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가 죽은 미카슈

 

 

이름 모를 열병. 한 사람의 사망원인으로 머리에 새기기에는 지나치게 덧없는 단어였다. 문득, 카게히라 미카가 꼭 그런 모양으로 자신에게서 사라지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번듯한 이름도, 흔적도 자취도 없이, 처음부터 그에게 없었던 것처럼. 하기사 그랬다면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했을 리 없다. 이츠키 슈는 지금 남극에 있다.

사망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것은 슈가 어리석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결코 위생상태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곳에서 오래 지냈고, 그런 일을 했었다. 언제 어느 균이 몸에 들어 언제부터 약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응당 그래야 했던 것처럼 미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기 위해 마지막까지 따져보는 것이 이츠키 슈가 그 어리석은 까마귀를 위해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어리석음이었다.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고, 늘 실수투성이에, 과거까지 무던하게 곱지 못해 그렇게 죽어버린 그 아이였으나 마지막 모습만큼은 더없이 인형다웠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진즉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야만 했다. 사투리도 표준어도 되지 못하는 말을 더듬거리다가 못 들어주겠다고 호통을 치자 아이는 내가 뭐 그렇지, 하며 헤헤 웃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카게히라 미카는 완벽하게 바른 표준어를 일상에서 구사했다. 하면 되는데 안 하고 있었나. 그러게, 스승님. 내가 멍청했네.

실수가 잦던 아이가 제로콤마 일 초까지 어긋나지 않는 무대를 섰다. 노래하는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초조할 때 자꾸 다리를 떨고 손가락을 깨물던 아이가 이제는 시선을 곧게 두고 허리를 꼿꼿이 했다. 그렇게 차례차례 슈가 지적하던 모든 것이 ‘고쳐졌을’ 때,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 나는 이제 괜찮은 인형이야? 슈가 무덤한 목소리로, 그렇군. 이제 꽤 흠잡을 데가 없게 되었군. 흠 없는 인형이다. 이렇게 대답하자 미카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말했다. 스승님. 나 얼마 남지 않았어.

시체의 상체는 양호하다. 미카는 더 보기 싫게 야위기 전에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 남은 돈을 전부 흉터 수술비에 쏟아부었다. 더 이상 이츠키 슈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것을 바랄 것 같느냐고 소리를 지르자 미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서는 마드모아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스승님은 죽은 사람을 오래 기억하잖아. 만약에 내 인형을 만든다면 얼룩투성이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내 잘못이었을까? 나 때문에 그 아이가 비뚤어진 걸까? 돌이켜 보아도,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졸업 후에도 함께 살았다.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카가 장을 보고, 슈가 아침을 하고, 집 앞에 떨어진 벚꽃을 주워 마드모아젤의 머리에 장식하고, 무대를 연습하다가, 녹초가 되어 돌아와 바느질을 하다가, 슈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미카가 담요를 덮어주다가 뺨에 입을 살짝 맞추고, 슈가 그만 눈을 뜨면 불을 껐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고 난 후에는 별을 보았다. 쌀쌀한 새벽의 뜰에서 미카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별자리들의 이름을 불렀다.

스승님, 저거 보이나. 저쪽 밝은 별이 북극성이다. 응, 그 노란 별이랑, 그 아래 주황색 별 보이나. 거기까지 사이에 별 세개 보이제. 쭉 이어서, 고 옆에 있는 별들까지 하면 작은곰자리인기다. 곰 안같다고? 헤헤, 내 보기도 그래…. 근데 그거 아나? 북극성이란기는 정해진 게 아니라 그냥 천구 북쪽에 있는 별을 부르는기다. 오래 전에는 다른 별이 북극성이었다 카지 않나. 지금 남극성은 없고, 대신 남십자자리라고 길잡이별이 있거든. 건 위도가 높아서 지금 여기서는 못 보고, 훨씬 더 남쪽에, 내 고향에 가면 잠깐씩은 보인다. 언젠가는 스승님이랑 같이 보고 싶으네.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미안하다. 그런데 스승님 지금 얼굴 빨개지지 않았나? 농담이다. 깜깜해서 안 보이는걸. 반~짝 반짝 머리위에 도는 별만 보이지. 나는 별이 좋다.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안 변하잖나. 아무리 땅 위에서 사람들이 추태 부리고 난리를 쳐도 저건 반짝반짝, 안 변하는기다. 그러니까 이렇게 행복할 때 별을 봐 둬야지, 나중에 봐도 지금이 생각나지 않겠나.

