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 악당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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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은 사자전역에 관련된 사료를 읽던 중, 당시대에 나타났다는 마수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스케치라고 표현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단출한 실루엣의 그림이 어쩐지 눈을 사로잡았다. 독을 품은 숨을 한 번 내쉬면 생물을 시체로 만들고, 반나절 만에 제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는 검은 용은 그 자신도 시체마냥 뼈대만 있었다.

왜 하필 이런 형태를 하게 되었을까? 원래는 이 생물도 따뜻한 살과 피를 갖고 있던 게 아닐까? 제 숨에서 독기로 인해 자신마저 곯아 없어진 게 아닐까, 그러고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움직였던 걸까.

“헛소리네.”

열변을 펼치는 미하엘에게 동료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료도 찾기 힘든 그런 전설 같은 걸 연구하겠다고? 도력혁명의 시대에 소설이라도 쓸 셈이야? 이봐, 차라리 경제학 같은 걸 연구하지 그래. 우리 새 후원자는 실용성 있는 분야를 좋아한다고.”

그래도 어딘가에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전설 속에 남은 생물의 희소한 모습에 호기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 정도 말이 트였다 싶은 사람이면 매번 용의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모두 마지못해 웃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미하엘을 핀잔할 뿐이었다.

그래서 미하엘은 용의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앞서 자신을 몽상가라고 무시하던 사람을 연구 성과로 압도하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

비록 가장 관심 있던 분야에 매진하지 못했더라도, 결국 서른의 나이에 제국학술원의 조교수라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꽤나 어깨 펴고 다닐만한 인생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02

맥주에서는 고린내가 난다. 귓전에 시끄럽게 울리는 시정잡배들의 소란은 수준이 낮아 도무지 눈 뜨고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도 미하엘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히 바 한 구석에 몸을 수그리고 앉아있었다. 이 술집이 근방에서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석에 앉아 있으면 맥주 한 잔으로 정오의 햇빛에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미하엘은 작은 필기용 노트를 펼치고 볼펜으로 한 줄을 썼다. ‘오스트 지구 주민의 주 수입원은…….’ 미처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옆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러니까 말이야. 재상 각하가 더 실권을 틀어쥐면, 이 오스트 지구도 제도 중심가처럼 근사하게 개발될 날이 오지 않겠느냐 이거야! 저 귀족들이 우리한테 굽신거릴지도 모르지. 생각만 해도 통쾌하지 않아?”

“그럴 리가 있나. 화풀이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영토를 확장하느라 바쁜 재상이 거기까지 신경써줄까.”
작게 중얼거리고 다시 펜을 잡는데, 몸이 휙 돌아가며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너 이 자식.”

아까 말하던 남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였다. 얼굴이 벌게져 거나하게 취한 남자를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재상 각하를 모욕하는 거냐? 뭐야, 너 귀족파의 끄나풀이냐?”

“아, 아닙니다.”

빠르게 대답했다. 자기 얼굴만 한 주먹이 코앞에 있고, 입바른 소리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다면 아무리 한때 1인 시위를 했던 사람이라도 목소리가 작아지는 법이었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했다간 봐라. 확…….”

그만해, 샌님이 겁먹었네. 여자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우 남자의 손아귀에서는 풀려났지만 목이 계속 얼얼했다. 미하엘은 고개를 숙였다. 서러움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이 알딸딸한 취기와 함께 엄습했다.

애초에 이 구역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집세가 싼 곳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도무지 수준이 맞는 인간이 없었다. 아니, 이 세상 자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쓰고 있는 논문은 언제쯤 투고할 수 있을까? 과격시위자라는 명목으로 학술원에서 파면된 지도 이제 한참이었다. 전에 알던 지인들도 슬슬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는다. 복권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놓은 지 오래였다.

사설이라도 쓰면 어떨까? 지인의 소개로 제국시보에 연이 닿아 몇 번 경제 문화면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정권비판적인 첫 글이 비난을 산 이후로 소위 가하는 ‘편집’이 가해졌다. 비판과 고찰은 흐려지고 두루뭉술한 허울만 남은 글이 자신의 이름으로 실린 것을 미하엘은 무력하게 읽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다른 필자를 고용한 듯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계속하며 돌아온 미하엘을 집 앞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맞아주었다. 결코 반갑지 않은 마중이었다.

