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가 미카 입양하는 얘기

 

 

애완동물을 데려오는 감각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본가에서 순종적이며 얌전했고, 색이 예쁘고 보기 좋았으며, 밥도 그리 많이 먹지 않았다. 선뜻 손을 내밀자 믿을 수 없다는 듯 깜박대는 두 눈이 인형 같았다. 앞으로 이 무해하고 무력한 생물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는 전능감이 있었다.

가엾은 아이를 데려와 멀끔하게 키워내, 결혼까지 지켜보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청결한 옷을 입고, 예절을 배우고, 훌륭한 숙녀로 자라난 코제트가 외간남자와 결혼해 떠나자 장 발장은 결국 상심하고 쇠약해져 죽고 말았던가? 느닷없이 불길한 결말이 떠올라 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유메노사키 학원의 ‘제왕’인 자신이 그렇게 몰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명예, 돈, 친구가 있으면 세상 대부분의 일은 쉬워진다. 이츠키 슈는 열일곱의 나이에 세 가지를 전부 갖추고 있었다. 안 그래도 늘 내심 본가에서 나오고 싶었고, 마침 저번 방송의 출연료가 들어와 통장의 잔고도 적지 않게 두둑하니,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였다. 이츠키 슈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졸졸 따라오던 카게히라가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파란색과 노란색의 눈동자 두 쌍이, 깜박깜박. 티 없이 서글서글 말간 눈동자와, 치켜 올라간 눈매와, 희고 갸름한 턱선과, 빼빼 말랐지만 제대로 자리 잡은 골격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소재인지도 모르는 예술품이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허름한 옷에 둘둘 싸인 채 반짝반짝. 위아래로 훑어보며 씩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카게히라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허둥거리다 멍청하게 마주 웃는다. 이 이츠키 슈쯤 되니까 이렇게 먼지투성이가 된 소재도 발굴해내는 것이다. 노력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범재들이, 오기인이라고 불리는 친우 녀석들이 아름다운 Valkyrie의 새 멤버를 보고 경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니토를 발굴해 최고의 인형으로 조율했듯이, 이 녀석은 그 누구보다도 오롯이 빛나는 보석으로 연마될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대충의 코스는 정해두었다. 집은 작업할 공간이 딸린 곳으로 세 채를 봐두었고, 세탁기와 청소기는 소음이 적은 것으로, 식기와 가재도구 몇 가지는 일단 집에서 안 쓰는 것을 정리해 꾸려놓았다. 그러므로 갓 상경한 카게히라와는 가장 먼저 집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이 이츠키 슈의 안목에 달할 리는 없지만, 동거인의 최소한의 동의는 구하는 것이 좋겠지.

첫 번째 집은 마트와 상점가에 인접해 있었다. 소란스러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학원에 등하교하는 동선이 가장 가까운 곳이다. 계약료는 조금 비싸지만 봐둔 곳 중 가장 잔여공간이 넓은 집이었다. 집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심플한 마감을 꼼꼼히 훑어보다가 뒤를 돌아보니, 카게히라는 침대 위에 앉아 퉁퉁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것 봐라, 스승님. 침대가 무지하게 크다. 쿠션도 좋구마! 내 집에서는 이불만 덮고 지냈는데, 이런 데서 자게 된다니 진짜 신기한기다.”

“쯧, 지금 뭐하는 거냐! 예의에 어긋난다. 내려와라, 카게히라!”

“아, 신난다! 스승님도 일로 와봐라. 이거 진짜 재밌는데.”

“그만 둬라, 카게히라!”

슈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무언가 둔탁하게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응아아……?”

멍한 얼굴로 일어난 미카의 몸 아래로, 아래로 푹 꺼진 매트리스가 힘없이 흔들렸다.

 

 

두 번째 집은 공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집 앞에 가만히 서서 냄새를 맡으면 공원의 풀냄새와 뒤섞인 꽃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곳으로, 바닥에 파스텔톤의 들꽃이 자잘하게 피어 있었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경이건만 카게히라는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시체마냥 힘없이 뒤를 질질 따라오는 녀석의 몸짓이 맘에 들지 않아 슈는 뒤따라오는 카게히라를 찌릿 노려보았다.

“카게히라.”

“응, 응아아! 스승님!”

“네 녀석이 살 집이다. 볼 마음이 없는 거냐?”

“아, 아니! 볼끼다, 볼끼다!”

