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터루퍼 수위성 샘플

눈을 뜨자 몸이 무거웠다. 허벅지가 미칠 듯 당기고 내벽이 쓰라리고 렉터는 흔적도 없었다. 루퍼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켜 대리석 바닥을 맨발로 밟았다. 어제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서늘했다.

거울을 보자 몸 여기저기 자국이 남아있었다. 크로스벨에 부임한 후부터 치욕이라면 익숙하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꼿꼿하게 목을 세우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냉엄하고 우아하게 관저를 걸으면 되는 것이다. 루퍼스는 옷을 갖춰 입고 목깃을 바짝 세워 자국을 가렸다. 출구를 향해 걷는 동안 뒷구멍으로 계속 정액이 비어져 나왔다.

“……윽.”

견디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선 루퍼스는, 복도의 거울을 보고 제 귀 아래에도 붉은 자국이 적나라하게 남은 것을 발견했다.

 

그 후부터 렉터는 태연한 얼굴로 갖가지 선물을 가지고 나타났다. 밋시 인형이나, 하와이안 셔츠, 꽃다발이나, 반지 같은 것들. 크로스벨의 총독인 자신을 마치 여자를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일련의 행동에 루퍼스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요즘 차갑네, 총독님.”

“뚜렷한 용무도 없으면서 계속 관저에 오는 건 명백히 업무 방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군.”

“용무가 없다니, 무슨 섭한 소리를. 바레아하트에서 전언이 왔어.”

“또 어떻게든 구해달라는 귀족들의 탄원서겠지. 필요 없어.”

“아니. 당신 동생분으로부터의 편지.”

서류를 넘기던 루퍼스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곧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문서를 훑기 시작했다.

“뭐, 총독님이 바쁘면 어쩔 수 없네. 내가 대신 편지를 읽어드려야지. 흐음, 유시스는 아직도 배신한 형이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구나. 순진한 도련님이네.”

“그 아이는 이상주의자라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이상주의자인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렉터가 루퍼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빙글빙글 웃었다.

“당신을 볼 때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4대 명문의 총아, 도련님 중의 도련님 주제에 뭘 해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불쌍해서, 조금 도와주고 싶었어.”

“부디 공적인 도움이었으면 좋겠군.”

“딱딱하네. 당신, 생각보다 완고한 이상주의자더라고. 그런 성품으로 용케도 스파이 짓을 했구나. 알만은 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믿고 있겠지? 세상을 고쳐야만 한다고 믿고 있겠지. 그래서 그렇게 부단히 노력한 거지? 나는 살면서 노력해본 적이 없는데…….”

루퍼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재수가 없었다. 렉터 아란도르가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천재 이상의 천재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랑하고 있는 건가.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총독님 당신 말이야. 아무리 그렇게 노력해도, 그래서 세상을 아무리 뜯어고쳐도 이 세상에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있긴 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루퍼스가 책상 위에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렉터는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루퍼스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래도 이때는,”

하얀 손마디가 입 안팎을 몇 번 왕복한다.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아 보였는데.”

이를 꽉 깨물기 직전 어떻게 알았는지 렉터는 빠르게 손가락을 빼냈다. 루퍼스는 이제 숨김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일어나 렉터를 노려보았다.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내가 자네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

“그렇게 말해도, 총독님.”

렉터는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얼굴로 유시스에게서 온 편지지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당신 동생한테 너희 형은 내가 따먹었다고 말하는 건 싫지?”

“무슨……!”

“하하, 농담이야.”

렉터는 실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총독님. 내가 협박을 하면 크로스벨에 소문을 내는 걸로 하지, 당신 동생으로 하겠어?”

그렇게 말하며 렉터는 손끝으로 루퍼스의 목깃을 넘겼다. 불긋한 자국이 남아있다.

하류 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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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은 사자전역에 관련된 사료를 읽던 중, 당시대에 나타났다는 마수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스케치라고 표현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단출한 실루엣의 그림이 어쩐지 눈을 사로잡았다. 독을 품은 숨을 한 번 내쉬면 생물을 시체로 만들고, 반나절 만에 제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는 검은 용은 그 자신도 시체마냥 뼈대만 있었다.

왜 하필 이런 형태를 하게 되었을까? 원래는 이 생물도 따뜻한 살과 피를 갖고 있던 게 아닐까? 제 숨에서 독기로 인해 자신마저 곯아 없어진 게 아닐까, 그러고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움직였던 걸까.

“헛소리네.”

열변을 펼치는 미하엘에게 동료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료도 찾기 힘든 그런 전설 같은 걸 연구하겠다고? 도력혁명의 시대에 소설이라도 쓸 셈이야? 이봐, 차라리 경제학 같은 걸 연구하지 그래. 우리 새 후원자는 실용성 있는 분야를 좋아한다고.”

그래도 어딘가에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전설 속에 남은 생물의 희소한 모습에 호기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 정도 말이 트였다 싶은 사람이면 매번 용의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모두 마지못해 웃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미하엘을 핀잔할 뿐이었다.

그래서 미하엘은 용의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앞서 자신을 몽상가라고 무시하던 사람을 연구 성과로 압도하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

비록 가장 관심 있던 분야에 매진하지 못했더라도, 결국 서른의 나이에 제국학술원의 조교수라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꽤나 어깨 펴고 다닐만한 인생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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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소년

어려서 머리가 여물지 못하고 몸도 작았던 시절에, 훨씬 더 자그마한 새를 주운 적이 있다. 싸늘한 바닥에서 가냘픈 날갯죽지를 몇 번이고 파닥거리던 아기 새는 조금도 공중에 뜨지 못하고 마침내 바닥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린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자그마한 생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드러난 배 위에 손을 살짝 대니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이 느껴졌다.

