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성

1. 크레니히는 사실상 집에 갇혀 자란 것과 진배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와 싸운 기억이 있다. 지금은 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하디 사소한 이유였다. 생떼를 부리며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다가, 갑자기 숨이 가쁘더니 곧 세상이 노랗게 회까닥 돌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가 크레니히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마르그리드는 크레니히를 집 밖에 홀로 두려 하지 않았고, 크레니히도 감히 어머니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깨어나 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며 눈물 젖은 뺨을 크레니히의 얼굴에 잔뜩 부비던 어머니의 볼에서는 소금기 짠 내음이 났다. 그 집은 소금으로 된 성이었다.

 

 

2. 로쏘, 라고 하면 생화학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연구에 미친 천재는 새로운 연구거리를 또 잔뜩 만들어내고 감탄도 욕도 진탕 들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수식이나 법칙으로 정리하는 데 도가 텄지만 살면서 이성을 흐리게 하는 악마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악마는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홀리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더니 기어코 악귀로 붙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악마의 자식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악마의 새끼 아니랄까봐 과연 새끼 악마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소금 성에서 키운 악마. 그녀가 땀과 눈물로 쌓은 성에서 완성시킨 악마. 로쏘는 소금 성에 갇혀 있다.

 

 

3. 크레니히가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불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크레니히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확연히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동료를 툭툭 치면서 뭐라고 말을 했다. 동료는 고개를 젓다가 멋쩍은 듯 웃고는 크레니히 쪽으로 걸어왔다. 어머니 외에 한 명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크레니히는 어느 누가 자신을 보는 것도, 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빠짐없이 달가웠다.

“자, 크레니히. 저쪽에 가서 로쏘 아저씨에게 인사하렴. 오늘부터 네 양아버지가 될 분이시란다.”

열여섯 살까지 어머니와 단둘이만 지냈던 크레니히에게는 어느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도, 방금 들은 말의 내용도.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년은 아까 바라보던 남자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소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 하세요…….”

“팔자 더럽군.”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서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짓씹듯 말했다.

“너는 장례가 끝나면 나랑 같이 내 집에 갈 거서 거기서 지낼 거다.”

“감사합니다…….”

세상 물정엔 어두워도 최소한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건 알 수 있었던 크레니히는 빠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 말할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로쏘… 아저씨?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를 일은 없을 텐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4. “돈은 여기에 놔둘 테니 네가 알아서 해. 귀찮게 신경쓰게 하지 말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족하면 말을 하든가 말든가.”

로쏘의 집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자그만 방에 있는 것은 침대와 책상이 다였다. 낯선 곳에 있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집에 있다는 사실에 계속 심장이 두근거려 크레니히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밖에서 이따금 종이 넘기는 소리나 펜을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만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혹은 먹을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다. 처음 며칠은 굶었다. 그렇게 있는 대로 굶주린 후에야 조악한 칼로리바나 식사대용 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대강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크레니히는 결국 혼자 돈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크레니히는 어머니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는 혼자서도 외출할 수 있었고, 이제는 혼자서 외출해야만 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혼탁하게 뒤섞여 눈물이 났다. 어색한 솜씨로 크레니히는 여러 가지 식재료를 집에 채워놓았다. 혼자서 식사를 하다가 이거 괜찮네요, 엄마. 하고 앞에 음식을 권할 뻔했다. 혼자였다.