“아주 땅바닥에 붙겠군. 도무지 못 봐주겠어. 잘 들어라, 카게히라. Valkyrie는 아첨하지 않는다. 한 번 실수했다고 고개를 내리지도 않는다! 내 인형이 되려면 그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쳐야겠군. 고작 몇 만 엔에 네 녀석을 내다버리지 말라는 거다. 얼굴을 들어라!”

“으응, 내 스승님 하는 말 뜻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억쑤로 멋지고마. 그라믄, 내도 같이 들어가서 보면 되는기가?”

“흥, 그 정도는 내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해라. 말을 잘 듣는 건 좋지만 너무 멍청한 인형은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까지 말한 후에야 카게히라는 좀 죽상이 풀려서 슬그머니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닐 테니 외지에 와서 이래저리 적응이 덜 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슈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지역에 터를 잡고 활동하던 미술가가 살던 곳이었다.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이 살기에는 조금 좁을지도 모르지만, 화가가 구석구석 아크릴로 그려 놓은 주변 꽃과 정경의 낙서가 마음에 들어 골라두었다. 집 자체만으로도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카게히라 녀석도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구석에 쭈그려 앉아 꽃의 그림을 들여다다보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신기하구마. 꽃 위에 있는 게 진짜 나비인 줄 알았데이. 근데 만져보니까 안 잡혀가꼬 아닌 줄 알았다. 어라, 까슬까슬하네.”

“잠깐, 카게히라……! 그건 건들지 마라!”

“어어, 떨어지네. 어어……?”

금방 날아갈 것 같던 금색 나비가 어느새 카게히라의 손끝에서 마른 물감 조각이 되어 부스러졌다. 옆에 서 있던 집주인이 발을 뚝 멈추고 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뭐지? 무해하고 무력하고 내가 돌봐주어야만 하는 생명체는, 어디로 갔지?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유리알 같은 눈을 예쁘게 깜박깜박하는 카게히라를 보며 멍하니 서 있던 슈는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 녀석은 비글이다. 귀엽고 작고 천사처럼 눈이 예쁘지만, 왕왕 뛰어다니며 발에 닿는 것마다 부서뜨려 버린다.

 

 

세 번째 집은, 지금까지 본 집들에 비하면 울타리도 낮고 단출했다. 워낙 조촐한 집이어서인지 집주인은 바쁜 용무가 있다고 집 앞까지 두 사람을 데려다주고 떠난 후였다. 어느새 오후가 되어 햇살이 가까웠고, 구름이 나지막이 벚꽃 가지 사이로 흘러갔다. 가지 끄트머리에 진한 분홍색 꽃망울이 움터 있었다. 카게히라 녀석이 입학해서 정신이 없을 때쯤 한창 벚꽃이 하얗게 흐드러지겠지. 슈는 발치에 떨어진 봉오리 하나를 주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내부 역시 단출했다. 목재로 댄 바닥에 늦은 햇빛이 쏟아들었다. 슈는 상처가 많은 바닥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무던하고 아늑한 방에는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있었다. 어릴 때 자주 놀러가던 친구의 집을 닮은 듯도 했다. 집이 갈 곳이 되지 못하는 아이가 지내기에는, 어쩌면 오히려 이런 곳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슈 자신이 그랬듯이.

“단출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군. 네가 보기엔 어때, 카게히라.”

카게히라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거렸다. 그 모습이 답답해 혀를 찼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아니, 스승님 좋은 방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내가 보는 게 뭐 중요하나.”

“젠장, 네 녀석이 뭐라도 말을 해야 내가 결정을 하지 않겠어!”

답답함을 못 이겨 빽 소리를 지르자 카게히라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대……, 대체 뭐냐!”

“미안하다. 내, 너무 신나서……. 스승님이, ‘우리 집을 보러 가자’고 하는 게 너무 신나서, 내 스승님한테 얹혀사려는 것뿐인디, 속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 같다. 미안타, 스승님. 내 미안타, 흐윽…….”

“시끄럽다,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해라!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는, 아부지 집에 신세지는 거였으니께……, 우리 집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래서 내 주제도 모르고 내 집 고르는 것마냥 신나버린기다. 내 그만 스승님 방해하지 않고 바로 짐 싸서 조용히 집에 돌아갈게. 집 보상비는, 어떻게든 부쳐서 갚을 테니께. 너무 심려치 말고……. 고마웠다, 스승님.”

