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 x 마르그리드

있던 것들이 없어지는 시대였다. 30세기에 접어들면서 요라스 대륙의 지도는 아주 단순해졌다. 건물마다는 사라져 벌판이 되고 언덕마다는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소용돌이가 기승을 부리자 사람들은 이제 눈으로 지도를 보는 대신 귀로 제일 이른 소문을 찾아 듣고 길을 다녔다. 순순히 지도를 따라가다가는 언제 소용돌이를 만나 산 사람이 죽은 자가 될지 모르는 그런 시대였다.

그래도 크고 작은 산맥 줄기는 용케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산맥이 너른 황야를 빙 둘러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 황야에 레지멘트의 요새가 자리를 잡았다.

이 요새를 소용돌이의 암흑에 맞서 싸우는 시대의 전사들의 요람, 이라고 거창하게들 부르기도 했으나 실상은 혈기왕성한 남자애들부터 아저씨들까지가 자기네끼리 모인 장소였다. 이 요새가 황야에 있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소박한 장소라는 뜻이고, 반대로 말하면 참 놀 거 없이 지루한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술집도 없어, 도박장도 없고, 여자도 엔지니어나 귀신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신기하게도 없는 것을 만들기도 했다. 놀 게 없으면 놀 걸 만들고 사회가 없으면 사회를 만들었다. 어린 군인들 사이에는 파벌 싸움도 잦았다. 서로 칼을 휘두르며 살벌하게 굴다가 또 금방 어울려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할 일 없이 무료하면 끼리끼리 얘기를 지어내며 떠들고 놀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레지멘트 대원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미신이 퍼져 나갔다. 수련장의 큰 나무는 사실 5백 년 전에 불사황제가 심은 거라더라, 사실 이 터는 옛날에 아주 번성한 도시였는데 아직도 그때 만들어진 기계가 사람 흉내를 내고 다닌다더라, 레지멘트 요새에는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여자의 원혼이 깃들어 남자를 놀래고 복수를 한다더라.

물론 판데모니움에서 온 엔지니어들은 대개 이런 뜬소문을 경멸했다. 혹여 이러한 소문을 들어도 지상 사람들 수준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콧방귀를 뀌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말들을 귀담아듣는 엔지니어가 레지멘트 요새에 단둘이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둘 다가 요새에 드문 여자였다.

첫 번째 여자는 C.C.라고, 부상으로 퇴직하고 고향에 돌아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비개발실에 내려온 젊은 엔지니어였다. 이 여자는 평소 취미부터가 망상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앳된 얼굴에 침을 흘리며 오늘의 메뉴가 무엇일까 상상하고, 낮에는 레지멘트 부대원들이 지껄이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밤에는 남자들의 뜨거운 우정에 대해 공상하면서 다시 입가에 침이 고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은밀한 즐거움에 대해 파고들 때는 아니다.

두 번째 여자는 마르그리드라고, 바로 부대에 깃든 여자의 원혼 본인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가장 대원들 사이의 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 ―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 일 것이다. 마르그리드는 젊은이들의 허풍 섞인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거동을 신중히 했고, 가끔은 소문을 즐기기도 했다. 간혹 대원들이 결코 들키면 안 될 장소에 가까이 올 때면 그녀는 음산한 소리를 내며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산만한 괴물도 두렵지 않게 처치하는 남자들이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치는 꼴이 어찌나 재밌는지. 덕분에 대원들 사이에서 여자의 원혼에 대한 소문은 나날이 악명을 더해 갔다. 마르그리드가 처음부터 의도한 대로였다.

그러니 그 날도 다른 때처럼 다가오는 사람을 쫓아내고 본체인 드론을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복도에서 작게 발소리가 들려올 때 마르그리드는 이미 반쯤 긴장하고 있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제대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본체가 주인 없는 드론이라고 분실물 신고라도 되면 꽤나 빠져나오기 피곤해진다. 여느 때처럼 모습을 숨겼다가 갑자기 나타나며 놀라게 해서 쫓아내는 게 상책이겠거니, 생각하며 마르그리드는 문밖에 머리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도리어 자신이 놀라버렸다.