몸이 좋지 못했던 소년은 해가 다 뜬 후에 일어나 저녁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조금씩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로쏘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레니히는 로쏘가 며칠씩 걸러서야 불규칙하게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일까. 어디서 지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그 순간 완전히 지쳐 있던 로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없는 것처럼 행동해. 좋아서 널 맡은 거 아니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소년은 방문 틈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흔적을 좇다가 결국 침대에서 훌쩍거리며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어났을 때, 크레니히는 휑하던 방 안에 책이며 노트며 장난감이며 못 보던 생활용품이 잔뜩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5. 꼬박 한 달이 지나자 크레니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혼자서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것부터, 책을 찾아 읽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로쏘라는 남자였다. 혹은, 혼자 지내는 것이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크레니히 자신이 며칠, 혹은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집에서 나왔을 때 크레니히는 자신이 이제부터 어쩌려는 작정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알았고 도착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알았다. 구역 밖으로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라 종일 거리를 헤맸다. 날이 저물고 길을 잃었나, 이대로 어디도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싶을 때 즈음에야 낯익은 풍경, 낯익은 거리, 낯익은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헤매지 않았다. 발이 먼저 이끄는 대로 따르고 나니 십년 넘게 어머니와 둘이 함께 지냈던 집이 보였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오래된 집으로 향하던 크레니히는 집 정문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추었다. 어쩐지 시큰하고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열망이 더 강했기에 소년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집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쓰던 가구와 소품들 위에 추억이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추억을 되새기던 크레니히는 깊이 들어서서야 집 앞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 달을 비웠을 집이 먼지도 거미줄도 없고 누군가 지내는 것처럼 살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겁이 나서 제 어깨를 끌어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크레니히는 마침내 범인을 발견했다.

마르그리드가 주로 연구를 했던 방, 나무 의자 위에서 붉은 머리의 남자는 소품처럼 당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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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 프로스트

 

눈사람 소녀

패트릭 하이암즈는 지금껏 살면서 긴장해 가슴이 떨린 적이 딱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격노를 사서 집에서 내쫓길 뻔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셀레스탄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집에 담판을 지으러 갈 때였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이었다.

방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패트릭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의 소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몸 밖까지 들릴 것 같았다.

반면에 조용히 서 있는 소녀의 얼굴은 하얗고 창백해 표정이 없었다. 엘리제는 움직일 기색도 없었고, 꼭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흡사 눈으로 섬세하게 빚은 조각상 같았다.

소녀의 등 너머 있는 창틀이 재촉하는 것처럼 몇 번을 덜컹거린 후에야 눈사람 소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패트릭 씨? 저는 겨울에 태어났어요.”

패트릭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잠시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분명, 방금 엘리제에게 마음을 고백한 참이다. 그런데 이건 전혀 엉뚱한 대답이지 않은가. 엘리제 양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아니면 그냥 못 들은 체하고 싶은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머리를 떠돌아 패트릭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시 한 번 절박하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 양, 지금 저는…….”

“일단 제 얘기를 들어 주세요, 패트릭 씨.”

나긋이 고운 목소리가 말문을 막았다. 패트릭은 이제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도무지 상대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말을 했는지 아시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간청하는 눈사람 소녀의 얼굴이 애달팠다. 눈에 수심이 가득해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곧 스르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제멋대로 굴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얘기는 되지 않을 거예요……. 저는 고작 열다섯 해밖에 살지 않았으니까요.”

 

 

기억 속의 설원

패트릭 씨는 기억나는 가장 어릴 적이 언제인가요? 저는 십이 년 전, 세 살 때의 겨울이랍니다.

눈보라가 하이얗게 휘몰아치는 날이었어요. 외투로 몸을 싸매고도 매서운 바람에 뺨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날이었지요. 추위에 떨면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걷고 또 걷다 보니, 새하얀 눈밭 한가운데 작은 남자아이가 누워있었어요. 아버지는 그 애가 제 오빠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처음 만난 ‘오빠’는, 정말로 이상한 남자아이였어요. 아무 표정도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 기억도 없었어요. 그 추운 날 찬바람에 가슴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말수조차도 적었어요.

그래서 오라버니는 늘 제가 챙겼답니다. 눈밭에 쓰러져 있던 오라버니를 곁에서 간호했던 처음 그 날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어요.

눈을 뜨고 저를 처음 본 오라버니는 아기오리처럼 당연하게 저만 따라다녔어요. 저는 그게 퍽 으쓱했답니다. 기억이 없는 오라버니가 모르는 지리, 간식의 맛, 집안 구조와 가족들과 사용인의 이름. 모두 제가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어요.

생각해 보시겠어요, 패트릭 씨? 고작 네다섯 살짜리가, 그렇게 누군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경험을 언제 또 해보았겠어요. 옆을 보면 언제고 눈처럼 말간 얼굴을 한 남자아이가 제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굉장한 권력이었고, 굉장한 쾌감이었어요.