젠장. 슈는 혀를 쯧 차고 훌쩍이는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급히 손을 당기자 손등을 덮은 소매가 걷혀 까만 멍자국이 드러났다.

애완동물을 데려오는 감각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불결한 곳에서 제 어버이에게 천대당하며 불우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는 비쩍 마른 강아지나 까마귀 같은 녀석을, 내가 어서 구해주어야 한다는 정의감이나 불안감에 사로잡혀 급하게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훌쩍이고 있는 녀석을 보았을 때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동정인지, 방치된 예술품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욕심 섞인 섣부른 충동이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고작 열일곱 살짜리 고등학생이 한 살 어린 아이를 일부러 데려오겠다고 생각했던 그 충동적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카게히라 미카가 발갛게 부은 두 눈을 들어 슈를 쳐다보았다. 이츠키 슈는 아마 이런 것이 자신의 인형에 대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카게히라.”

“으응.”

“이 나를 뭘로 보는 거지?!”

슈가 다시 얼굴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미카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크게 떴다.

“그저 심심해서 너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나? 내 인형은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그저 멋으로 유메노사키의 제왕이라고 생각하나? 최소한 네 녀석의 버러지 같은 품행을 감싸줄 정도의 소양은 있다는 거다. Valkyrie는 완벽이다. 네 녀석이 아무리 거치적거리는 실패작이어도 내 실과 설계로 감출 수 있어. 그리고, 마드모아젤을 봐라. 오래된 앤틱 인형이지만 내 소중한 보물이지. 설령 시간이 지나 네놈이 폐품이 되고,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어도 내가 공들이면 다시 조율해낼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와서 멋대로 벗어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는 이미 내 실 안에 있어. 이해했나? 그 학습능력 없는 머리에도 이 정도로 말해 뒀으면 알아들었겠지?”

“으응, 아니…….”

다시 뒷목이 띵해왔다. 혈압이 팍 오르는데 카게히라가 헤헤 웃었다. 그러고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글은, 눈만큼은 천사처럼 예쁘던가.

“스승님 하는 말, 내는 제대로 모르겠고……. 그래도 이기는 알 것 같다. 스승님은 내 행운이다. 아부지랑은 반대야. 고마워서 우짜지. 내는, 이렇게 재주도 재물도 없고 실수투성이라, 스승님한테 보답할 방법이 하나도 없는디. 지금 내 이렇게 빈손이라, 주고 싶어도 줄 게 하나도 없다…….”

“쯧, 보답할 생각 따위 말아라. 네 녀석이 나한테 보답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릴 해야지. 주제넘다, 카게히라.”

“그래, 생각났다! 그라믄 나도 스승님이 폐품이 되어도 안 버릴게! 스승님이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어도 내가 옆에서 조율해줄게!”

“뭐어어? 감히 네 녀석이 유메노사키의 제왕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역시 미안타, 내 이렇게 눈치가 읎어서! 그치만, 지금 줄 게 없으니 나중에 갚는 수밖에 읎잖나.”

“쯧, 됐다. 말을 말자. 앞으로 가르칠 게 잔뜩이겠군. 네 그 빈 머리에 교양과 복종을 채워넣어 주지. 나는 네 녀석에게 도움 받을 정도로 형편없지 않아. 내 조율과 인도는 완벽하니, 너는 이제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인형으로 명령만 가만 따르면 되는 거다. 니토, 니토를 만나야겠군……. 니토를 보면 너도 완벽한 인형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될 거다.”

“응! 그 윽수로 이쁜 누나 내도 좋다!”

“형이다.”

“에에엑? 거짓말! 내를 바보로 아는기지! 안 속는다!”

“하아……, 말을 말자. 내일 보면 알겠지.”

“응아, 놀리지 마라!”

카게히라는 작은 새처럼 쉴 새 없이도 떠들었다. 빈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날이 저물었고, 봄이 되고, 벚꽃이 피었다가는 졌다. 그렇게 아늑한 집에서 마드모아젤의 낡은 안구를 두어 번 바꾸어 줄 때까지 시간이 흘렀다.

 

미카가 죽은 미카슈

 

 

이름 모를 열병. 한 사람의 사망원인으로 머리에 새기기에는 지나치게 덧없는 단어였다. 문득, 카게히라 미카가 꼭 그런 모양으로 자신에게서 사라지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번듯한 이름도, 흔적도 자취도 없이, 처음부터 그에게 없었던 것처럼. 하기사 그랬다면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했을 리 없다. 이츠키 슈는 지금 남극에 있다.