불편한 연회를 견디다 못해서 슬쩍 테라스로 빠져나온 참이었다. 연회장에 이 새를 들고 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비웃음을 사겠지, 비난받을 짓을 한 거지. 나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새는 도와주어야만 한다. 어쩌지도 못하고 두 손 안에 새를 꼭 쥐고서 찾아간 예배당에서 시스터가 말했다.

“어미에게서 떨어져서 며칠은 방치된 모양이에요. 날개도 많이 상했네요. 좀 더 따뜻한 곳에서 돌보고 지켜봐야 예후를 알 것 같은데, 돌볼 사람이 있을는지 걱정이네요.”

“그러면 제가 집에서 돌볼게요. 새가 날아가는 게 보고 싶어요.”

“이 애가 날 때까지 회복하고 자라려면 못해도 보름은 걸릴 거예요.”

“괜찮아요. 제가 계속 지켜볼게요.”

“도련님이 지나가는 생물에 이렇게 애착을 갖다니 별일이네요. 예배당 여자아이들이 보면 질투하겠어요, 후후.”

“그냥, 날아가는 게 보고 싶을 뿐이에요.”

“네. 그게 문제라면 문제겠네요.”

시스터는 아기 새를 볼 때와 꼭 같은 눈빛으로 어린 린을 내려다보았다.

“한 생명을 길들인다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무겁답니다. 새가 날지 못할 수도 있어요, 만약의 얘기지만요. 날아간 후에는, 걱정되기 시작할 거예요. 이미 사람 손을 탔는데 바깥에서 괜찮을까, 폭풍을 만나 떨어지지는 않을까. 그래도 정을 주실 건가요? 그리워하고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때, 어떻게 대답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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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린 슈바르처에게는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아마 8년 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의 기록은 부끄러워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버리지는 못했다. 낡은 노트 안에는 삐뚤빼뚤한 아이의 필체로 어머니가 재배하던 허브나, 엘리제와 함께 만든 눈사람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짤막한 글귀도 함께였다. 도와주세요, 모르겠다, 짜증나, 무서워.

표지에 가죽을 입힌, 아이가 쓰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노트는 어릴 적 설산에서 피투성이로 돌아온 이후 불안해하고 사람을 피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무언가 알 수 없고 불안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마주하는 게 먼저란다. 여기에 일기를 써 보렴.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날그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적으면 된단다.

과연 그때 아버지의 안배가 옳았었는지, 린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떠오르는 대로 노트에 의문점을 적어 나가던 어린 린은 자신에 대해 뭔가 석연찮은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택에서 눈을 뜨고 엘리제를 만나기 전의 기억이 없는 점이나, 인사를 하던 귀족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경멸 어린 수군거림의 실체나, 결국 아버지가 유미르에 틀어박힌 이유에 대해서.

바라지 않은 깨달음에는 질문과, 대답과, 울먹임과, 침묵이 이어졌다. 그날 아버지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겨울날, 제 몸보다 일곱 배는 큰 마수에 대해 느꼈던 뼈저린 공포는 자신에 대한 더 큰 공포가 되었다. 밤마다 어둠을 타고 증식하는 불안에 겁에 질려 떨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기는 한 걸까? 자신이 무언지 모르는데다 가족은 가족이 아니니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때부터 무엇이든 기록해서 정리하는 습관만은 몸에 배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밤마다 기숙사에서 린은 학생 수첩에서 쓸 만한 정보를 옮겨 적었다. 그날그날의 기억, 전투했던 상대나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요리의 레시피나 낚은 물고기의 종류부터 읽은 책과 신문의 내용, 그리고 신경이 쓰이는 온갖 정보까지. 그저 적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책상에 바르게 앉아 펜촉을 잉크에 담가 사각사각 글을 적어나간 후, 짧게 명상을 하는 것이 일과의 마무리가 되었다.

봄과 여름을 거치며 노트의 정보는 점점 풍족해졌다. 정보의 출처인 트리스타 역 근방의 기숙사나 VII반의 교실, 구교사, 혹은 교정 안의 이곳저곳을 볼 때마다 가슴 근처에서 뭉근히 부푸는 것이 있었다. 고양감이라고 하는 감정은 검술을 수련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전념하던 린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놓을 수가 없는 그런 것이어서, 린은 스스로에게 새기듯 일지를 적었다. 학생회의 일을 도우며 만난 사람들,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동료의 믿음. 처음으로 겪어 보는 유대를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적어나갔다.

계절은 깊어져 가을이 되고 노트의 내용은 넘칠 만큼 두터워졌다. 린의 마음도 그랬다. 학원제 무대를 준비하던 밤을 기억한다. 구교사를 빌렸던 학원제 준비일에, 밤늦게까지 리허설을 마치고 땀을 흘리며 탈진해 앉았던 돌 바닥의 시원함을 떠올리면 아직도 시린 기분이 들 정도로 선명히 기억한다. 모두와 전술 링크를 이어 물리친 적과, 오래 준비한 무대와, 뜨거운 모닥불이 타오르던 후야제. 그렇게 함께했던 동료 한 명 한 명의 행적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중 누군가는 헤어질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느꼈던 듯하다. 그렇기에 이자를 운운하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고작 그 정도가 그때 린이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어리광이었거늘, 간혹은 후회가 들고는 한다. 조금 더 그럴듯한 말을 할 수는 없었을까? 얼핏 미련을 보이는 그를 어떻게든 잡아두거나, 마음을 돌릴 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때 거기서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그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러나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다. 10월 30일, 린은 모든 소지품과 기록한 노트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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