부모님은 제가 곁에서 오라버니를 돌보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고, 저도 그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언제까지고 그럴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패트릭 씨도 오라버니를 곁에서 보았다면 아실 거예요. 오라버니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어떤 것도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해내면서 어떤 것에도 자만하지 않아요. 일에는 성실하고, 사람에게는 허물없죠.

유미르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라버니는 마을 모두에게 사랑받았어요. 오라버니는 새로 배우는 모든 것을 저보다 빠르게 배웠어요. 한두 해가 지난 후에는, 제가 챙겨줘야만 하는 조그만 남자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죠.

저는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도 싫었습니다. 분하고 서러워서 가끔은 울기도 했어요. 저는 그게 분명 재능에 대한 질투라고 생각했답니다.

 

 

빙결

생각이 바뀐 때는, 제가 일곱 살이 되던 겨울이었어요.

유미르는 조용한 곳이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시골로 온 어린아이에게는 아주 심심한 곳이었어요. 저는 자주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렸고 오라버니는 어쩐지 늘 그걸 제게 미안했어요. 그래서 하루는 오라버니께 떼를 써서 같이 계곡 깊은 곳까지 들어갔답니다.

정신없이 개울을 건너고 돌을 넘다 보니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어요.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보니 조금씩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요. 이른 첫눈이 반가워서 저는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좋아라 뛰었답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어요. 눈발이 너무 빠르게 거세졌거든요. 금방 눈보라가 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쌓인 눈에 발목까지 푹푹 빠졌어요. 왔던 길도 헷갈려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뒤에서 커다란 포효가 들렸어요. 겨우 용기를 내서 뒤를 돌아본 후에는, 오금이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키의 일곱 배는 되는 육중한 마수가 달려들었어요. 도망가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오라버니가 저를 감싸다 내동댕이쳐지는 걸 보면서도 울부짖는 수밖에 없었어요.

오라버니는 쓰러져 피를 흘리며 제게 뭐라 말하려 했고, 마수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어요. 그때만큼 여신님이 기적을 내려주시기를 바란 적이 없었습니다. 무언가가 우리를 구하기를, 오라버니가 무사하길 빌면서 달달 떨 뿐이었어요. 울먹이면서 돌이라도 던지려고 일어서는데, 눈앞에 아주 재빠르고 하얀 것이 지나갔어요.

패트릭 씨도 본 적이 있다고 하셨죠. 처음 보는 그 모습은 제게 꼭 하얀 털을 가진 짐승처럼 느껴졌답니다. 눈앞의 것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아는 그런 짐승이요.

하얀 오라버니는 야수처럼 마수를 도륙하면서도, 마수에게서 저를 지키려는 듯한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어요. 마침내 마수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고, 오라버니도 도륙하기를 멈추었을 때 저는 달려가서 오라버니를 끌어안았어요.

그르렁거리는 숨이 얼굴에 닿았지만 무섭지 않았어요. 저는 오라버니가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계속 그대로 품에 안고 있었어요. 몸부림에 까만 멍이 들고 할퀴는 손톱에 생채기가 나면서 계속, 계속 그렇게 꼭 껴안고 있었어요.

 

 

마음의 까닭

그 후로부터는, 아무것도 오라버니와 관련해서 문제 될 것이 없었답니다. 오라버니는, 제 오라버니는 그냥 뛰어난 게 아니었어요. 여신에게 축복을 받았거나, 정령의 가호를 받았거나, 아니면 여신이나 정령에 견줄 만한 무언가가 틀림없었어요.

그러니 괜찮았어요. 오라버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독차지해도 상관없었어요. 오라버니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게 죄책감이라도 괜찮았어요. 오라버니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저만을 바라볼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저 좋은 나날이었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라버니가 햇빛 받은 얼굴로 인사해주는 것이 좋았고, 허브를 손질해서 어머니의 카레를 도우면 오라버니가 후루룩 삼키고 맛있다고 하는 것이 좋았어요. 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더없이 좋았어요. 오라버니가 제게 웃으면 좋았고, 다른 사람에게 웃으면 싫다는 건 이제 확실하게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오라버니의 웃음을 위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책을 읽고, 달콤한 빵을 굽고, 맨발로 유미르를 뛰어다녔어요. 그게 제 다섯 해의 모든 기억이랍니다.