‘여자잖아… 여기 여자가 다 있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아니, 나도 여자인데 무슨 생각이람.’

남자만 득시글거리는 장소에 있다 보니 성정체성까지 잃어버리나 싶었다. 하기야 본체가 드론이건만 성별이 의미가 있을까, 조용히 자조하던 마르그리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르그리드… 언니?”

어느 틈에 봤는지 여자가 다가오며 망설이는 듯 말을 걸었다. 여자에게 모습을 보인 것도, 누군지 모를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도 놀라웠으나 사실 더 놀라운 것이 그녀의 표정이었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뛰는 듯이 걸어오는 여자.

마르그리드는 원래의 몸을 잃으며 기억 일부도 함께 잃었다. 그래도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기억한다고 생각했거늘, 어쩌면 그러지 못하고 있던 것일까. 숨어야 할까도 싶었으나 그녀는 궁금했다. 잃은 기억이 궁금하고 저 여자는 대체 생전의 자신과 어떤 관계였기에 저런 표정을 하게 되는지 궁금했다.

“누구시죠?”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자는 자리에 딱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제멋대로 뻗친 곱슬머리를 배배 꼬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저 기억 안 나요, 언니?”

여자는 뭐가 그리도 절박한지 마르그리드의 손을 꼭 쥐어 잡았다.

“저 C.C.요. 우리 예전에 렙톤 연구소에 있을 때, 기억 안 나요? 그때 저는 열한 살이었고, 언니는 열일곱이었는데.”

열한 살짜리, 연구소.

연구소의 여자 아이. 외로워 보이는, 어린아이.

“그래, C.C.… 많이 달라졌구나.”

―특히 어느 특정한 부위가. 라는 말은 일단 속으로 눌러 담았다. 기억은 낡은 사진처럼 느릿하게 떠올랐다.

 

연구소에 앉아 있는 열한 살 소녀를 처음 봤을 때, 마르그리드는 연구원 중 하나가 가족을 데려온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소녀는 여전히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구 딸이냐고? 틀린 말은 아니지.”

옆자리의 동료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했다.

“몇 년 전에 지상에 끌려간 세인츠 주임님 알아? 중장비 개발 쪽 일을 하시는. 그 분의 딸이거든. 저 애는, 영재야.”

그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저대로 정체하지 않고 계속 발전한다면, 천재가 맞겠지.”

영재든 천재든, 어린아이일 뿐이잖아. 그것도 부모도 없이 어른들 사이에 외따로 떨어진 외로운 아이. 그리 생각하며 마르그리드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언뜻 콘솔 위로 온통 어지럽게 나열된 수식들이 보였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리도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는 것은 분명 테크노크라트인 마르그리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보러 온 게 아니다. 마르그리드는 C.C.가 앉은 자리에 탁 소리 나게 무언가 내려놓았다.

“자.”

통조림 캔이었다.

“너 열한 살이라며. 한창 많이 먹을 때잖아. 너 며칠째 아무 간식도 안 먹고 하더라? 아무도 그렇게 못 버티는데.”

아이는 연구라도 계속하는 듯한 태도로 캔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저쪽 창고에 잔뜩 있으니까 가져다 먹으면 돼. 그렇다고 일부러 챙길 필요는 없는 게, 보급품이라서 무진장 맛없거든. 이 옥수수 수프가 그나마 나아.”

그때까지도 아이는 대답 없이 그저 호박색 눈만 또록 굴리며 마르그리드를 쳐다보았다. 마르그리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때는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어렵잖게 대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혈통도 있었고 미모도 있었으므로. 그렇지만 어린아이를 상대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조금 곤란했다.

“그러니까… 너 친구도 없고 심심할 것 같아서. 그래도 내가 여기에서는 어린 편이니까. 혹시 필요한 거나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라는 거야. 오늘도 점심 배식에 빠졌잖아. 배고프지 않아? 그럴 때 말하라고.”

마르그리드는 캔 뚜껑을 따고 숟가락을 들어 C.C.의 앞에 들이밀었다. 얼결에 양손에 캔과 스푼을 받아들고 아이는 큰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금방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마르그리드 씨…?”

