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성

1. 크레니히는 사실상 집에 갇혀 자란 것과 진배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와 싸운 기억이 있다. 지금은 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하디 사소한 이유였다. 생떼를 부리며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다가, 갑자기 숨이 가쁘더니 곧 세상이 노랗게 회까닥 돌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가 크레니히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마르그리드는 크레니히를 집 밖에 홀로 두려 하지 않았고, 크레니히도 감히 어머니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깨어나 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며 눈물 젖은 뺨을 크레니히의 얼굴에 잔뜩 부비던 어머니의 볼에서는 소금기 짠 내음이 났다. 그 집은 소금으로 된 성이었다.

 

 

2. 로쏘, 라고 하면 생화학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연구에 미친 천재는 새로운 연구거리를 또 잔뜩 만들어내고 감탄도 욕도 진탕 들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수식이나 법칙으로 정리하는 데 도가 텄지만 살면서 이성을 흐리게 하는 악마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악마는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홀리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더니 기어코 악귀로 붙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악마의 자식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악마의 새끼 아니랄까봐 과연 새끼 악마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소금 성에서 키운 악마. 그녀가 땀과 눈물로 쌓은 성에서 완성시킨 악마. 로쏘는 소금 성에 갇혀 있다.

 

 

3. 크레니히가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불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크레니히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확연히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동료를 툭툭 치면서 뭐라고 말을 했다. 동료는 고개를 젓다가 멋쩍은 듯 웃고는 크레니히 쪽으로 걸어왔다. 어머니 외에 한 명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크레니히는 어느 누가 자신을 보는 것도, 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빠짐없이 달가웠다.

“자, 크레니히. 저쪽에 가서 로쏘 아저씨에게 인사하렴. 오늘부터 네 양아버지가 될 분이시란다.”

열여섯 살까지 어머니와 단둘이만 지냈던 크레니히에게는 어느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도, 방금 들은 말의 내용도.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년은 아까 바라보던 남자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소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 하세요…….”

“팔자 더럽군.”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서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짓씹듯 말했다.

“너는 장례가 끝나면 나랑 같이 내 집에 갈 거서 거기서 지낼 거다.”

“감사합니다…….”

세상 물정엔 어두워도 최소한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건 알 수 있었던 크레니히는 빠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 말할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로쏘… 아저씨?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를 일은 없을 텐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4. “돈은 여기에 놔둘 테니 네가 알아서 해. 귀찮게 신경쓰게 하지 말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족하면 말을 하든가 말든가.”

로쏘의 집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자그만 방에 있는 것은 침대와 책상이 다였다. 낯선 곳에 있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집에 있다는 사실에 계속 심장이 두근거려 크레니히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밖에서 이따금 종이 넘기는 소리나 펜을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만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혹은 먹을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다. 처음 며칠은 굶었다. 그렇게 있는 대로 굶주린 후에야 조악한 칼로리바나 식사대용 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대강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크레니히는 결국 혼자 돈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크레니히는 어머니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는 혼자서도 외출할 수 있었고, 이제는 혼자서 외출해야만 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혼탁하게 뒤섞여 눈물이 났다. 어색한 솜씨로 크레니히는 여러 가지 식재료를 집에 채워놓았다. 혼자서 식사를 하다가 이거 괜찮네요, 엄마. 하고 앞에 음식을 권할 뻔했다. 혼자였다.