그러다가 삼 년 전, 우연히 부모님이 나누는 말씀을 듣고서야 저는 오라버니가 제 친형제가 아님을 알게 된 거예요. 너무 늦은 의문이 머릿속에 연이었어요.

분명 오라버니를 집에 데려온 날을 기억하면서도, 왜 나는 지금까지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가족이 아니라면 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대체 어째서 있고 어디로 가는 걸까? 왜 나는 지금까지 이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부터 머리까지 화끈거렸어요. 저는 이미 이런 마음의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책이나 이야기마다 나오는 것이었거든요. 깨닫기만 하면 되는 거였죠.

일상이 설렘이 되고 설렘이 한숨이 되어 잠이 들 수 없었어요. 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것처럼, 사랑도 소리 없이 쌓이는 법이겠지요. 열두 살은 사랑을 알기에 적은 나이는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알기에도 적은 나이가 아니었어요.

나는, 계속해서 오라버니의 발목을 잡고 있었구나 하고.

 

 

진주의 핵

단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거꾸로 섰어요. 가족은 가족이 아니고 저는 제가 스스로 생각하던 착한 아이가 아니었어요.

이게 정말 연심일까? 가족에게 연정을 품다니, 가능하기는 한 걸까? 그냥 극심한 소유욕이 아닐까? 지금껏 이상하게 여겨본 적 없는 감정이 너무나 이상했어요.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이런 관계를 이상하게 여겨본 적 없이 마냥 다정한 오라버니도 이상했어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시자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이 굳었어요.

감당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으니 부모님도 물론 금방 알아차리셨을 거예요. 두 분 모두 무척 다정한 분들이셔서, 제게 이상할 것 하나 없다고 다독여 주셨어요. 그러자 용기가 났어요. 오라버니를 마주해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 같았어요.

부모님께 여쭈니 오라버니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오라버니가 시스터와 시간을 보내는 게 싫었던지라 당장 교회로 가서, 케이크를 구울 테니 맛을 봐달라고 떼를 썼어요. 오라버니는 읽던 구절만 읽고 돌아가겠다고 했죠. 거절하지 못하실 줄 알고 있었어요. 오라버니는 다섯 해 전부터 항상 제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먼저 돌아와 오라버니께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거울 앞에 조르르 달려갔어요.

그리고 저는, 거울을 보고 울어버리고 말았어요. 제 꼴이 너무 흉했어요. 거울 속에는 제 감정대로 남을 이용할 뿐인 못된 여자아이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도망쳤어요. 집에서도 저에게서도 오라버니에게서도 도망쳤어요. 바라건대 오라버니가 이런 못된 여자아이보다는 훨씬 근사한 인연을 만드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 않으면서, 여학교로 도망쳤어요.

오라버니를 피하고, 기숙사에 틀어박히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교양을 쌓고 책을 읽었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저랍니다. 외견을 보고 호감을 가져 주셨죠. 품새를 보고 어여쁘게 여겨 주셨죠. 하지만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 것은 그런 것이에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쳐서, 속내를 숨기고자 벼리고 꾸며낸 모습이에요.

물론 괴로웠어요. 가능하다면 그만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저의 십오 년 중 십 년이라. 그만 잊기를 바라다가도, 새로 시작하기를 바라다가도 날이 쌀쌀해지고 눈이 내리면 저는 다시 지난 십여 년의 겨울을 기억하고 말아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만나는 건 분명 실례겠죠.”

소녀는 하얗게 웃었다.

“패트릭 씨는 다정하셨어요. 가슴 깊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라도 기대고 싶다는 욕심이 들 만큼 신사다운 분이셨어요. 그러니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부디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귀한 아가씨를 만나세요. 이런 망측한 아이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잊어 주세요.”

말을 마치고 엘리제는 등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뿌연 하늘에 곧 눈이 내릴 듯도 했다. 차마 패트릭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를 낼지도 모른다. 당황해서 도망치듯이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귓가에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깨끗이 곧았다.

“그걸로 괜찮은 겁니까?”