돌이켜보면 카게히라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슈 자신이 얼마나 힘들지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녀석을 원망해도 되는 것이다. 운반중인 시신이 무거웠고, 얼어붙은 뺨에는 이제 감각이 없었으며, 팔과 다리가 뻣뻣했다. 미카가 죽은 후의 하루하루가 꼭 그랬다. 아침식사를 먹어줄 사람이 없었고, 꽃이 떨어져도 꺾어올 사람이 없었고, 옆에서 함께 잘 사람이 없었고, 카게히라 미카가 없었다. 집 안에, 자주 가던 가게에, 뜰에 무대에 거리에 세상에 우주에 아무 것도 없었다. 휑하니 비어 온통 새하얀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는 남극의 설원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무 의미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 남은 나에게 너는 무엇을 바라며 이런 것을 부탁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너에게 꽤 쌀쌀맞았다. 네 나름의 복수인 걸까. 이제 내게 정을 줄 수 있는 시간은 끝났기에 원망만이 남은 걸까. 그렇대도 마지막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설원 위에 미리 확인해둔 장소가 보인다. 슬슬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어떻게든 도착해냈다. 슈는 장치를 설치하고 시신을 바닥에 고정했다. 레이스와 원석과 금으로 점철된 의상 위에 천을 덮었다. 평균 영하 50도의 날씨에서, 너는 이제 얼어붙을 것이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되어, 완벽한 인형인 그대로. 흠결도 없이, 핏기도 체온도 세상에 남겨줄 사랑도 없이.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틀림없이 얼어붙을 것이므로. 슈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는데, 불빛도 건물도 없는 남극의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검게 빈 하늘에, 쏟아질 듯 별이 반짝거렸다. 눈이 멀 것처럼 빛이 알알이 충만했다. 시리도록 쏟아지는 빛의 향연 속에서 슈는 눈으로 더듬듯 푸른 빛깔의 별 네 개를 찾았다. 아무 것도 없는 남극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는 남십자자리. 아, 네가 가리켰던 별이다. 너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보던 별이 반짝인다. 봐, 카게히라. 우리가 저 우주에서 점멸하고 있어.

 

미카>슈

사투리 검수해주신 캣님 감사합니당! 갑자기 얀데레 뽕이 차서 그만…
어둡고 칙칙한 내용. 과거날조 가정폭력 쩌는 캐붕 얀데레 주의, 중간에 낀 에이치 주의

 

 

* * *

 

 

1. 눈치를 보며 올려다보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눈초리가 기분나쁘다며 손찌검을 했다. 항상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은 그림자로 어두웠다. 아버지는 임신한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할 만큼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으나 인내심이 많지는 않았다. 거나하게 취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는 미카를 피도 안 섞인 녀석이라고 불렀다. 아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맞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머니는 집안 가득 드리운 그늘 속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숨겼다.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를 드리운 어머니는, 미카가 서툰 솜씨로 일을 돕거나 꽃을 꺾어오면 얼굴을 들고 환하게도 웃었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내는 어머니는 퍽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반짝거리는 것, 알록달록한 것, 화려한 것을 찾아다녔다.

