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를 좋아하는 호사가 공작의 저택에는 언제나 사람이 바글거린다. 워낙에 연일 파티가 이어지기에 누군가 며칠씩 눌러앉아 있거나, 본 사람을 또 본다고 해도 특별히 눈에 밟힐 일은 아니다. 이 공작의 취향이란 것이 워낙에 가진 것을 과시하기 좋아해서, 보물도 지위도 권세도 사람도 잔뜩 모아다 자신의 파티에 전시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비타 클로틸드의 눈에 띄었다.
“안녕. 오늘도 잠을 못 자니?”
창밖을 바라보던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긴 은발 위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타는 어깨를 으쓱하는 소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오늘도 자장가를 불러줄게.”
혼자서 쓰기엔 지나치게 넓은 귀빈용 숙소의 침대 위에서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비타 클로틸드의 허벅다리 위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벌써 보름이 두 번을 지나 수십 일째였다.
“그거 알아? 비타. 푸른 가희가 공작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자자해.”
“내 이야기인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당연한 일이지.”
“얼씨구.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는 알아서 하는 얘기지?”
“신경 안 써. 내가 지금 신경쓰는 건 너야.”
소녀가 말은 잘 해요, 라고 중얼거렸다. 긴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귓볼이 붉었다. 비타는 작게 웃으며 그 귓볼을 살짝 꼬집었다.
“너 정말 못 자는구나. 내가 오기 전에는 밤에 잠은 자고 지낸 거니?”
“별로…. 그래도 별 상관은 안 했어. 카이엔 아저씨랑 지내는 날도 많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비타는 대답 대신 나지막히 허밍하며 소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 소문은 내 거지, 네 게 아니잖아, 비타. …애초에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거야? 당신같은 가희가.”
카이엔의 저택에는 사람이 많다. 소녀도 본래는 눈에 띄지 않았어야 했다. 단출한 드레스를 입고 늘 생글거리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은발의 여자아이. 하지만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비타 클로틸드의 눈에 띄었다.
“네가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잖니? 심연은 누구의 안에나 있단다. 분노, 절규, 고통, 증오… 그러니 언제나 밝은 척, 절대 흔들리지 않는 척 하는 인간일수록 순 거짓말쟁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도 좋아해. 그런 인간일수록 안에 더 끔찍한 걸 품고 있게 마련이거든…. 예술가의 흥미 정도로 해 둘까?”
크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가희의 곁에서 겨우 잠이 들었을 때 했을 잠꼬대의 내용이나, 식은땀에 젖어 깨면서 중얼거렸을 악몽의 이름들을 헤아려 보았다. 눈앞의 여자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국의 유명인사다. 만약에 자신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서 다른 사람이나 제국 상층부에 알리려고 한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크로우 자신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고, 비타는 지금 남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이어지자 샹들리에가 떨리고 대기가 반짝거렸다. 처음에는 눈의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녀의 노래야말로 ‘힘’이라고, 그렇게 알 수가 있었다. 노래의 늪에서 소녀가 칭얼거렸다.
“당신 정말 기분 나쁜 사람이네.”
“칭찬 고마워.”
달큰한 음악 속에 점점 눈이 감겨왔다. 눈을 천천히 꿈벅거리며 크로우는 흐린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역시, 전승 속의 마녀인 거지?”
“일단 자는 게 좋겠구나. 이야기는 다음에……”
짧은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잠이 쏟아졌다.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꿈을 꾸었다. 파아란 바다 속을 헤엄도 치지 않고 그저 자리에 서서 물거품을 몸으로 맞아내는 꿈이었다. 파란 바다의 빛깔은 두고 온 고향의 해안을 닮았다. 꿈 속에서 크로우는 끝도 없이 깊은 바다를 흘러흘러 거대한 ‘무언가’와 눈이 마주친다.
‘나를 부르고 있는 거지?’
‘그렇다.’
‘그렇구나. 아마 우린 머지 않아 만나게 될 거야. 그런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웅얼거리는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녀는 살풋 웃었다.
이제 되었다. 파랗고 파란 치맛폭 안에서 아직은 어린 그녀의 기사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