저도 모르게 돌아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형편없이 떨고 있던 패트릭의 얼굴이 굳게 진지했다. 엘리제는 흠칫 놀라 제 손을 쥐었다.

“엘리제 양이 자책하고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는 말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 엘리제 양, 앞으로는 내가 함께 겨울을 나고 싶습니다.”

열띤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다시 눈을 피할 수도 없었다.

“억지로 잊으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괴로울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을 뿐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기억도 계속 쌓인다면 괴로움을 덮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다음 겨울로 안 된다면, 그다음 겨울을 같이 보내고, 또 그다음 겨울을 함께하고, 그래도 안 되면 죽을 때까지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혼자 아파하겠다는 말만은 말아줘요.”

엘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지라 당황해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창백하게 파리한 얼굴이 눈으로 빚은 조각상 같았다.

그리고 곧 소녀는 눈이 봄볕에 스르르 녹는 것처럼 무너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다독이는 청년의 품 안에서, 사르르 녹듯이 흐느꼈다.

 

 

해빙 후에 남는 것

새하얗게 설경이었다. 눈발이 폭죽처럼 휘몰아쳐 한 치 앞을 보기 힘들었다. 차갑게 뺨을 에는 눈보라 사이로 겨우 눈을 뜨니 하얀 손이 눈앞에 있었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의지할 요량으로 맞잡은 손은, 눈발에 식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차가운 손이, 이리 차갑게 식을 때까지 눈을 맞으면서도 저를 향해 계속해서 내밀고 있었음이 틀림없는 손이 싸늘한 동시에 말도 안 되게 따뜻했다. 손에서 전해진 온기가 가슴을 타고 뺨까지 올랐다. 엘리제는 발간 뺨으로 배시시 웃었다. 손을 내밀고 있던 남자는 엘리제의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지 않게 얼굴을 붉혀서, 엘리제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눈보라를 헤치고 집에 들어와서 엘리제는 먼저 거울 앞에 서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오늘의 차림새가 제법 예쁘장한 것이 새삼스레 만족스러웠다.

바깥에서 계속 찬바람을 맞은 뺨이 아직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한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눈은 소리 없이 쌓이고 사랑도 소리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아까의 일들을 생각하니 계속 웃음이 나서 엘리제는 난롯가 의자에 앉아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킥킥 웃고 있는 동안 뒤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은 몸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네?”

엘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는 겨울마다 조금만 추워도 감기를 심하게 앓았잖아. 그래서 여학교에 갔을 때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런데 올해는 괜찮아 보여서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버지께 검술을 배운 효과라도 있었나?”

그러자 엘리제는 참지 못하고 또다시 웃어버렸다.

“그건 이제 괜찮아요, 오라버니. 난롯가는 따뜻한걸요. 여긴 이제, 몸이 녹을 만큼 따스해요.”

 

어느 날부터인가 토르즈 사관학교에서는 기이한 장면이 목격되고는 했다. 학교 최고의 유명인사인 린 슈바르처가 남 눈도 신경 안 쓰고 하이암즈가의 삼남을 막 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기묘한 것은 그 콧대 높은 패트릭 하이암즈가 화도 안 내고 그저 좋다고 웃으며 린 슈바르처의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어느 소녀가 있다. 가끔은 엘리제가 제도에서 기차를 타고 사관학교에 찾아왔다. 그러고는 오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순서였다.

“단신으로 황자님을 호위했다니,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맡으신 거예요? 패트릭 씨한테 들어서 망정이지, 제가 정말 걱정하느라 살 수가 없어요.”

“미안해, 엘리제. 너한테는 항상 걱정만 시키는구나. 고맙고 미안해.”

린이 쓴웃음을 짓자 엘리제는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사실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어요. 세 살 때 눈밭에 쓰러진 오라버니를 봤을 때부터 저는 오라버니를 걱정하도록 정해져 있었다구요. 저는 평생 오라버니가 겨울바람 앞의 소년으로 보일 거예요. 오라버니 잘못은 아니에요.”

“하지만 올해 들어서 부쩍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건 사실이라서. 너와 부모님께는 많이 걱정을 끼쳤을 것 같구나. 미안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나도 이렇게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이럴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가끔은 결정화되어서 오래도록 녹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런 건, 평생 녹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는 앞으로 갈 수 있는 거니까요.”