“어딜 갔다 오나? 술 마실 돈이 있으면, 집세나 밀리지 말고 내. 어디 일도 안 하고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나?”

“그게, 일자리는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2만 미라다. 2만 미라. 모레까지는 완납하라고.”

그렇다. 사상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일단 당장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는 게 미하엘이 직면한 문제였다. 너무 고학력자라서 기피되나? 경기가 나빠서 일자리를 못 얻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최근의 일들이 너무나 불운했다. 단순한 사무직을 맡아도 사고가 연이었다. 새 일을 맡은 지 몇 주일이 못 되어 누군가 정치 건으로 시비를 걸어서 성질을 못 이기고 말다툼을 하거나, 분명히 멀쩡하게 전달한 서류가 얼룩투성이가 되어 질책을 받거나, 이런저런 사고가 이어져 하는 일마다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평생을 몸담았던 학계에서는 외면당하고 새 일에서 경력을 쌓지 못하니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였다.

너무 오랫동안 상아탑의 엘리트로 지냈던 걸까. 그래서 다른 일에 적응을 못 하는 걸까? 고민해 봐도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침대에 누우려던 미하엘은, 방 한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그만 나자빠질 뻔했다.

“아저씨가 미하엘 기데온이지?”

열 몇 살이나 될까. 하얀 얼굴에 흐트러진 곳 한 군데 없이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은, 이런 허름한 골목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멀끔한 소년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재색 머리에 파란 코트가 썩 매끄럽게 어울려 어린 천사처럼도 보였다.

“그렇다만, 너는 누구지?”

“개인교습 좀 해 줘.”

“이 녀석, 앞뒤 없이 무슨 소리냐……. 너 어디 사니?”

“그러니까, 개인교습 좀 해 줘.”

아이는 미하엘의 책상 위에 두터운 봉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두 시간에 2만 미라. 해보고 괜찮으면 앞으로도 일정을 잡고, 아니면 말고. 그리고 아저씨. 어떻게 되든 문은 닫고 다니자. 위험한 세상이잖아.”

―라고 말을 하면서 녀석이 걸쇠를 잠그는데, 어이가 없어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녀석이 그저 멋대로 집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뭐 이런 경우 없는 놈이 다 있는지. ……라는 생각과는 달리, 미하엘의 손과 눈은 바쁘게 봉투를 들어 지폐를 훑어보았다. 진짜다. 진짜인 것 같다.

“뭘 가르쳐달라는 거지?”

“세상에 대해서 가르쳐 줘. 아저씨가 아는 대로.”

“세상……이라니, 정말 영문을 모르겠군. 시사 상식이 궁금한 거라면 제국시보라도 꾸준히 읽으면 될 거야.”

그러자 소년은 턱을 괸 채로 피식 웃었다.

“아저씨. 설마 지금 그 신문을 믿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미하엘이 오스트 지구에서 처음으로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열 몇 살 남짓이나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03

“이름은?”

“크로우.”

“성은?

“없어.”

“출신지는?”

“아저씨는 배경과 출신만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사람이야? 내가 잘못 찾아온 걸까?”

“이 정도는 그냥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잖아.”

“아무튼 알려주기 싫어. 아저씨랑 나는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지. 그런 건 좀 더 친해지고 나서 얘기하자.”

“이봐, 너에 대해서 좀 알아야 내가 거기 맞춰서 뭘 가르칠 거 아니야. 계속 이런 식이면 교습이고 뭐고 당장 확 일어나서 가버릴…….”

“어, 누나. 스트로베리 크림 브륄레 이쪽이요.”

메이드가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식사할 돈도 궁하니 디저트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밀도 높은 하얀 크림 위에 발갛게 빛나는 딸기가 얹힌 것을 보고 미하엘은 침을 꿀떡 삼켰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마지막 조각까지 입에 넣었다. 혀가 녹을 만큼 맛있었다.

녀석은 영 속을 알 수 없이 알쏭달쏭했다. 요구사항을 밀어붙이면서도 정작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미하엘을 어떻게 아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키도 크지 않아서 열 서넛이나 될까? 옷이 곱고 얼굴이 멀끔하고, 반말이 자연스러웠으므로 미하엘은 아마 소년이 영세한 귀족가나 중산층의 자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외양과 어울리지 않게 영 낯선 것은 어린애 주제에 능구렁이 일곱 마리쯤 뱃속에 넣은 듯한 태연자약함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자. 너는 어떻게 날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으응, 아저씨는 제국학술원의 부교수였지?”