사망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것은 슈가 어리석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결코 위생상태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곳에서 오래 지냈고, 그런 일을 했었다. 언제 어느 균이 몸에 들어 언제부터 약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응당 그래야 했던 것처럼 미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기 위해 마지막까지 따져보는 것이 이츠키 슈가 그 어리석은 까마귀를 위해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어리석음이었다.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고, 늘 실수투성이에, 과거까지 무던하게 곱지 못해 그렇게 죽어버린 그 아이였으나 마지막 모습만큼은 더없이 인형다웠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진즉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야만 했다. 사투리도 표준어도 되지 못하는 말을 더듬거리다가 못 들어주겠다고 호통을 치자 아이는 내가 뭐 그렇지, 하며 헤헤 웃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카게히라 미카는 완벽하게 바른 표준어를 일상에서 구사했다. 하면 되는데 안 하고 있었나. 그러게, 스승님. 내가 멍청했네.

실수가 잦던 아이가 제로콤마 일 초까지 어긋나지 않는 무대를 섰다. 노래하는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초조할 때 자꾸 다리를 떨고 손가락을 깨물던 아이가 이제는 시선을 곧게 두고 허리를 꼿꼿이 했다. 그렇게 차례차례 슈가 지적하던 모든 것이 ‘고쳐졌을’ 때,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 나는 이제 괜찮은 인형이야? 슈가 무덤한 목소리로, 그렇군. 이제 꽤 흠잡을 데가 없게 되었군. 흠 없는 인형이다. 이렇게 대답하자 미카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말했다. 스승님. 나 얼마 남지 않았어.

시체의 상체는 양호하다. 미카는 더 보기 싫게 야위기 전에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 남은 돈을 전부 흉터 수술비에 쏟아부었다. 더 이상 이츠키 슈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것을 바랄 것 같느냐고 소리를 지르자 미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서는 마드모아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스승님은 죽은 사람을 오래 기억하잖아. 만약에 내 인형을 만든다면 얼룩투성이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내 잘못이었을까? 나 때문에 그 아이가 비뚤어진 걸까? 돌이켜 보아도,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졸업 후에도 함께 살았다.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카가 장을 보고, 슈가 아침을 하고, 집 앞에 떨어진 벚꽃을 주워 마드모아젤의 머리에 장식하고, 무대를 연습하다가, 녹초가 되어 돌아와 바느질을 하다가, 슈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미카가 담요를 덮어주다가 뺨에 입을 살짝 맞추고, 슈가 그만 눈을 뜨면 불을 껐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고 난 후에는 별을 보았다. 쌀쌀한 새벽의 뜰에서 미카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별자리들의 이름을 불렀다.

스승님, 저거 보이나. 저쪽 밝은 별이 북극성이다. 응, 그 노란 별이랑, 그 아래 주황색 별 보이나. 거기까지 사이에 별 세개 보이제. 쭉 이어서, 고 옆에 있는 별들까지 하면 작은곰자리인기다. 곰 안같다고? 헤헤, 내 보기도 그래…. 근데 그거 아나? 북극성이란기는 정해진 게 아니라 그냥 천구 북쪽에 있는 별을 부르는기다. 오래 전에는 다른 별이 북극성이었다 카지 않나. 지금 남극성은 없고, 대신 남십자자리라고 길잡이별이 있거든. 건 위도가 높아서 지금 여기서는 못 보고, 훨씬 더 남쪽에, 내 고향에 가면 잠깐씩은 보인다. 언젠가는 스승님이랑 같이 보고 싶으네.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미안하다. 그런데 스승님 지금 얼굴 빨개지지 않았나? 농담이다. 깜깜해서 안 보이는걸. 반~짝 반짝 머리위에 도는 별만 보이지. 나는 별이 좋다.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안 변하잖나. 아무리 땅 위에서 사람들이 추태 부리고 난리를 쳐도 저건 반짝반짝, 안 변하는기다. 그러니까 이렇게 행복할 때 별을 봐 둬야지, 나중에 봐도 지금이 생각나지 않겠나.