 

***

 

안녕하세요 후기 자리 겨우 만들었다 헤헤 지금 새벽까지 써서 좀 제정신이 아니네요 헤헤

왜 이걸 썼냐면… 신간은 못내고 대신 뭐라도 하고싶은데 탐라에 린한테 까이는 패트엘리 보고싶다는 말이 보여서 주워먹었어요. 근데 이도저도 아닌 게 나와버렸군요…! 저는 짝사랑하는 소녀가 좋아요. 엘리제가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ㅠ 엘리제의 트루엔딩은 패트릭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린한테 까이는 나쁜벌레 패트릭이좋읍읍

섬궤 NL은 역시 서브에 좋은 게 많지 싶어요. 휴고베키나 프리델로긴스, 케네스애너벨 좋지 않나요. 근데 다음에는 린크로나 비타크로 내고싶다. 하궤도 하고싶다. 요즘 바빠서 초죽음 상태지만 언젠가 심기일전해서 책을 뙇! 내고싶네요…. 내용이 제멋대로지만 곧 연말인 걸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즐겁게 썼으니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연말 되시고 모두 피쉬버거 가게에서 뵈어요!

-20151116 유체이탈한 셀라-

C.C. x 마르그리드

있던 것들이 없어지는 시대였다. 30세기에 접어들면서 요라스 대륙의 지도는 아주 단순해졌다. 건물마다는 사라져 벌판이 되고 언덕마다는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소용돌이가 기승을 부리자 사람들은 이제 눈으로 지도를 보는 대신 귀로 제일 이른 소문을 찾아 듣고 길을 다녔다. 순순히 지도를 따라가다가는 언제 소용돌이를 만나 산 사람이 죽은 자가 될지 모르는 그런 시대였다.

그래도 크고 작은 산맥 줄기는 용케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산맥이 너른 황야를 빙 둘러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 황야에 레지멘트의 요새가 자리를 잡았다.

이 요새를 소용돌이의 암흑에 맞서 싸우는 시대의 전사들의 요람, 이라고 거창하게들 부르기도 했으나 실상은 혈기왕성한 남자애들부터 아저씨들까지가 자기네끼리 모인 장소였다. 이 요새가 황야에 있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소박한 장소라는 뜻이고, 반대로 말하면 참 놀 거 없이 지루한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술집도 없어, 도박장도 없고, 여자도 엔지니어나 귀신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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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엔지니어로서 직위를 부여받은 사람 중에 판데모니움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말 안 듣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어미는 짓궂게 일렀다. 너 지상으로 보내버린다. 개중에는 지상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래로 아래로 고이는 구정물을 목도하고 돌아오면 대개는 정결하고 위생적인 고향의 정취에 젖어 말하고는 했다. 아, 지상은 정말 멋진 풍광이었지. 다시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엔지니어들 중에서도 금숟가락 물고 태어난 이른바 우월한 개체들이 테크노크라트였다. 남들이, 특히나 지상 인간들이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부러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긴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다르고말고. 말초적인 풍류를 좇는 이들과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유구한 사명에 온몸을 바친 우리는 다르고말고. 입에 문 금숟가락을 굳이 흙바닥에 떨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들 합리화를 했다.

당시 학술원에 재학중이던 이오시프라는 자는 그중에서도 그 사명의 순수함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였다. 그 어리숙이는 매일 샛별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폈다. 그리고 즉물적인 쾌락에 자꾸 한눈을 파는 동료들에게 엔지니어의 본분에 충실하라며 엄하게 야단을 쳤다. 멀리서 히죽히죽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말에 따랐다. 그자의 주변은 늘 그렇게 진지했다.

그러나 그 무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책에 몰두하던 떼거리의 공기가 일순 술렁였다. 햇볕 아래서 그녀가 머리를 대강 올려 묶으면 갸름한 상앗빛 목이 드러났다. 살짝 붉은 꽃 위에 시선을 둔 더 붉은 눈동자가 고왔다. 사내는 자신도 그녀에게 꽤나 시선을 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녀가 부딪쳐 오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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