 그 설산에서 여력을 소진하고 쓰러질밖에 없었다.

저택에서 눈을 뜨고 가족을 만난 이후에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빼앗긴 한 달과 동료의 행방과 변해버린 세상과 손안에서 빠져나간 모든 것에 대해서. 되찾아야 하는 것이 무어고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어서 저택을 서성이다 보니, 방의 책꽂이에 노트 몇 권이 있었다. 실로 표지를 엮은 두꺼운 가죽 노트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8년 전의 겨울이 머지않게 기억났다.

마을에는 그때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린은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노트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나누었다. 전투의 상대부터 읽은 책의 내용, 요리하는 법, 낚은 물고기의 종류,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것에 대하여 예전에 가지고 있던 그대로 구성했다. 잃어버린 모든 내용을 언젠가 되찾을 것을 기대하며 빈 종이에 글씨를 조금씩 채워나갔다.

그럼에도 더 써나가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정리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린은 노트 하나를 더 만들었다. 잃어버린 것, 납득할 수 없는 것, 신경 쓰이는 것, 초조와 불안과 그 너머 아득한 무언가에 대하여 적어야만 했다. 남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는 이 노트는 아홉 살 때 쓰던 이상으로 엉망진창이고 두서없었다.

한참을 쓰다가 몇 줄은 직직 그어 지웠고 몇 장은 찢었다. 그러고도 한 묶음이 남았다. 린 자신도 정체를 모를 노트의 내용은 원망이 절반이고 한탄이 조금, 그리움이 대부분이었다. 잉크 반병이 금세 동났다. 린은 지난 추억에 대하여 썼다. 추억이 속임수였던 사실에 대하여 적었다. 아니, 속임수였는지 진심이었을지 모를 의혹에 대하여 깨작거렸다.

결국 이 이상한 노트의 내용은 단 한 사람에 대한 것으로 귀결된다. 크로우 암브러스트. 짧은 이름이었다. 린은 이 이름 맨 앞글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학생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그저 가짜에 불과해, 라고 했던가. 고작 그 한 마디로 모든 기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연설 중의 총성을 발단으로 제도와 트리스타는 점령당했고 동료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학교 사람들은 무사할까? 전원 연금 처리하겠다고 그 녀석이 말을 했던가. 생각은 계속 크로우에 대한 것으로 되돌아간다. C는 격렬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공장에 인형병기를 풀어놓았고 열차포를 탈취하려고 했다. 그게 크로우였다. 그 점이 문제라서 지금 생각이 이 모양이었다. 노트에 까맣게 휘갈긴 자국이 남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신기한 학교 선배일 뿐이었는데. 만나자마자 마술이랍시고 50미라를 가져간 이상한 사람. 말도 안 되게 가볍고 유쾌해서 언제든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구교사에서 가디언을 상대할 때나, 고민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생각 이상으로 든든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

린은 문득 이럴 때 눈앞에 크로우가 있다면 언제나처럼 무슨 말이라도 거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답이 없는 걸 사서 고민하지 말라거나, 지나치게 심각할 필요 없다거나, 그런 말을 하면서 어깨를 툭툭 치고 웃는 크로우의 상상을 하다가, 스스로가 멍청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잖아. 크로우는 크로우니까. 샤론의 커피를 좋아하던 크로우, 수업마다 뒷자리에서 졸아 대던 크로우, 여학생들의 무대 의상에 한참이나 공을 들이던 크로우, 루르를 헤매던 아기고양이를 강아지풀로 꾀어내던 크로우, 추가 무대를 짐짓 엄격하게 감독하던 크로우, 툭하면 블레이드를 제안하던 크로우, 무대 앞에 나서 손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우던 크로우.

그리고 노을 지는 교실에 홀로 앉아있던 크로우, 일부러 남아 줄 수도 있다고 치근거리던 크로우, 후야제 날 50미라를 돌려주었던 크로우, 굳이 기숙사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과 친구들에게 빌린 모든 물건을 돌려준 후 제도로 나선 크로우. 어느새 노트에 깨알같이 정리된 자신이 아는 ‘크로우’를 들여다보자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났다.

가짜는 무슨. 웃기는 소리지. 다음에 만난다면 그 멍청이의 멱살을 잡자. 50미라의 이자도, 이기면 돌아오라는 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네가 즐겼다던 청춘도 끝나지 않았다고.

이제야 겨우 마음을 삭이고 노트를 덮을 수 있었다. 린은 덮어둔 가죽 표지 위에 뺨을 대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번에 했더니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잠이 들기 전, 마지막으로 가슴에 작은 불안이 남아있었다.

만일 정말로 가짜라고 하면, 이렇게 수없이 적은 내가 아는 크로우는 어디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