몸이 좋지 못했던 소년은 해가 다 뜬 후에 일어나 저녁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조금씩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로쏘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레니히는 로쏘가 며칠씩 걸러서야 불규칙하게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일까. 어디서 지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그 순간 완전히 지쳐 있던 로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없는 것처럼 행동해. 좋아서 널 맡은 거 아니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소년은 방문 틈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흔적을 좇다가 결국 침대에서 훌쩍거리며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어났을 때, 크레니히는 휑하던 방 안에 책이며 노트며 장난감이며 못 보던 생활용품이 잔뜩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5. 꼬박 한 달이 지나자 크레니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혼자서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것부터, 책을 찾아 읽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로쏘라는 남자였다. 혹은, 혼자 지내는 것이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크레니히 자신이 며칠, 혹은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집에서 나왔을 때 크레니히는 자신이 이제부터 어쩌려는 작정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알았고 도착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알았다. 구역 밖으로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라 종일 거리를 헤맸다. 날이 저물고 길을 잃었나, 이대로 어디도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싶을 때 즈음에야 낯익은 풍경, 낯익은 거리, 낯익은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헤매지 않았다. 발이 먼저 이끄는 대로 따르고 나니 십년 넘게 어머니와 둘이 함께 지냈던 집이 보였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오래된 집으로 향하던 크레니히는 집 정문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추었다. 어쩐지 시큰하고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열망이 더 강했기에 소년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집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쓰던 가구와 소품들 위에 추억이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추억을 되새기던 크레니히는 깊이 들어서서야 집 앞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 달을 비웠을 집이 먼지도 거미줄도 없고 누군가 지내는 것처럼 살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겁이 나서 제 어깨를 끌어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크레니히는 마침내 범인을 발견했다.

마르그리드가 주로 연구를 했던 방, 나무 의자 위에서 붉은 머리의 남자는 소품처럼 당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6. “잘 지내니, 크레니히?”

크레니히가 로쏘의 집에 들어간 후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나서 만난 사람은 바로 장례식에서 로쏘를 크레니히에게 소개했던 남자였다.

“아. 하긴 내 얼굴은 모르겠구나. 마르그리드가 너를 워낙 끼고 돌았어야 말이지.”

“아, 아니에요! 기억해요. 장례식 날에 와주셨었죠.”

“그래, 그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크레니히도 배시시 마주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사람도 나에게 이렇게 웃어주면 좋을 텐데.

“아무튼 너를 로쏘한테 맡기고 지금까지 통 신경을 못 써서 미안하구나. 우리가 워낙 바쁘니까 말이다……. 가끔 신경써야 할 것도 까먹어 버리는구나. 마르그리드의 아이니까 로쏘가 어련히 잘 하겠지 싶지만, 그 양반 성격이 아주 무난하지는 않잖느냐. 혹시 불편해도 네가 이해하렴.”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크레니히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는 방금 조금 잘못 말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기, 어머니와 로쏘 아저씨는 어떤 사이였나요…? 어머니도, 아저씨도 서로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하하, 이것 참. 그 둘이야 동료지. 같이 연구했던 사이야.”

“그런가요…?”

“그럼, 그럼.”

“그러면 저,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 아무래도 혼자 지내기는 어려워서요.”

어머니와 전에 살던 집에서 잠든 로쏘를 발견했던 날, 크레니히는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었다. 크레니히에게 로쏘는 알 수도 없고 차마 거스를 수도 없는 재해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이해할 실마리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7.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어디 한 구석도 물러설 곳 없는 여자로 만들었을까. 악마는 어떻게 자라났을까. 그녀의 집에서 로쏘는 이해했다. 곳곳이 눈물 자국이 마른 바닥이었다. 벽에서는 병病의 냄새가 났다. 창백하게 말간 아이의 얼굴을 보고 로쏘는 알았다. 그녀는, 절박했다.

 

 

8. 꼬박 며칠을 수소문하고 찾고 확인하고 나서 마침내 크레니히는 안도했다. 어머니와 사이가 그렇게나 깊었다면 이 남자는 아마 나를 쉽게 영영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9.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될 거야.

아무리 봐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듯 보이는 로쏘를 위해 크레니히는 요리를 연습했다. 음식을 꾸미는 것은 처음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몇 번 실패를 거치니 제법 맛깔나는 모양새의 접시가 되었다. 로쏘가 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크레니히는 기회가 있을 때 서둘러야만 했다. 구운 고기와 샐러드와 음료를 가져갔더니, 남자는 혀를 쯧 차고 고개를 돌렸다.

식사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몰라. 집 구석에 몇 티백만 비워진 홍차 박스가 있었다. 살짝 우려서 떫은맛이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가져갔다.

“너 왜 자꾸 귀찮게 구냐? 없는 듯이 있으라고 했을 텐데? 이해력이 떨어져?”

“…죄송해요.”

“정말 죄송한 줄 알면 그만 웅얼거리고 네 방으로 꺼져.”