“언니라고 불러.”

아이의 얼굴을 끌어안으니 품 안이 축축했다.

 

―그랬다. 그리고 고작 이 주 만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던 C.C.는 아주 발랄하고 엉뚱한 아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르그리드는… 일 년 후 다른 곳으로 파견되었지. 그리고 아예 연락이 끊겼던 건가. 마르그리드는 여전히 서글서글해 보이는 C.C.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바라보았다. 마르그리드가 알아보는 기색을 보이니 여자는 언제 수줍었냐는 듯 완전히 얼굴에 꽃이 피어 화색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언니? 지상에는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글쎄, 어쩐 일일 것 같니?”

“으으응~ 이거 문제인가요? 퀴즈인가?”

“그래. 맞추기 전까진 안 알려줘.”

“언니가 여기 올 만한 일이라면… 으음… 그건가? 역시 그건가. 나를 보러 온 거죠?”

마르그리드는 순간 반사적으로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표정은 좀 상처예요, 언니… 음… 여기 따로 볼 건 없는데, 역시 파견 나온 거예요? 헤헤, 그런가 보다. 언니는 워낙 훌륭한 테크노크라트니까, 연대를 감찰하러 온 거죠? 그런 건가?”

C.C는 혼자 조잘거리다가 손뼉까지 반짝 쳤다. 원래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텐션이 높았던가 의아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언니는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그렇구나.”

느긋하게 대답을 받아쳤지만 실은 조금 생각이 복잡했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열일곱 살의 마르그리드. 남편을 만나기도 전이었고, 혈통과 재능과 미모와 모든 것을 가졌고, 앞으로도 죽 판데모니움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군림하리라 크게 의심치 않았던 시절.

그러니 아마 C.C.는 지금 마르그리드를 그렇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계속 그렇게 가장하면 된다. 이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의 나에 대해 어떤 것도 몰라. 우습고 가여워 자조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

그래도, 이렇게 순수한 호의는 참 오랜만이라.

“너도 정말 그대로구나. 꼬맹이 C.C.”

“치이, 아까는 많이 변했다면서.”

C.C.는 끊임없이 새처럼 재잘거리고 마르그리드는 대꾸하다 보니, 그새 해가 높이 올라 창문에서 느지막하게 오후 태양 빛이 쏟아졌다.

마르그리드는 말갛게 눈을 깜박거렸다. 햇빛이, 원래 이렇게 밝았던가.

 

요새에 많은 것은 소문이고 적은 것은 여자라. 드문 여자 둘이 만났을 때 얘기하게 되는 거리도 결국에는 소문이었다. C.C.는 정말 멈추지도 않고 요새의 이 얘기 저 얘기에 대해 종알거렸다.

“그래서, 수련장의 큰 나무가 5백 년 전에 불사황제가 심은 거라는 소문이 있거든요. 호기심이 나길래, 기록을 찾아봤죠. 지상의 기록이라 찾기 어렵긴 했지만 겨우 수소문해서 역사서를 구했는데 글쎄, 여기가 정말로 예전에 제국의 거점이었던 거예요. 지금은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이런 폐허가 되었지만요.”

“흐음, 너도 참 신기한 아이구나. 여기 엔지니어들은 보통 그런 얘기는 뜬소문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던데.”

“저는, 소문 정말~ 좋아해요. 재밌잖아요~ 가만 듣다 보면 그렇게 엉터리 소리들도 아니에요. 진짜일까 아닐까, 아니면 반만 진짜일까,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생각하다 보면은 죄다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게 보이거든요.”

“하긴 넌 어릴 때부터 공상하기를 좋아했지. 아무튼 엉뚱하긴.”

“그… 사실은요, 요즘도 업무 중에 자꾸 상상에 잠겼다가 정신을 빼놓고 있다고 혼나고 그러거든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언니도 제 나이면 공상은 이제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고 할 거예요?”

“글쎄다. 소문이라…”

그보다, 소문 하니 떠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럼 있지. 여기 요새에 붙어 있다는 여자의 귀신에 대한 소문은, 아니?”