“그래. 제국 최고의 석학이다. 아무나 하는 건 아니지.”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지.”

순간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었다. 끓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나, 어릴 때 거기에 진학하고 싶었거든.”

“무슨 이상한 말을 하는 거냐? 지금도 충분히 어리잖아.”

“아, 맞다. 그랬지.”

소년은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우스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녀석은 늘 그렇게 어딘가 모를 위화감을 휘장처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불쑥 나타나 미하엘이 필요한 돈을 가져다 준 것부터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느긋한 눈매까지, 묘하게 현실의 존재 같지 않았다.

사실 보기보다 나이가 무척 많은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 배움을 요청하려고 비밀스럽게 나를 찾아온 건 아닐까? 그런 망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04

전 대륙의 인재들이 모이는 학술원의 부교수였다고 해도 이 정도로 어린 아이를 가르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동네 친구들이랑 골목대장 노릇이나 할 나이가 아닌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가벼운 이야기부터 훑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대 이상으로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렇게 정당성을 인정받은 드라이켈스가 제국의 차기 계승자로 주목받게 된 거지.”

“그 정도 설화는 당연히 알고 있어. 하지만 드라이켈스는 서출이잖아? 정당성도 정당성이지만, 세력을 인정받은 게 아닐까.”

“그 말이 맞다. 이때 드라이켈스는 이미 노르드 전사들과 철기대라는 새로운 전법의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고, 거쳐 간 지역마다 지지를 받게 되었으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된 게지.”

“친화력이 가장 큰 자질이었구나. 다른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재능. 부럽네…….”

일방적으로 듣는 대신 함께 생각하는 학생과 함께 수업하고 있자니 제법 학술원 시절의 즐거움이 떠오르는 듯도 했다.

“지금은 일단 역사부터 가볍게 훑고 있다만,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수업할 수도 없고. 너는 자세히 배우고 싶은 분야는 안 정한 건가?”

“배우고 싶은 거야 잔뜩 있지. 역사나, 수사학이나, 탄도학이나…….”

“그걸 다 한 사람에게서 배울 생각이야?”

“내가 사정 상 여러 수업을 찾아가기는 좀 어렵거든. 왜, 아저씨한테는 무리야?”

“아니, 제대로 찾아왔군. 부전공은 인류학이다. 역사나 문헌에는 자신있고, 수학도 학부 수준까지는 가르칠 수 있어.”

“응…….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를 만난 건 행운이야.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거든.”

“그런 것 치고는 나이에 비해 공부한 것 같은데?”

“일요학교 정도는 나왔어. 월반 비슷한 형태로. 최근에는 좀 여유가 생겨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아무래도 혼자 공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학술원에 진학하고 싶었다며, 사정도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사고라도 있었어? 진학 준비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건가?”

그러자 아이는 처음으로, 수줍은 얼굴로 웃었다.

“아니. 그건 그냥 어릴 때 꿈이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의 과거에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고가 있었겠거니 하고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하엘은 녀석의 코를 콱 잡아서 비틀었다.

“으읍, 하지 마. 다른 사람이 내 몸 만지는 거 싫어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아직 어려. 자꾸 어릴 때 어릴 때 하는 거 어울리지도 않고, 꿈을 포기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잖아. 자질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장학금을 노리면 명문 학교에 진학하기도 무리 없을 거다.”

“이제는 흥미 없어. 목표가 바뀌었거든. 진학해서 교수 정도 되어봤자 아저씨처럼 파면되기나 할 테고…….”

미하엘은 말없이 아이의 뺨을 꼬집었다. “읍, 하지 말라니까!” “나이도 많은 스승님에게 이렇게 입을 못되게 놀리는 녀석은 혼내줘야지.” “꼰대 같은 소리 하기는! 나이 같은 거 신경 안 써!” “그러면 스승에 대한 예우라도 갖춰. 그래야 건방진 녀석이라도 좀 귀엽게 보고 가르칠 맛이 나지!”

뺨을 푸 부풀린 녀석의 눈을 노려보다, 미하엘은 그만 힘없이 손을 놓아버렸다.

