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iometric Dating

워켄이라는 남자는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기억이 있되 기억이 없다. 인간에 대해서는 해박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물어도 물어도 비밀이라고만 하는 야속한 세상을 등지고 남자는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땅 땅 재료를 깎아내는 정 소리, 다듬는 끌 소리에 묻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순과 의문에서 도망치고 나니 그가 누구인지 말해줄 아이들이 잔뜩 생겨있었다. 무책임한 세상에 방치당한 남자는 배운 그대로 무심한 신이 되어 폭력을 대물림한다. 그러면 제 존재를 의심하는 인형들은 창조주의 그림자에서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게 존재를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모르던 남자는 그 어여쁜 아이들이 불러 주는 소리를 기꺼이 들으며 웃는 것이다. 닥터. 창조주. 아버지.

이제 신이 된 그를 사람들이 찾아 필요로 하고 우러러본다. ‘닥터 워켄’은 그렇게 세상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쌓은 이름자였으니, 홀로 완전해진 신은 느긋이 홍차를 홀짝이며 그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 아이는 장미처럼 붉다. 고대의 지혜를 발견하고 처음 만든 소중한 아이다. 미처 불완전했던 이 아이는 몇 번이고 덧없이 눈을 감고 뜨고를 반복하면서도 매번 절대자에게 최선을 다했다.

두 번째 아이는 제비꽃과 같은 보랏빛이다. 첫 번째 아이를 본떠 만들어, 모두가 완전한 피조물이 되자 곧 멀리로 보냈던 이 아이는 결국 자기 존재를 찾아서 그의 연구소로 되돌아왔다.

세 번째로 기억나는 아이는 검은색이다. 가장 기능이 많은 이 아이는 지금까지 만든 그 어느 인형보다도 키가 작았다. 다신 감히 신을 속이지 말라, 내려다보지 말라 그렇게 만들었다.

위압적일 정도로 높다란 옥좌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레드그레이브가 말했다.

“이거 참, 한 뼘짜리 세상을 가진 외로운 남자로구나.”

머릿속의 한 뼘만 제하고 전부 워켄의 손으로 만든 몸을 가진 여자가, 그가 직접 빚은 혀와 입술을 그렇게 놀렸다.

“감시자가 보기에는 그러시겠지. 나는 당신과는 달라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세계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거든.”

그러자 이번에는 그 혀를 입천장에 끌끌 찬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 좁은 가슴에 단 한 명도 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거다. 너에 대해서는 너보다 과거를 아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을.”

인간에게 흥미를 잃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받아들일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의 존재는 기억도 주지 않은 세상에 연달아 배신당하며 홀로 쌓아온 것이니.

“나는 워켄일 뿐이다. 과거와는 관계없어.”

대체 그 머릿속 한 뼘이 무엇이기에 창조주를 이토록 내려다보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 뇌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 만인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렇게 무례하게 군다면 판데모니움에 협력하는 것을 그만두겠어.”

“파업이라는 거군. 하지만 그대의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자재와 자료까지 대부분은 의회에서 지원받고 있을 텐데?”

“그럼 아예 당분간 작업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지.”

“호오, 거기다 가출이라는 건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 여자에게 기가 질려서 워켄은 대답을 않고 자리를 나섰다. 결국 여자에게서 도망치듯이 되는대로 짐을 싸고 연구소를 나왔더니 정작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과거도 모르는 무지한 이가 한 뼘짜리 세계를 나섰으니까. 머릿속을 울리는 여자의 조롱소리를 떨치려 남자는 자신이 이름을 쌓기 시작한 장소에 돌아가 보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오토마타를 처음 모으기 시작한 호겐의 병원이었다. 예전에 쓰던 방에 들어가 불을 끄니 이곳에 있을 시절 밤마다 과거에 침식되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오토마타에 집착하기 시작했더랬지. 어둠과 함께, 그때처럼 어김없이 과거의 꿈이 워켄을 사로잡았다. 꿈결을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어째 그립고 먼 동시에 귀에 몹시 익었다. 레드그레이브가 무심한 것이 당연했다. 워켄의 손이 닿지 않은 그 한 뼘은 고대의 기록이 남은 경전이었으니.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그는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저가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는 존재를 찾아 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되돌아왔군.”

“그래. 어차피 도처에 눈을 둔 당신은 내 행방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을 거 아닌가.”

대답 대신 레드그레이브는 옥좌에서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의 관절 부가 엉망으로 뜯겨나가 헤어져 있었다. 전부터 초조할 때 손가락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다고는 알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나간 적은 이전엔 없었다.

“아직 네가 필요한 일이 있구나.”

헤진 손가락이 흰 가운 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직은 우리가 끝을 낼 시간이 되지 않았어, 그렇지?”

이 신은 이상도 하다. 무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또 갑자기는 창조주를 필요로 하는 작은 인형이 아닌가.

언젠가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하지만 모든 걸 기억해 내면 넌 나를 살려두지 않을 테지.’

그러니 아직 끝을 원치 않는다면, 이번에는 다시 그가 신이 될 시간이었다.

그는 레드그레이브를 앉히고 공구를 들었다. 속사포 같던 대화가 멎었다. 정적 속에 땅, 땅 부품을 박아 넣고 접합부를 죄이는 소리만이 울린다. 흘러가는 초침소리와 장비의 울림이 그녀의 보조전자두뇌에 기록된다. 과거가 남긴 경전에 이 시간을 뒤집어씌울 거야. 당신만이 기억하는 창세기를 완전히 덮어쓸 때까지 지금의 나를 박아 넣을 거야.

내가 창조주가 되고, 당신이 신이 되고 위치가 돌고 돌며 수 세기를 이어 온 우리가 잠시 교차하는 이 순간은 당신의 몸에 새겨질 거야. 그래서 영원토록 지속할 거야.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그는 눈을 깜박인다. 어디까지가 지금의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과거에서 발로한 무의식인지, 누가 신이고 누가 신인지, 신벌인지 혹은 경배인지. 모순으로 가득한 이 순간을 그러나 멈출 수가 없다.

한 뼘짜리 세상 너머로 뻗어, 두 존재가 서로 얽히고설킨 긴 역사를 새기기 시작한 손은 그렇게 쉬 멎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