어느 겨울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트리를 만들었다. 나무의 주변에 달콤한 사탕과 빛나는 별을 달았다. 색색의 전구가 반짝거렸다. 둘이 함께 학교에서 배운 캐롤을 흥얼거리는 동안, 아버지가 들어왔다. 이런 거나 하고 있으니 집안이 이 꼴이지. 작은 트리를 후려치려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처음으로 막아섰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의 손목을 잡은 미카는, 더 이상 아버지를 마냥 올려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망함과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아버지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겨울 외투 주머니에 비상금 몇 장을 챙겨서 후다닥 집을 뛰쳐나왔다. 서리서리 내리는 눈발이 코와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걸을수록 뺨이 빨갛게 곱고 귀가 떨어질 듯 얼어붙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이나 거리를 서성거리다 번화가에서 가장 큰 매장에 들어갔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연말의 베이커리에서 구석의 빈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 뺨을 녹이며 버터와 밀가루 냄새를 맡다가, 배에서 커다랗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수치심을 따질 상황이 아닌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구 들은 사람은 없겠지. 달아오른 뺨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한쪽 안구를 잘못 끼운 건가?”

“누, 누굽니꺼?!”

“나는 이츠키 슈. 유메노사키 학원의 제왕이다.”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2. “한 시간 지났다. 씻는 건 자유지만, 원래 이렇게 동작이 굼뜬 건가?”

“아니, 내는……, 거품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신기해서 말입니더.”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핑계였다. 호텔 욕조에서 몽실몽실 장미향이 나는 거품에 감싸인 채 미카는 멍하니 생각했다. 일단 따라오기는 했지만 대체 뭐하는 사람인 걸까? 역시 그런 취향인 걸까? 몸을 요구하려나? 그렇다면 오히려 목적이 확실하니 다행이다. 이상한 빌미로 협박하지 않는다면 하루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운을 띄웠다.

“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래 받아도 되나 모르겠습니더.”

“흥. 혼자서 쓰기는 넓은 방인데, 네 녀석이 내내 거기 앉아있는 꼴도 못 봐주겠고 말이다. 기껏해야 중학생인가? 집을 나왔지? 억지로 사정을 묻지는 않겠어. 내일은 제대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집은, 싫은데.”

“흠.”

무심코 내뱉은 말에 상대가 잔소리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별 말 없이 수긍한 듯했다. 걱정해주는 소리에 뾰쪽한 소리로 받아친 꼴이라 괜히 무안해져, 다른 말을 붙여보았다.

“그쪽은, 이쪽 사람 아니지예? 뭐하러 여기까지 왔심꺼? 관광 왔답니꺼?”

“말은 편하게 해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날 것 같은데 거북하군. 나도 고등학교 1학년이다.”

“엑……. 그런데 혼자 여기까지 왔습니꺼? ……와, 왔나?”

“전시회를 보러 왔다.”

“그것때매 혼자서 왔다고?”

“그래. 가출하는 불량한 녀석이라도 이 입장권에 쓰인 글은 읽을 수 있겠지. 고딕 그로테스크 미술전, 보이나? 뭐 이렇게 얘기해도 너 같은 범인凡人의 미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야……, 이거 가고일이고마. 이런 게 잔뜩 있다는긴가? 볼만하겠구마.”

“미술에 대해 아나?”

“그냥, 내 무서운 걸 쪼매 좋아해서……..”

탐색하듯이 날카로운 눈빛에 미카는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해서 대답했다. 그리고 곧 슈가 자신의 가운 아래 목덜미와 가슴을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카는 잽싸게 옷깃을 끌어올려 멍자국이 남은 목을 가렸다. 하지만 반사적인 반응도 소용 없이 슈가 검지를 멍자국 위에 올리고 목을 따라 천천히 훑었다. 손길을 따라 머리끝까지 소름이 올랐다. 얼굴을 닿을 듯 가까이 대고 빤히 바라보던 슈가 한손으로 가운을 끌어내렸다. 깡마른 상체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여, 역시 그거였나? 아까 걱정하는 척 하던 건 위장이었나? 미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응이 빠르군. 못 먹어도 자세와 균형은 괜찮고. 몸의 조형도 좋고, 얼굴도 괜찮은데……, 그렇군. 소재는 상당한데, 자국과 흠집이 많아. 취급이 험하군.”