“됐다. 지금 어린애랑 뭐하는 거람. 네 말이 맞아. 나는 파면되었고 지금은 명예도 돈도 없지. 당장 2만 미라가 없어서 이렇게 너를 가르치게 되었고……. 하지만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야, 제국시보에서 아저씨 사설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서 알아봤지.”

“윽, 그건 잊어라. 편집부에서 제멋대로 자르고 수정한 조악한 글이야. 돈이 급하지 않았다면 안 했어. 이제 신문사는 쳐다도 안 볼 거다.”

하지만 아까까지 재잘거리던 아이는 별안간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대꾸하지 않았다.

“크로우?”

“이상하네, 아저씨. 월세도 못 낼 만큼 가난했어? 제도가 이렇게 넓은데, 일자리가 안 구해졌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구나.”

미하엘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아이는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뭐, 사고가 이어졌어. 별 거 아닌 사고가. 중요한 서류가 사라진다거나, 술에 취한 사람이 시비를 건다거나, 사장이 갑자기 심기가 거슬린다고 말하거나 해서 얼마 가지 못했어. 면접을 봐도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응답했던 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서…….”

“아저씨. 정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이상하다니? 대체 무엇이? 지금 걸리는 것은, 나에게 가장 걸리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던 미하엘은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제국시보에 사설을 낸 이후에, 어김없이 일자리에서 사고가 생겼군.”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하엘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 남자의 습성이지. 본보기를 보이는 것……. 제도는 위험하겠다.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 이제부터는, 다른 곳으로 가자.”

 

 

05

방이 작았으므로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추려낸 백여 권의 책들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들만 추렸다. 책과 노트와 개인용 도력기기 몇 가지를 챙기면 모든 짐을 챙겼다고 생각되는, 미하엘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평생토록 학문에 전념한 그런 삶을 살아왔다.

약속은 밤이었다. 미하엘은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어둠을 틈타서 빠져나왔다. 책상 위에는 십만 미라짜리 지폐 두 장을 남겼다. 더 남길 것도 챙길 것도 없어서 쓴웃음이 났지만, 의외로 걸음은 가벼웠다. 가로등도 희미한 골목길에서 벽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걷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어린 남자아이 하나를 믿고 반평생을 머무른 도시를 떠나는 건가?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 그 조그마한 어린아이를, 무엇을 믿고? 나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건가?

생각하고 있던 찰나, 이제는 귀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이쪽이야.”

아이는 어느새 곁에 있었다. 가까이와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이 아이를, 무엇을 믿고? 그렇게 생각하며 미하엘은 가볍게 챙긴 짐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다른 사람들은 이 작은 아이보다 믿을 만했던가?

교수직에서 파면되자 연락을 끊은 사람들. 처음에는 위로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복권이 되지 않자 은근한 핑계로 약속을 끊은 사람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전 은사, 분명 멀쩡한 서류를 가져다주었는데 얼룩졌다고 성질을 부렸던 동료, 정치 관련 화제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시비를 걸던 상사. 그들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비밀에 부치는 이 아이가 믿을 만하지 않은가.

“뭘 가만 보고 있어, 아저씨. 얼른 따라와!”

미하엘은 다시 한 번 자문했다. 나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건가?

아니. 놀라울 만큼 망설임은 없다.

크로우를 따라간 곳에는 화물차로 위장한 작은 트럭이 있었다. 미하엘은 화물칸에 앉아 천막 사이로 덜컹덜컹 흔들리는 제도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버리고 속이고 배신한 것들이 멀어지고, 작아지고, 일그러져서 곧 시야에는 까만 하늘의 별빛만 남았다.

그렇게 미하엘은 반평생을 머물렀던 제도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06

“일어나, 아저씨. 거의 다 왔잖아.”

여긴 어디지? 무심코 머리맡에서 안경을 찾던 미하엘은 눈을 뜨고서야 시야가 흐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제 크로우를 따라 나왔지.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자 대리석으로 조성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소금 짠 내가 났다. 바다 내음일 것이다.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알 법했다.

“해도 오르디스…….”

“맞아. 이른바 귀족파의 본거지야. 정세에 대해서는 교수님이 알 만큼 알 테니까, 내가 주의를 줄 필요는 없겠지?”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자신을 아이 대하듯 하는 말투에 어이가 없지만서도 일단 고개를 까닥였다. 며칠 전 갑자기 제도를 떠나자고 말하던 크로우에게 무얼 믿고 널 따라가느냐고 묻자, 녀석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카이엔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궁금하던 것이 대번에 정리되었다. 어린아이가 한 번에 몇 만 미라씩을 쓸 만한 재력도, 하필 재상에게 반대했던 미하엘 자신에 대해 알고 찾아온 것도 귀족파의 수장인 카이엔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납득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귀족파와 연이 닿는 것은 미하엘에게는 새로운 기회나 다름없었다.

