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cm, 171cm.
연구실 구석진 벽면에다 고르지 못한 선 두 개를 습관처럼 그려 놓고 멜키오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없는 연구실이지만, 혹여 누가 볼 새라 숨을 죽이고 흰 가운에 자국이 남을 때까지 문질러 닦았다. 펜을 쥔 손을 가운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서 선을 그어 놓았던 장소로부터 멀어졌다. 어깨가 앞으로 굽은 품새 탓으로 크지 않은 체구가 더욱 작달막해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멜키오르는 왜소한 편이었다. 아이들의 상태와 행동을 기록하던 연구실의 엔지니어들이 말하기를, 아이들은 하나하나가 우수한 형질로 입증된 유전자의 집합이라고 했다. 사회에는 키가 클수록 아름답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나, 아니면 더 다양한 미의 기준을 샘플에 반영하고 싶었던 것일까, 가치론적이거나 탐구적인 고민을 하면서 턱을 괴고 있는 멜키오르를 한 엔지니어가 ‘가끔 제대로 발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 라고 말하며 흘끗 쳐다보았다.
“천성을 뒷받침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지.”
기록자가 돌아가고 난 후 탁상 위로 훌쩍 올라앉은 그라이바흐가 말했다.
“일단 그 어깨부터 펴고 운동과 영양 면으로도 신경을 기울여봐. 그렇게 작아서야 누가 유전자 조작 프로젝트의 피실험자라고 믿겠어?”
“우성학적인데다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발언이네. 혹시 알아? 내가 세 명 안에 선별되어서 세계를 개선하게 되면 키와 미추의 관련성이 재정립될지도 모르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성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걸 부정하는 거야?”
“멜키오르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따분한 말꼬리 잡기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 레드그레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멜키오르를 좋아하잖아?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증거지. 하지만 멜키오르, 그라이바흐도 네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거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밤늦게까지 연구하는 대신 좋은 꿈을 꾸는 건 어때요?”
뺨이 달아올랐다. 레드그레이브의 미소는 그녀의 모든 음성이 세상의 진리인 것처럼 들리게 한다. 레드그레이브가 이렇게나 아름다우니 키가 클수록 아름다운 것이 옳았다. 그녀가 굳이 빌어주지 않아도 멜키오르는 그 아름다움으로 매일같이 좋은 꿈을 꾸고 있으니.
“라고 해도 우리 멜키오르는 들어가자마자 방에 틀어박혀서 요즘 열중하는 연구에 몰두하겠지…….”
지레 찔린 멜키오르가 흠칫하는 사이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와 장난스러운 눈짓을 교환했다. 다음 순간 멜키오르는 양손이 두 사람에게 붙잡혀 키가 큰 둘 사이를 짐짝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평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즐거운 탄성을 지르며 꽃이 만발한 들판을 앞서 달려 나갔다. 길쭉하던 두 인영이 점점 작아지더니 촘촘한 꽃대 사이로 사라졌다. 뒤에 남은 멜키오르는 온전히 꽃 사이에 남았다. 저보다도 키가 큰 꽃대 사이로 묻혀 그 중 한 송이가 된 듯싶었다.
중앙으로 갈수록 검은 씨가 촘촘히 박힌 꽃은 마치 사람의 눈동자 같아 보였다. 하늘을 바라보는 수백 개의 눈 같다. 무에 그리도 그리워 고개를 들고 있나 따라서 하늘을 보자 직면한 태양에 까마득하게 눈이 부셔 현기증이 일었다. 아찔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끌어내리니 길게 솟은 꽃대 사이로 레드그레이브의 얼굴이 비치건만 태양의 잔상이 아직 남아 시야가 번뜩번뜩 아득했다.
“태양을 바라본다고 이름에 해가 들어가는 꽃이야. 아름답지?”
아름답다. 멜키오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에 그리도 그리워서 눈을 떼지 못할까. 눈부신 잔상에 눈물이 고여 상대를 차마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멜키오르는 꽃을 시샘했다.
“거기서 뭐 해, 둘 다? 이쪽에 엄청난 노목이 있어! 몇백 년은 묵었는지 새까맣게 굽긴 했는데 뿌리가 아주 깊어.”
저벅저벅 꽃대를 헤치고 그라이바흐가 나타나자 시야 가득히 검게 그림자가 졌다. 그라이바흐는 그만큼 키가 컸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레드그레이브의 얼굴이 방금까지보다도 훨씬 눈이 부셨으니 역시 키가 클수록 아름다운 것이 맞았다.
그날 멜키오르는 방에 돌아가기 전 기록실에 들러 레드그레이브의 기록을 훔쳐보았다. 161cm, 154cm. 남자는 일반적으로 여자보다 늦게 성장한다고 하니 적어도 몇 년 안에는 키를 따라잡을 수 있겠지.
벽 위에다 키에 맞춰서 선을 두 줄 그어 놓고 레드그레이브의 선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이 선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면, 그때 허리를 숙여서 레드그레이브의 귓가에 대고 마음을 고백해야지.
173cm, 172cm.
키는 좀처럼 쉽게 따라잡아지지가 않는다. 차라리 레드그레이브가 아주 작아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절로 허황된 바람이 떠오름에 멜키오르는 조소했다. 가능성을 관장하는 케이오시움에 빌어도 안 될 일이다.
만약에 정말로 키를 따라잡게 되면, 이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레드그레이브는 나날이 그라이바흐와 더 깊이 사랑하고 나날이 더 눈부시게 아름다워진다. 너무 늦어버린 이제는 케이오시움에 빌어도 안 되는 소망이다. 멜키오르는 신경질적으로 두 선을 지우고 책상 위에 모아 놓은 영양제를 죄다 내다버렸다.
140cm, 166cm.
멜키오르는 여전히 레드그레이브를 올려다본다. 검게 파인 무저갱의 바닥에서 아스라한 창공의 도시로.
그녀에게로 눈을 향하면 태양빛에 눈이 부시다. 하늘을 향하여 고개가 꺾인다. 그렇게 굳어버린 듯 멈출 수가 없다. 하늘에 대고 기원하는 입이 바싹 말랐다. 눈이 부셔 찡그리던 얼굴 거죽까지 검게 말랐다. 그럼에도 흘러넘치는 마음이 마르지 않았다.
바라볼밖에 없는 소망은 갈망이 되고 가능성을 바라는 갈망은 케이오시움에 미쳐 그를 감싸고 바람이 일었다. 닿고자 하는 바람이 바람으로 일어 세계를 휘감아 올라 그녀가 있을 저 높이 천공에 미친다.
하늘을 바라보는 디 아이의 한가운데, 고요한 태풍의 눈 안에서 멜키오르는 오늘도 레드그레이브의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운 꿈을 꾼다. 자그마한 레드그레이브에게 허리를 굽히고 늙은 밀어를 속닥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