“……?”

“너. Valkyrie에 들어와라.”

“??????”

 

 

 

 

3. 자기 전에 단 것을 먹는 것이 습관이었다. 사탕을 꺼내려고 바구니를 뒤적거리던 미카는, 붉은 색 사탕을 찾지 못해 물건을 잔뜩 헤집다가 바닥에 깔린 표를 발견했다. 어쩐지 한숨이 났다. 그 사람에게 받았던 Valkyrie 공연의 특등석 티켓. 그렇대도 공연 하나 보려고 그쪽까지 가기는 역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알아보니 못해도 만 엔은 하는 물건이었다. 암표로 팔면 값을 뻥튀기해서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미카는 이도저도 못하고 바구니를 계속 뒤적거리다가 작은 곰인형을 꺼냈다. 호텔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구멍난 테디베어였다. 어디서 더러운 걸 주워오냐고 호통을 치던 슈는, 버려진 곰이 꼭 자신 같다는 미카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 앉아 바늘귀에 실을 꿰기 시작했다.

미카는 잠들지 못하고 곰인형의 배 위에 실로 막은 까끌한 땜빵 부분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4. 스테이지는 바닥이 꽤 높았다. 관계자석이니만큼 무대가 가까이 보였지만 대신 관람하려면 꽤 고개를 들어야 해서 목이 아팠다. 수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려 긴장되었다. 역시, 이런 곳은 나랑 안 어울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무대 정중앙에 핀 조명이 꽂히며 그가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들며 양손을 지휘하듯 올리자 웅성거리던 관중이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두컴컴한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광선 속에 무대 구석구석 장식한 황동의 마감재와 금빛의 추녀가 빛난다. 서로 짜맞춘 백여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끼릭거린다. 톱니바퀴의 움직임에 맞추어 바닥에서 금발의 아름다운 인형들이 춤을 춘다.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와, 어슴푸레 빛나는 조명과,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주 소리가 하나가 된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눈 앞에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망설임도 불안감도 없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 가느다란 손끝으로 세계를 지휘한다. 황홀감으로 눈이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곧이어 음악에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얹혔다. 허리를 곧게 펴고 만족스러운 미소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5. 기대에 미치지 못해 늘 타박을 들을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츠키 슈는 마치 미카의 아버지라도 된 마냥 행동했다. 잔소리를 하고, 행동거지를 타박하고, 설교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때리지 않는다. 저녁마다 몸의 치수를 재며 근력이 부족하다고 야단치고는 아침마다 영양표를 따져가며 음식을 하고, 심한 말을 한 후에도 끝까지 연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는 꼭 아버지 같지만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니 심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새 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으면 지켜보는 스승님의 눈끝이 가늘어지고, 긴장으로 아랫배가 조여오지만, 마침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렇게나 까다로운 남자의 합격선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츠키 슈는 천재였다. 제왕이나 신이라고 하는 말이 이 학원에서는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에 따라 연습한 자신이 완성하는 무대에서, Valkyrie는 최강이다. 학원의 학생들은 Valkyrie의 멤버인 미카를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생전 처음 겪는 그런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높은 스테이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늘, 낮은 곳에서 상대를 올려다 보았으니까.

가끔 밤에는 집 앞을 걸으며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멀리서 지내면서 괜찮아? 같이 사는 사람들이 해코지하진 않고? 응, 괜찮다. 엄마. 내는 요즘 최고로 행복하다. 엄마야말로 잘 있나. 아빠가 손찌검 안 하고? 돈 보낼 테니께 괜히 아껴두지 말고, 엄마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슈가 홱 돌아보며 쏘아보았다.