“그렇지만 아저씨, 그런 자세로 작업을 하다가는 건강을 해쳐요. 책상으로 자리 옮기는 것 도와드릴게요.”

“손대지 마.”

“엄마도 저한테 그러지 말라고 자주 지적하셨는데……,”

“손대지 말라고!”

다가가던 크레니히에게,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날 밤은 잠들지 못했다. 로쏘가 사 놓았던 장난감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새벽에 흐려지는 별 아래서 소년은 마침내 꿈꾸듯 받아들였다. 아, 그렇구나. 이건 경멸이구나.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는 혐오하는 게, 원래 당연한 거구나.

 

 

10. 로쏘가 학회에서 만난 마르그리드는 어딘가 세상에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여자였다.

“저번 논문 잘 읽었어요, 로쏘.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마르그리드… 그 이름은 몇 번 들었지. 당신 분야랑은 좀 다르지 않나?”

“맞아요, 난 생화학에는 영 약해서. 당신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마르그리드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가느다란 여자의 손가락이 이상하게도 손에 무겁게 감겼다.

 

 

11. 그 로쏘가 남과 함께 공동연구를 한다는 발표에 모두가 경악했지만 연구는 드물게도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자신의 파트너의 수준에 제법 만족하고 있었다.

“아, 로쏘. 이쪽 결과물 좀 봐줄래? 이게 맞는지 헷갈리네.”

“맞잖아? 임페타민을 썼으니까 여기서는 반응이 나오는 게 맞지.”

“잘 알고 있네, 로쏘. 역시 당신은 해박해.”

“입에 발린 칭찬은.”

“그러면 임페타민에 마황을 가하면 최음제가 된다는 사실도 알겠네?”

무심코 돌아봤을 때 마르그리드는 입가에 그려낸 듯이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12. 연구의 주제는 심장 판막 세포 기능의 활성화였다. 로쏘는 마르그리드에게 심장병이 걸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13. 크레니히는 가끔 발소리를 죽이고 멀리 떨어진 옛 집에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아는 것이 다행이었다. 로쏘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으나 여하튼 원래 자기 집 대신에 마르그리드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주로 마르그리드가 연구를 하던 방에서 그녀의 물건을 자기 것처럼 쓰면서 지냈다. 마르그리드가 쓰던 시약과 샘플을 쓰고, 마르그리드가 쓰던 차트에 기록을 했다.

연구에 푹 빠진 로쏘의 모습은 크레니히를 대할 때처럼 마냥 신경질적이지만은 않았다. 항상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고 생각에 잠기면 약지 손톱을 깨무는 습관이 있었다. 크레니히는 그 모습을 모두 가만 지켜보았다. 저런 로쏘는 그래도 썩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고픈 아이는 로쏘가 나타나면 다가가기를 반복하고, 그러면 남자는 질겁해 걷어차고 소리를 치고를 반복했다.

 

 

14, 아. 당신은 나를 정말로 경멸하는구나.

그렇게나 경멸하면서도 당신은 내 편의를 계속 봐주는구나,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러면 역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은 나에게 정말로 위해를 가할 수는 없겠네.

 

 

15. “너무 걱정 마, 로쏘. 새 동생이 생기면 크레니히도 좋아할걸.”

나중에서야 그녀는 거짓말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무리한 연구로 몸이 망가져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악마와 교배할 수 있으리라고는 차마 생각하지도 못했다.

 

 

16. “저는 어머니와 닮았나요?”

쟁반에 다기를 담아 온 크레니히가 물었다.

“저 들었어요, 아저씨랑 어머니랑 많이 친하셨다고. 한 번도 얘기 안 하셔서 미처 몰랐어요.”

“치대지 말고 꺼져.”

“…여기 놓고 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닮았나? 닮은 구석이 있던가. 눈 색 정도가 닮았던가? 굳이 따지자면, 우는 얼굴이 닮았다. 웃으려 노력할 때조차도 한껏 우울한 그런 표정이 가장 닮아서, 저도 모르게 마구 대하고 마는 것 같기도 하다. 목이 텁텁했다. 로쏘는 무심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이켰다. 맛이 썩 괜찮았다. 마르그리드의 아들 아니랄까봐 크레니히는 갇히다시피 자랐는데도 모든 학습이 빨랐다. 향을 음미하던 로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약에 대해서는 해박했다. 그래, 이 녀석, 마르그리드의 아들 아니랄까봐…….