돌이켜보면 카게히라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슈 자신이 얼마나 힘들지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녀석을 원망해도 되는 것이다. 운반중인 시신이 무거웠고, 얼어붙은 뺨에는 이제 감각이 없었으며, 팔과 다리가 뻣뻣했다. 미카가 죽은 후의 하루하루가 꼭 그랬다. 아침식사를 먹어줄 사람이 없었고, 꽃이 떨어져도 꺾어올 사람이 없었고, 옆에서 함께 잘 사람이 없었고, 카게히라 미카가 없었다. 집 안에, 자주 가던 가게에, 뜰에 무대에 거리에 세상에 우주에 아무 것도 없었다. 휑하니 비어 온통 새하얀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는 남극의 설원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무 의미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 남은 나에게 너는 무엇을 바라며 이런 것을 부탁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너에게 꽤 쌀쌀맞았다. 네 나름의 복수인 걸까. 이제 내게 정을 줄 수 있는 시간은 끝났기에 원망만이 남은 걸까. 그렇대도 마지막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설원 위에 미리 확인해둔 장소가 보인다. 슬슬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어떻게든 도착해냈다. 슈는 장치를 설치하고 시신을 바닥에 고정했다. 레이스와 원석과 금으로 점철된 의상 위에 천을 덮었다. 평균 영하 50도의 날씨에서, 너는 이제 얼어붙을 것이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되어, 완벽한 인형인 그대로. 흠결도 없이, 핏기도 체온도 세상에 남겨줄 사랑도 없이.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틀림없이 얼어붙을 것이므로. 슈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는데, 불빛도 건물도 없는 남극의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검게 빈 하늘에, 쏟아질 듯 별이 반짝거렸다. 눈이 멀 것처럼 빛이 알알이 충만했다. 시리도록 쏟아지는 빛의 향연 속에서 슈는 눈으로 더듬듯 푸른 빛깔의 별 네 개를 찾았다. 아무 것도 없는 남극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는 남십자자리. 아, 네가 가리켰던 별이다. 너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보던 별이 반짝인다. 봐, 카게히라. 우리가 저 우주에서 점멸하고 있어.

 

미카>슈

사투리 검수해주신 캣님 감사합니당! 갑자기 얀데레 뽕이 차서 그만…
어둡고 칙칙한 내용. 과거날조 가정폭력 쩌는 캐붕 얀데레 주의, 중간에 낀 에이치 주의

 

 

* * *

 

 

1. 눈치를 보며 올려다보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눈초리가 기분나쁘다며 손찌검을 했다. 항상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은 그림자로 어두웠다. 아버지는 임신한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할 만큼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으나 인내심이 많지는 않았다. 거나하게 취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는 미카를 피도 안 섞인 녀석이라고 불렀다. 아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맞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머니는 집안 가득 드리운 그늘 속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숨겼다.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를 드리운 어머니는, 미카가 서툰 솜씨로 일을 돕거나 꽃을 꺾어오면 얼굴을 들고 환하게도 웃었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내는 어머니는 퍽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반짝거리는 것, 알록달록한 것, 화려한 것을 찾아다녔다.

어느 겨울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트리를 만들었다. 나무의 주변에 달콤한 사탕과 빛나는 별을 달았다. 색색의 전구가 반짝거렸다. 둘이 함께 학교에서 배운 캐롤을 흥얼거리는 동안, 아버지가 들어왔다. 이런 거나 하고 있으니 집안이 이 꼴이지. 작은 트리를 후려치려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처음으로 막아섰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의 손목을 잡은 미카는, 더 이상 아버지를 마냥 올려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망함과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아버지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겨울 외투 주머니에 비상금 몇 장을 챙겨서 후다닥 집을 뛰쳐나왔다. 서리서리 내리는 눈발이 코와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걸을수록 뺨이 빨갛게 곱고 귀가 떨어질 듯 얼어붙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이나 거리를 서성거리다 번화가에서 가장 큰 매장에 들어갔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연말의 베이커리에서 구석의 빈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 뺨을 녹이며 버터와 밀가루 냄새를 맡다가, 배에서 커다랗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수치심을 따질 상황이 아닌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구 들은 사람은 없겠지. 달아오른 뺨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한쪽 안구를 잘못 끼운 건가?”

“누, 누굽니꺼?!”

“나는 이츠키 슈. 유메노사키 학원의 제왕이다.”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2. “한 시간 지났다. 씻는 건 자유지만, 원래 이렇게 동작이 굼뜬 건가?”