“뭘 하고 이제야 오는 거냐. 밤바람이 찬데 그런 차림으로, 감기라도 걸려서 나의 완벽한 무대를 망칠 셈인가? 너는 Valkyrie의 귀중한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인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미안타, 스승님. 내 머리도 나쁘고 잘 하는 거 하나 없어서, 그래도 그만큼 뭐라도 더 열심히 하고 싶은기다. 뭐하노? 의상 만드나? 바느질 도와줄까?”

“윽, 들어오지 마라. 가까이 오지도 마라! 누가 작업중인 작품을 함부로 만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몸에 함부로 손대는 것도 싫다! 아무리 실패작이라도 좀 더 분별을 가져라, 카게히라!”

“헤헤, 미안타. 내 또 이렇다니께. 그래도 내 Valkyrie를 윽수로 좋아하니께 내일도 열심히 할께?”

“웃을 생각이 드나? 나는 지금 너를 야단친 거다. 이 정도 말로는 안 되나? 머리에 뇌가 안 들어있는 건가? 내일 무대는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들어가서 데워놓은 차를 마셔라.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이상한 녀석이군.”

“그러게. 이상하네.”

정말 이상하지. 나는 원래 쓰레기장에 사는 재투성이 까마귀였는데. 지금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된 것만 같아. 레몬 재운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웃음이 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6. 꿈은 깨어나라고 있는 것이다.

 

 

 

7. 낯선 사람이 집안에 있었다. 당당한 자세도 없이, 꺾이지 않는 눈빛도 긍지도 없이, 하루종일 인형과 함께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당혹스러웠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스승님, 스승님이다. 내가 언제고 좋아해 마지않았던 이츠키 슈다. 아버지, 하늘, 빛. 스승님은 언제나 완벽하다. 지금은 단지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 언제고 Valkyrie는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다.

 

 

 

8.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무대 자금이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스승님에게 크로와상을 사가고, 더는 받아주지 않는 예전 무대를 알아보다가 울컥 눈물이 났다.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힘들 리가 없다. 그렇다고 스승님이 잘못한 건 아니다. 스승님이 잘못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fine, 그때부터 리더였던 그 학생회장의 소행이다. 그와 대화한 이후로 스승님이 이상해졌다. 미카는 학생회실에 달려가 혼자 있던 텐쇼인 에이치의 옷깃을 잡았다. 학생회장이 정신없이 기침하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콜록, 콜록……. 이런 건 징계 사유야, 카게히라 군.”

“……무례하게 군 것은, 미안합니더. 하지만 대체 스승님한테 뭐라고 한 겁니꺼? 어떻게 했길래 그 고고하던 스승님이 저렇게 됐슴니꺼? 나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더! 뭘 어떻게 한 건지 알려라도 주이소!”

하지만 에이치는 되려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 이야기는 들었어. 응, 내가 이츠키 군을 도발하기는 했어. 하지만 나도 이츠키 군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신이 아니니까. 말 몇 마디에 그렇게 무너지다니, 무언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 이츠키 군에게나, Valkyrie 그 자체에.”

“이제는 Valkyrie를 음해하는 깁니꺼?”

“글쎄, 외부인인 나보다는 아무래도 네가 더 잘 알겠지……. 안 그래, 카게히라 군?”

“그런 소리, 내는 듣지 않겠습니더. 사람을 결딴내 놓고, 정도가 지나칩니더.”

“그렇지만 역시, 카게히라 군에게는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학생회장은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는다.

 

 

 

9. 허탈하게 돌아온 집에서는 슈가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당연하게 마드모아젤이 놓여 있다. 한때는 나즈나와 마드모아젤의 반짝이는 금발을 동경했었다.