학계의 동료들이 후원자를 찾아 연회에 다닐 때도,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럴 시간에 학문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미하엘은 파면되었고, 자신을 비호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정확히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른다. 이 도시에서 어떤 식으로 머무르게 될지도 아직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미간에 주름 생기겠다, 아저씨. 표정 풀어. 카이엔 아저씨는 건방진 놈을 좋아해.”

아저씨라니. 지금 이 녀석, 귀족파의 수장을 아저씨라고 부른 게 맞지. 잠시 머리가 띵했다. 카이엔 공의 조카뻘 되는 먼 친척 같은 건가? 격변의 시대이지만 평민인 자신이 앞으로도 코를 꼬집고 볼을 잡아당겨도 되는 건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크로우가 길게 하품하며 짐칸에 반쯤 누웠다. 이런 꼴을 보면 곱게만 자란 귀족 같지도 않다. 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크로우는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곱 떼, 아저씨. (미하엘은 황급히 얼굴을 비볐다.) 카이엔 저택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장소니까, 처음 왔으면 볼만할 거야. 맑은 정신으로 봐야지.”

끼익, 타이어 끄는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추었다. 미하엘은 크로우를 따라서 차에서 내렸다. 눈이 부셨다. 높게 세운 담장과, 곳곳에 세운 조각상과, 내부 건물과, 처마까지 온통 눈부시게 새하얗다.

“겉모습은 멀끔하지? 2층에서는 바다도 내려다보이거든. 나쁘지 않은 경치야.”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대리석으로 세운 건물은 저택이라기보다도 궁궐처럼 보인다. 앞장서는 운전수와 크로우를 따라 역시 새하얀 별관에 들어서자 긴 치마를 입은 메이드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크로우!” “왔네, 크로우! 어디 갔었어? 심심했잖아!” “새로 구운 쿠키 먹을래, 크로우?”

“뭘 새삼스럽게 야단이야. 쿠키 말고 식사할 거 없어? 오래 이동했더니 배고파……. 여기 있는 아저씨도 뭣 좀 먹어야 되고.”

“지금 남은 게, 치킨 파이에 에그 타르트 괜찮아?” “어머, 새 손님이야? 공작님은 특이한 사람을 좋아하시니까.” “샌님 같이 생겼는데? 그래도 뜯어보니까 나쁘지 않네. 공작님이 좋아하시겠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후략)

 

 

07
“너 사실 카이엔 가의 사생아, 뭐 그런 거냐?”

 

08
“방법은 있어. 모든 걸 잊고 살아가는 거야. 아저씨보다 훨씬 심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먼 곳으로 떠나서 밭을 일구고 평화롭게 살아가.”
“장난치지 마. 너같은 어린애가…….”
“장난으로 보여?”

 

09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지. 항상 궁금해 하면서도 따로 묻지 않았던 걸 알아. 그러니까 여기 온 보답으로 내 얘기를 들려줄게. 별 거 아닌 얘기야.

 

10
이제는 거리낌이 없었다. 일찍이 1인 시위를 하다가 학술원에서 쫓겨난 것도, 이렇게 혼잡한 격동의 세상에서 말하자면 망국의 왕자 뻘 되는 소년을 어느 날 집에서 만난 것도, 그래서 이 아름다운 저택에 도달한 것까지 모든 것이 운명처럼 생각되었다.

 

11
“세상을 더 넓게 봐. 너는 아직 어리잖아! 꿈이 있었다면서.”
“아저씨, 보기보다 순진하구나. 공부만 한 샌님이라서 그런가?”
속이 울렁거리고 혼란스러웠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인간과 같은 보폭으로 걸을 수는 없다.

 

12
미하엘은 포크 끝으로 애꿎은 크림을 쿡쿡 찌르다,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미친 듯이 뒤틀렸다. 포크가 좀 더 크다면 자신의 배를 찔러서 꿰뚫고 싶었다.

 

13
“있지.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저씨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그러니까, 아저씨…….”
“떠날 거야?”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