“네…네. 물론이죠.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죽어서 복수한다는…”

C.C.는 멍하니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상한 얘기 같아요. 젊은 여자 귀신이라는데, 금방 배신하고 등 돌릴 셈이라면 결혼은 왜 했을까요. 남편이 배신했다, 는 표현 자체가 이상해요…”

“네가 결혼을 안 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얘. 경험이 없으니까 그런 말도 할 수 있지. 해보면 달라.”

그 순간 C.C.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언니. 결혼…했어요?”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하는 동안 질문의 형태가 바뀌었다.

“언니, 결혼했던 건… 기억해요? 어디까지 기억해요?”

그제야 마르그리드는 불현듯 깨달았다. 무심코 넘어간 단서와 단서가 꿰맞춰 짐을 싸하게 느꼈다. 연구소를 나와서 연락이 끊겼다? 이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소문을 좋아한다? 다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생각과 생각이 머리에 돌다 차갑게 스몄다. 마르그리드는 그녀 특유의 그려낸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같지 않은 무기질적으로 아름다운 미소.

“내가 죽었다는 건 기억해.”

“…가족은 기억나요?”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

C.C.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기억하지 못했어요? 나 언니를 따라서, 같은 학술원에도 들어갔었는데. 기수도 분야도 갈려서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지만.”

“…아.”

목이 칼칼했다.

“이제 기억나, C.C.”

 

전문 인력의 수련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원에 새로운 기수가 들어왔다. 대부분은 테크노크라트이지만 드물게 그 외의 뛰어난 인재가 들어오기도 한다. 신입들이 대거 입학해 건물은 왁자지껄 시끄러웠고 연구로 밤을 꼬박 새워 머리가 울리는 마르그리드는 외진 길로 건물을 살짝 빠져나가려고 했다. 도무지 신입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내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빠져나가는 길목에 모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역시 갓 들어온 신입인 듯, 마르그리드는 귀찮은 말상대가 되어버리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발이 멈추었다. 방금 본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마르그리드 언니.”

그리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C.C.”

C.C.는 달려드는 것처럼 마르그리드에게 안겼다. 도무지 예전 그 어린아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으면서도, 서글서글한 눈매나 느긋해 보이는 인상은 꼭 그대로였다. 그러면서도 키가 훌쩍 컸고 몸에는 굴곡이 생기고 손톱에는 색도 곱게 바른 것이 이제는 제법 여자 태가 났다.

“어때요, 언니. 맨날 꼬맹이가 뭘 아느냐고 놀렸잖아. 이제 꼬맹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죠?”

…확실히 열여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기는 했다. 연구복 상의가 상당히 작아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응해 줄 순 없었다.

“그래? 난 이제 스물 셋이다? 나한테 너는 만년 꼬맹이일 수밖에 없어, C.C. 우리 둘 다 살아 있잖아. 네가 자라는 만큼 나도 나이를 먹는다고.”

불퉁하게 뺨을 부풀린 소녀를 보며 킥킥 웃다가 마르그리드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연락이 끊긴 지도 좀 지난 것 같은데.”

“다 아는 수가 있죠~ 언니는 유명하잖아요. 있는 곳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유명은 무슨, 유명한 사람 다 죽었다 얘.”

“나 어쨌든 너무 좋아요. 이렇게 다시 언니랑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어서…”

산통을 깨고 싶지는 않아 가만있었지만 마르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기수도 분야도 다르기에 같은 학술원이래도 함께 있는 시간은 몹시 적을 것이다. 그래도 몇 년 만에 보는 소녀는 역시 반가운 얼굴이라, 마르그리드는 가만 웃어 보였다. C.C.도 수줍게 마주 웃었다.

 

“우린 삶의 절반을 알고 지낸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나만 잊었어요, 언니? 나 언니 결혼식에도 가서 인사를 했고. 그 이후로는 연락하지 못했지만.”

“이해해 줘.”

마르그리드는 금세 둘러댈 말을 찾았다.

“소문을 들었으면 알지? 나는 귀신이야. 원혼이잖아. 원혼은 원망 외에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그리고 말을 마치자마자 이는 변명이 아니라 사실임을 알았다.