“아니, 내는……, 거품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신기해서 말입니더.”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핑계였다. 호텔 욕조에서 몽실몽실 장미향이 나는 거품에 감싸인 채 미카는 멍하니 생각했다. 일단 따라오기는 했지만 대체 뭐하는 사람인 걸까? 역시 그런 취향인 걸까? 몸을 요구하려나? 그렇다면 오히려 목적이 확실하니 다행이다. 이상한 빌미로 협박하지 않는다면 하루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운을 띄웠다.

“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래 받아도 되나 모르겠습니더.”

“흥. 혼자서 쓰기는 넓은 방인데, 네 녀석이 내내 거기 앉아있는 꼴도 못 봐주겠고 말이다. 기껏해야 중학생인가? 집을 나왔지? 억지로 사정을 묻지는 않겠어. 내일은 제대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집은, 싫은데.”

“흠.”

무심코 내뱉은 말에 상대가 잔소리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별 말 없이 수긍한 듯했다. 걱정해주는 소리에 뾰쪽한 소리로 받아친 꼴이라 괜히 무안해져, 다른 말을 붙여보았다.

“그쪽은, 이쪽 사람 아니지예? 뭐하러 여기까지 왔심꺼? 관광 왔답니꺼?”

“말은 편하게 해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날 것 같은데 거북하군. 나도 고등학교 1학년이다.”

“엑……. 그런데 혼자 여기까지 왔습니꺼? ……와, 왔나?”

“전시회를 보러 왔다.”

“그것때매 혼자서 왔다고?”

“그래. 가출하는 불량한 녀석이라도 이 입장권에 쓰인 글은 읽을 수 있겠지. 고딕 그로테스크 미술전, 보이나? 뭐 이렇게 얘기해도 너 같은 범인凡人의 미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야……, 이거 가고일이고마. 이런 게 잔뜩 있다는긴가? 볼만하겠구마.”

“미술에 대해 아나?”

“그냥, 내 무서운 걸 쪼매 좋아해서……..”

탐색하듯이 날카로운 눈빛에 미카는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해서 대답했다. 그리고 곧 슈가 자신의 가운 아래 목덜미와 가슴을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카는 잽싸게 옷깃을 끌어올려 멍자국이 남은 목을 가렸다. 하지만 반사적인 반응도 소용 없이 슈가 검지를 멍자국 위에 올리고 목을 따라 천천히 훑었다. 손길을 따라 머리끝까지 소름이 올랐다. 얼굴을 닿을 듯 가까이 대고 빤히 바라보던 슈가 한손으로 가운을 끌어내렸다. 깡마른 상체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여, 역시 그거였나? 아까 걱정하는 척 하던 건 위장이었나? 미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응이 빠르군. 못 먹어도 자세와 균형은 괜찮고. 몸의 조형도 좋고, 얼굴도 괜찮은데……, 그렇군. 소재는 상당한데, 자국과 흠집이 많아. 취급이 험하군.”

“……?”

“너. Valkyrie에 들어와라.”

“??????”

 

 

 

 

3. 자기 전에 단 것을 먹는 것이 습관이었다. 사탕을 꺼내려고 바구니를 뒤적거리던 미카는, 붉은 색 사탕을 찾지 못해 물건을 잔뜩 헤집다가 바닥에 깔린 표를 발견했다. 어쩐지 한숨이 났다. 그 사람에게 받았던 Valkyrie 공연의 특등석 티켓. 그렇대도 공연 하나 보려고 그쪽까지 가기는 역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알아보니 못해도 만 엔은 하는 물건이었다. 암표로 팔면 값을 뻥튀기해서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미카는 이도저도 못하고 바구니를 계속 뒤적거리다가 작은 곰인형을 꺼냈다. 호텔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구멍난 테디베어였다. 어디서 더러운 걸 주워오냐고 호통을 치던 슈는, 버려진 곰이 꼭 자신 같다는 미카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 앉아 바늘귀에 실을 꿰기 시작했다.