‘무언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 ‘

알고 있었다. 늘 곁에 있으면서, 그렇게 온 신경을 쏟아 바라보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독선적인 리더와, 그가 사랑한 죽은 여자와, 그 여자를 투영해 바라본 멤버와, 지나치게 편집증적인 노력과, 과로와, 스트레스와, 폭언과, 마스터라는 호칭까지. 무엇 하나 금방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도 지금도, 안다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미카는 허리를 굽혀,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슈의 손을 뒤에서 잡았다. 슈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어딜 갔었나, 카게히라.”

“미안타, 내가 너무 늦었제. 스승님, 내 밖에서 붕어빵이랑 크로와상도 사왔으니께. 쫌만 묵자.”

“이제는 너까지 나를 배신할 셈인가?”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의심하지 마라. 내가 스승님을 배신할 턱이 있나.”

“그래. 그래야지, 카게히라.”

미카는 슈의 곁에 바싹 붙었다. 웅크린 슈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대로 멈추었다. 이제 슈는 미카가 가까이 와도 야단치지 않는다.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가냘프게 하얀 얼굴이 오롯이 이쪽을 바라본다. 곱슬거리는 앞머리로 덮인 곧은 이마 아래, 말간 보라색 눈이 어서 다가와 도와달라는 기색을 띄고 눈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무대를 준비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흘끗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이, 이제는 미카만을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미카는 손을 잡고 슈를 끌어올렸다. 이끌려 올라오는 손은, 한때 높다란 무대 가운데서 거대한 세상을 지휘하던 손목은 가까이에서 볼수록 하얗고 가늘다.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한다고 손찌검이라도 한다면, 바로 한손으로 쥘 수 있을 것 같다. 숨이 가까이 닿는다. 인형처럼 창백한 뺨이 바로 곁에 있었다. 기묘한 충족감이 죄악감처럼 아랫배에 스민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보니까

‘카게히라 군에게는,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아?’

목소리가 최면처럼 머릿속을 울린다. 미카는 슈의 마른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서, 머리에서 열이 올랐다. 꿀꺽,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렸다.

“스승님. 내는…….”

“뭐냐, 카게히라.”

“미안하다. 내가, 내가 진짜 미안하다…….”

어쩌질 못하고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미카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꺽꺽 울었다. 이건, 숫제 패륜이다. 슈의 앞에서는 아닌 체 하지만 완전한 배신자이다. 이럴 수는 없다. 쓰레기장에서 구해 준 은인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고마운 마음과 애틋한 감정과 미안한 생각과 자기혐오가 어지럽게 뒤섞여 올라 미카는 한참이나 그렇게 목놓아 울고 말았다.

이제 미카는 더 열심히 뛰어다닌다. 접시를 닦고, 무대를 찾고,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Valkyrie를 홍보하고, 크로와상을 사고, 집에 늦지 않게 들어가고, 슈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준다. 슈가 나락까지 떨어진다면 함께 가겠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학생회장의 말이나, 지난 날의 과오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Valkyrie는 다시 명예롭게 천계를 비행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은망덕하다.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 나는 분명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벼락을 내릴 신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 곁에 있다.

슈그녀

CeZ0JQPUkAA3h4a 치님 슈그녀 그림 보고 써봤습니다! 동인설정이 가득이라 좀 2.5차창작같네요..ㅇ>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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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가본 지 올해로 꼭 삼 년이 되었다. 길다면 나름대로 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과 장면은 기억 속에 물감으로 마구 덧칠해놓은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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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언어

장미향기가 잔뜩 났어요. 아주 코를 찌를 지경이었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꽃에 둘러싸여 차 마시기를 좋아하시니, 장미를 산더미처럼 쌓아 보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시는 흰색 장미를 하얗고 하얗게 쌓았어요. 그런데 도무지 기분이 좋아지실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죠.

아, 이제 황제 폐하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려나요? 에이치는 학원을 졸업했으니까요.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니군요. 결코 잊지 못할 졸업식이었죠. 졸업식의 마지막 공연은 물론 학원 정점인 우리 「fine」이 맡았습니다. 아아, 「fine」의 「마지막」이라니 이 얼마나 유쾌하고 영광스러운가요?

