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 암브러스트는 키가 크다. 워낙 평소에 헐렁한 모습으로 다니다보니 의식을 못할 뿐이지 학생치고는 체격이 많이 크다. 그래서 크로우가 쫓아다닌다는 사실은 의외로 꽤나 압박감을 주는 일이었다.
“요, 린 후배!”
“됐어 됐어 50미라 같은 거 필요없으니까 그만 가라니까!”
그래서 왜 일이 이렇게 됐느냐 하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놈의 50미라 때문이다. 지나간 일인즉슨 이렇다. 린 슈바르처는 학교장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사관학교 공식 호구, 아니, 봉사정신이 투철한 학생이지만 그런 그도 일침을 놓기 좋아하는 상대가 딱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담임 교관인 사라 발레스타인과 선배에서 동급생으로 직위 하락한 크로우 암브러스트였다. 옆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를 다 저 두 사람한테 푸나 싶을 정도로 언행에 가차가 없다. 그나마 어른이고 상관 격인 사라는 기회가 별로 없지, 자주 붙어다니는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이른바 유일하게 린이 막말을 쏟아내는 상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린이 말꼬리를 잡는 90%의 구실이 그놈의 50미라였다. 학원제 준비를 어떻게 할지 회의를 하다가 크로우가 말하는 안건마다 린이 크로우, 그래서 50미라는? 미라도 안 갚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닐텐데? 하고 말꼬리를 잡는 통에 이제는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린 슈바르처에게 50미라를 빌렸다고 전교에 소문이 다 퍼질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건들거리는 크로우에게 일침을 놓는 린을 반겼던 7반 급우들도 의외의 일면에 놀라버릴 지경이었으니.
그리고 회의 도중 결국 무너진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한숨을 푸우 내쉰 이후로 역습이 시작되었다. 린 후배. 내가 비록 자금사정은 여의치 않지만 대신에 일 좀 도와줄 수 있어. 니가 좋아하는 시다바리, 호구, 아니 뭐냐 그 심부름, 봉사. 아무튼 그거 있잖냐. 지금 뭐해, 린 후배? 어이쿠 지금 남작가 도련님 손으로 못질하는 거야? 내가 아는 학생회 애들 데려올테니까 가만히 있으시라~ 뭐, 됐다고? 지금은 뭐해? 아니 혼자 있는 거야, 린 후배? 외롭지 않아? 잘 아는 트리스타 쭉쭉빵빵한 누님들 데려올까? 왜 다 고개를 저어, 린 후배? 내가 빚 갚는다고 이렇게 열성인데?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다 싫으면 역시 내가 몸으로 갚을까, 린 후배?
하여튼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사사건건 지치지도 않고 쫓아왔다. 린의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는 데 이제는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또 저러네, 또.”
“저 두 사람 저대로 놔둬도 되는 걸까요, 회장님?”
“글쎄, 아무튼 두 사람. 서로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열성인 면이 있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토와가 이내 방긋 웃었다.
“음… 역시 괜찮을 것 같아. 두 사람의 문제니까.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자.”
“네?”
“어서, 어서.”
본교사 복도 모퉁이에서 후배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려던 토와 허셜은 문득, 다시 한 번 그녀가 무척 사랑하는 친구와 후배의 모습을 돌아다보았다.
또 도망가려는 린의 검은 머리카락을 놓칠세라 얼른 쓰다듬는 커다란 크로우의 손 아래로 붉게 홍조를 띤 얼굴이 보였다. 둘 다 언젠가 말없이 사라질 듯 돌봐주고 싶은 아이들이었는데, 애착을 가진 상대를 찾았구나. 잘 됐어. 정말 잘 됐지.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