미카는 잠들지 못하고 곰인형의 배 위에 실로 막은 까끌한 땜빵 부분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4. 스테이지는 바닥이 꽤 높았다. 관계자석이니만큼 무대가 가까이 보였지만 대신 관람하려면 꽤 고개를 들어야 해서 목이 아팠다. 수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려 긴장되었다. 역시, 이런 곳은 나랑 안 어울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무대 정중앙에 핀 조명이 꽂히며 그가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들며 양손을 지휘하듯 올리자 웅성거리던 관중이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두컴컴한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광선 속에 무대 구석구석 장식한 황동의 마감재와 금빛의 추녀가 빛난다. 서로 짜맞춘 백여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끼릭거린다. 톱니바퀴의 움직임에 맞추어 바닥에서 금발의 아름다운 인형들이 춤을 춘다.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와, 어슴푸레 빛나는 조명과,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주 소리가 하나가 된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눈 앞에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망설임도 불안감도 없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 가느다란 손끝으로 세계를 지휘한다. 황홀감으로 눈이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곧이어 음악에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얹혔다. 허리를 곧게 펴고 만족스러운 미소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5. 기대에 미치지 못해 늘 타박을 들을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츠키 슈는 마치 미카의 아버지라도 된 마냥 행동했다. 잔소리를 하고, 행동거지를 타박하고, 설교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때리지 않는다. 저녁마다 몸의 치수를 재며 근력이 부족하다고 야단치고는 아침마다 영양표를 따져가며 음식을 하고, 심한 말을 한 후에도 끝까지 연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는 꼭 아버지 같지만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니 심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새 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으면 지켜보는 스승님의 눈끝이 가늘어지고, 긴장으로 아랫배가 조여오지만, 마침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렇게나 까다로운 남자의 합격선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츠키 슈는 천재였다. 제왕이나 신이라고 하는 말이 이 학원에서는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에 따라 연습한 자신이 완성하는 무대에서, Valkyrie는 최강이다. 학원의 학생들은 Valkyrie의 멤버인 미카를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생전 처음 겪는 그런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높은 스테이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늘, 낮은 곳에서 상대를 올려다 보았으니까.

가끔 밤에는 집 앞을 걸으며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멀리서 지내면서 괜찮아? 같이 사는 사람들이 해코지하진 않고? 응, 괜찮다. 엄마. 내는 요즘 최고로 행복하다. 엄마야말로 잘 있나. 아빠가 손찌검 안 하고? 돈 보낼 테니께 괜히 아껴두지 말고, 엄마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슈가 홱 돌아보며 쏘아보았다.

“뭘 하고 이제야 오는 거냐. 밤바람이 찬데 그런 차림으로, 감기라도 걸려서 나의 완벽한 무대를 망칠 셈인가? 너는 Valkyrie의 귀중한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인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미안타, 스승님. 내 머리도 나쁘고 잘 하는 거 하나 없어서, 그래도 그만큼 뭐라도 더 열심히 하고 싶은기다. 뭐하노? 의상 만드나? 바느질 도와줄까?”

“윽, 들어오지 마라. 가까이 오지도 마라! 누가 작업중인 작품을 함부로 만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몸에 함부로 손대는 것도 싫다! 아무리 실패작이라도 좀 더 분별을 가져라, 카게히라!”

“헤헤, 미안타. 내 또 이렇다니께. 그래도 내 Valkyrie를 윽수로 좋아하니께 내일도 열심히 할께?”

“웃을 생각이 드나? 나는 지금 너를 야단친 거다. 이 정도 말로는 안 되나? 머리에 뇌가 안 들어있는 건가? 내일 무대는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들어가서 데워놓은 차를 마셔라.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이상한 녀석이군.”

“그러게. 이상하네.”

정말 이상하지. 나는 원래 쓰레기장에 사는 재투성이 까마귀였는데. 지금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된 것만 같아. 레몬 재운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웃음이 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6. 꿈은 깨어나라고 있는 것이다.

 

 

 

7. 낯선 사람이 집안에 있었다. 당당한 자세도 없이, 꺾이지 않는 눈빛도 긍지도 없이, 하루종일 인형과 함께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당혹스러웠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스승님, 스승님이다. 내가 언제고 좋아해 마지않았던 이츠키 슈다. 아버지, 하늘, 빛. 스승님은 언제나 완벽하다. 지금은 단지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 언제고 Valkyrie는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다.

 

 

 

8.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무대 자금이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스승님에게 크로와상을 사가고, 더는 받아주지 않는 예전 무대를 알아보다가 울컥 눈물이 났다.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힘들 리가 없다. 그렇다고 스승님이 잘못한 건 아니다. 스승님이 잘못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fine, 그때부터 리더였던 그 학생회장의 소행이다. 그와 대화한 이후로 스승님이 이상해졌다. 미카는 학생회실에 달려가 혼자 있던 텐쇼인 에이치의 옷깃을 잡았다. 학생회장이 정신없이 기침하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콜록, 콜록……. 이런 건 징계 사유야, 카게히라 군.”