귀여운 토리는 분명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알고 있어요. 제법 영악한 아이입니다. 작은 몸에 하얀 유닛복을 앙증맞게 걸치고 발을 구르고, 보는 사람이 웃음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애교를 부리죠. 그날은 특히나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답니다. 주인이 힘을 잔뜩 냈으니 원래도 완벽한 유즈루야 말할 여부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히비키 와타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무대에 입장할 때마다 탄성과 환호를 듣는 일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네, 확실히 그날의 공기에는 평소의 무대보다도 더 뜨겁고 애태우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의 등장입니다.

팡파르 속에서 황제 폐하가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거짓말처럼 환호성이 멎고 모두가 숨을 죽였어요. 에이치는 천사 같았어요.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가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랍니다. 갓 하늘에서 내려와서, 금방 다시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천사요. 희끄무레 웃는 에이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그 어느 무대에서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이것만은 제가 살아온 세월을 걸고 확언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습니다.

황제는 무대에서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학생회장이 병원에 실려가는 동안 졸업식은 끝났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꿈의 학원도, 한단지몽도, 무지갯빛의 서커스도 모두 끝났고 지금은 모라토리엄입니다.

그래도 아직 유예기간이 조금 남았죠. 원하던 대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거기에 조금 더 시간이 남았는데 왜 그리도 심통이 난 채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광대가 풀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에이치는 한 송이를 들고 장미 향기를 맡는 듯 얼굴을 가져다대더니 주먹을 쥐어 손에 쥔 꽃잎을 우그러뜨려버리더군요. 그리고 내던졌습니다.

“꽃이 마음에 차지 않나요?”

“응.”

참, 별일입니다. 곧 쓰러질 듯 아플 적에도 언변은 유창했던 우리 폐하가 아닙니까? 그런데 짧은 단답에 입조차도 꾹 닫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광대는 광대의 일을 하고, 폐하가 꽃이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성에 찰 만한 것을 가져와야죠.

그래서, 특히나 향이 빼어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장미를 대령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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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Blues

1. 십년 전, 저무는 저녁

밤이 되면 오는 것들이 있다. 어둑어둑 검게 지는 땅거미, 구름을 비추는 달, 멀리 야산에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와,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몰려다니는 오토바이, 반짝이는 별무리, 풀잎 위에 맺히는 이슬, 그리고 형. 형은 늘 밤에 왔다.

별들이 하나둘씩 눈을 뜨는 밤이면 어린 리츠도 반짝 눈이 뜨였다. 오늘 밤엔 형이 올까? 어둑어둑한 창가에 기대어 숨을 죽이고 문틈에 가만 귀를 기울이면 온갖 소리가 귓전에 부딪힌다.

건넛집 여자아이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좀 더 떨어진 곳에서 나이프가 사기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수레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나, 산기슭에서 새앙쥐가 짚단을 파먹는 소리와 귀를 긁는 모든 자잘한 소리들을 지나서 다시 방 안에는 제 작은 숨소리뿐. 기다림에 지쳐 리츠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밤에도 잠들었으면 좋았을걸.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시체처럼 방바닥에 누워, 한참을 눈만 깜박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개들끼리 서로 대답하듯 울음소리는 점점 크게 뭉쳐 화음이 되고, 그에 섞여 야산의 늑대 짖는 소리까지 울린다. 그때가 되면 리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홀린 듯 문을 열고 집을 나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닥타닥.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곧 아이는 날 듯이 밤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도 발걸음 못지않게 빠르게 뛰었다.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저녁, 저 멀리 우글거리는 개들의 그림자가 보이고, 그 가운데 검푸른 옷자락으로 몸을 감싼 밤의 왕. 형은 늘 밤에 개들과 함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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