“아무래도 좋아요. 이제 같이 있어요. 언니는 계속 내 앞에서 훅훅 사라지기만 했어.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잖아요.”

마르그리드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를 다루는 건 쉬웠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므로. 청년들을 깜짝 놀래 쫓아내는 것도 쉬웠다. 그녀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자백한 귀신의 팔을 붙들고 울먹이는 여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처했다.

“얘, 무형의 소문을 믿는 건 미신적인 태도라고 다른 엔지니어들이 말하지 않던? 나는 헛소문이야. 이미 죽은 사람이야. 이만 잊는 게 좋아.”

“저는 소문을 믿어요.”

“나는 죽었고, 너는 살아 있어. 이건 결국엔 너 혼자의 상상인 거야.”

“…그럴지도 몰라요. 젊은 여자의 귀신이라고 했을 때 나는 사실 언니를 떠올렸어요, 그리고 정말로 언니를 봤을 때 너무 놀랐지만 그보다 반가웠어요. 나는 언니가 안 죽었으면 좋았고, 죽었어도 좋았어요. 소문의 귀신이라도 좋았어요. 왜 안 돼요?”

“어쩜 아직도 꼬맹이구나, C.C.”

마르그리드는 여자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품 안이 축축했다.

“그럼 하루만, 오늘 하루만이야. 공상은 이만 졸업해야지. 죽어서 없는 걸 기억해 뭐하니.”

 

어느 날 아침부터, 레지멘트 장비개발실의 수석 엔지니어 C.C.의 상태가 이상했다. 이 여자 이상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며칠간 하라는 일은 통 손에 잡질 않고 대신 온 연대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누군가 다가가 도와주겠다고, 무얼 찾느냐고 물으면 특유의 호박색 눈을 홉뜨다 대답 대신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여자가 운다는 사실에 당황해버린 대원들은 더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C.C.는 겨우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듯했다. 책상머리에 앉아 혼자 공상에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엔지니어와 대원들은 그래, 저래야 C.C.지, 하고 안심을 했다. 평소다운 모습이 반가워 괜히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기도 했다.

“그거 알아요, C.C? 요즘 신입 대원들 사이에서는 별별 소문이 다 유행인 모양이에요. 훈련소 아래에 시체가 묻혀있다거나, 귀신이 있다거나. 우습지 않아요?”

“귀신…이요. 귀신… 정말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그만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참, 귀신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요. C.C.는 엔지니어면서 무슨 심령현상 같은 걸 믿어요. 원래 여자들은 그렇게 뜬소문을 좋아하나요? 왜 있지도 않은 걸 믿고 그래요?”

“뜬소문이 아니에요, 언니는.”

갑자기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항변하고 싶었으나 C.C.가 치켜뜬 눈이 세모꼴로 매서웠다. 그가 그저 머쓱하게 입을 닫는 사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방에서 나온 C.C.는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것처럼 주위를 휘휘 훑어보더니 멍하니 앞을 보며 계속 걸어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더 발에 힘이 들어가 세게 딛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닥을 꾹꾹 밟아가며 길게 이어진 복도를 뛰었다. 그렇게 복도 끝자락의 빈 방 안으로 달려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리고 소파 위에 털썩 앉아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언니는 있어요.”

빈 방에 물기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길 잃은 아이처럼 곁을 둘러보다가 소파 위에 놓여 있던 구형의 드론을 꽉 끌어안았다.

“언니는 여기 있었구요, 언니는 항상 나한테 다정했고, 여기 요새에서도 그랬고요, 내가 기억하는 언니처럼. 물론 언니는, 나 믿을 수가 없어서 처형 기록까지 찾아봤었지만, 언니는, 그래, 죽었지만. 그래도, 언니는.”

제 감정에 겨워서 그녀는 안은 것을 더욱 세차게 가슴에 끌어당겼다. 사늘한 금속의 구체 위에 따신 눈물이 흐르는 뺨을 기대어 비볐다.

“내 첫사랑이에요.”

품에 어렴풋이 드론 불빛이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