“……무례하게 군 것은, 미안합니더. 하지만 대체 스승님한테 뭐라고 한 겁니꺼? 어떻게 했길래 그 고고하던 스승님이 저렇게 됐슴니꺼? 나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더! 뭘 어떻게 한 건지 알려라도 주이소!”

하지만 에이치는 되려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 이야기는 들었어. 응, 내가 이츠키 군을 도발하기는 했어. 하지만 나도 이츠키 군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신이 아니니까. 말 몇 마디에 그렇게 무너지다니, 무언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 이츠키 군에게나, Valkyrie 그 자체에.”

“이제는 Valkyrie를 음해하는 깁니꺼?”

“글쎄, 외부인인 나보다는 아무래도 네가 더 잘 알겠지……. 안 그래, 카게히라 군?”

“그런 소리, 내는 듣지 않겠습니더. 사람을 결딴내 놓고, 정도가 지나칩니더.”

“그렇지만 역시, 카게히라 군에게는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학생회장은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는다.

 

 

 

9. 허탈하게 돌아온 집에서는 슈가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당연하게 마드모아젤이 놓여 있다. 한때는 나즈나와 마드모아젤의 반짝이는 금발을 동경했었다.

‘무언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거 아닐까? ‘

알고 있었다. 늘 곁에 있으면서, 그렇게 온 신경을 쏟아 바라보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독선적인 리더와, 그가 사랑한 죽은 여자와, 그 여자를 투영해 바라본 멤버와, 지나치게 편집증적인 노력과, 과로와, 스트레스와, 폭언과, 마스터라는 호칭까지. 무엇 하나 금방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도 지금도, 안다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미카는 허리를 굽혀,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슈의 손을 뒤에서 잡았다. 슈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어딜 갔었나, 카게히라.”

“미안타, 내가 너무 늦었제. 스승님, 내 밖에서 붕어빵이랑 크로와상도 사왔으니께. 쫌만 묵자.”

“이제는 너까지 나를 배신할 셈인가?”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의심하지 마라. 내가 스승님을 배신할 턱이 있나.”

“그래. 그래야지, 카게히라.”

미카는 슈의 곁에 바싹 붙었다. 웅크린 슈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대로 멈추었다. 이제 슈는 미카가 가까이 와도 야단치지 않는다.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가냘프게 하얀 얼굴이 오롯이 이쪽을 바라본다. 곱슬거리는 앞머리로 덮인 곧은 이마 아래, 말간 보라색 눈이 어서 다가와 도와달라는 기색을 띄고 눈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무대를 준비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흘끗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이, 이제는 미카만을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미카는 손을 잡고 슈를 끌어올렸다. 이끌려 올라오는 손은, 한때 높다란 무대 가운데서 거대한 세상을 지휘하던 손목은 가까이에서 볼수록 하얗고 가늘다.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한다고 손찌검이라도 한다면, 바로 한손으로 쥘 수 있을 것 같다. 숨이 가까이 닿는다. 인형처럼 창백한 뺨이 바로 곁에 있었다. 기묘한 충족감이 죄악감처럼 아랫배에 스민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보니까

‘카게히라 군에게는,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아?’

목소리가 최면처럼 머릿속을 울린다. 미카는 슈의 마른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서, 머리에서 열이 올랐다. 꿀꺽,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렸다.

“스승님. 내는…….”

“뭐냐, 카게히라.”

“미안하다. 내가, 내가 진짜 미안하다…….”

어쩌질 못하고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미카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꺽꺽 울었다. 이건, 숫제 패륜이다. 슈의 앞에서는 아닌 체 하지만 완전한 배신자이다. 이럴 수는 없다. 쓰레기장에서 구해 준 은인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고마운 마음과 애틋한 감정과 미안한 생각과 자기혐오가 어지럽게 뒤섞여 올라 미카는 한참이나 그렇게 목놓아 울고 말았다.

이제 미카는 더 열심히 뛰어다닌다. 접시를 닦고, 무대를 찾고,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Valkyrie를 홍보하고, 크로와상을 사고, 집에 늦지 않게 들어가고, 슈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준다. 슈가 나락까지 떨어진다면 함께 가겠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학생회장의 말이나, 지난 날의 과오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Valkyrie는 다시 명예롭게 천계를 비행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은망덕하다.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 나는 분명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벼락을 내릴 신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