 

 

17. 크레니히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로쏘의 방 앞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18. 눈을 떴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버둥칠수록 밧줄이 몸에 죄여들었다.

“아저씨가 도무지 저랑 가만히 얘기를 해 주질 않으니까 그렇잖아요.”

눈을 희번득거리던 로쏘는 장소가 마르그리드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몸에 벌건 밧줄자국이 남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부림쳤다.

“너 이 새끼 미쳤구나? 그래. 그 여자가 끼고 기른 아들이 제정신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아저씨는 우리 엄마랑 내연 관계 아니었나요? 그래서 나를 입양한 거잖아.”

“닥치고 이거 풀어.”

“저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는 미망인이고, 아저씨는 미혼인걸. 덕분에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됐기도 하고. 아저씨는 엄마를 정말 사랑했나봐요.”

“그 끔찍한 여자 얘기 더 하지 마.”

“나는 궁금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라는 건, 싫은 건가요, 좋은 건가요? 싫어하는 것 같긴 했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싫다면 나를 왜 입양하고 기르는 거예요? 조금은 정이 가는 거 아닌가요? 나는, 엄마랑 안 닮았나요?”

“그래, 네놈도 어미를 닮아서 끔찍하구나.”

“아무래도…….”

크레니히는 허리를 굽히고 바닥에서 청테이프를 주워다 직 뜯어서 로쏘의 입에다 착 소리 나게 붙였다.

“아저씨는 아직도 상황을 모르고 지껄이는 것 같네요. 시끄러워.”

 

 

19. 아저씨. 마침내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되니까 좋네요. 오늘은 볕이 화창해요. 아저씨한테도 조금 보여줄게요. 어때요, 창밖이 보이죠?

방안에만 있으니 답답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원래 연구밖에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자꾸 밤새서 무리하게 연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견딜 만해요. 나도 전엔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방에서 나가지를 못했거든요. 이 방에서 혼자 엄마가 올 때까지 종일 기다리기만 했지. 그런데 이 년쯤 전부터, 갑자기 엄마가 밤늦게 들어오시곤 하더라구요. 원래는 저녁 되자마자 들어와서 내 상태부터 확인하고 꼭 안아주시는 그런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저씨 때문이었구나. 하하.

아, 기분 이상해요. 이런 얘기를 하면서 호적상의 양아버지한테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려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이름을 불러도 돼요? 로쏘.

 

 

20. 좋은 아침이에요. 로쏘 씨 몸이 나빠질까봐 링겔을 꽂아 놨어요. 책을 읽으니까 여기 기구들 사용법을 금방 알겠더라고요. 엄마의 아들이니까, 나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모양이에요. 걱정 마요. 밤에는 수면유도제를 섞고 있으니까 꿈도 안 꾸고 잘 잠들 수 있을 거예요. 약이란 건 신기하죠. 아저씨한테 더 배우면 좋을 텐데.

아 정말, 먹지도 못했는데 무슨 힘이 있어서 그렇게 몸을 흔들어대는지 모르겠네요. 살에 빨갛게 자국이 남잖아.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니까 좀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돼요?

차라리 영양공급을 멈춰야 하나? 안되겠다. 아직 밤은 아니지만 수면제 농도를 높일게요. 그동안 나는 자국에 바를 약을 사올 테니까 착하게 조용히 자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게요.

 

 

21. 미쳤다고 생각했다. 징그럽고 끔찍해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지만 링겔로 주입되는 약기운이 몰아쳐 반쯤 몽롱했다. 약에 취해 꿈결처럼 소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밀려왔다. 이야기 중에는 날씨 이야기도 있고 크레니히가 바깥에서 본 풍경이나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마르그리드의 이야기를 했다. 로쏘. 엄마가 그렇게 좋았어요?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울 정도로? 하긴 우리 엄마 같은 사람 별로 없죠. 돌이켜 보면 정말로 자상하고 헌신적인 분이셨어요. 언제나 상냥하고 천사처럼 세심하셨지. 정말 세상에 그런 분은 또 없을 거예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쏘는 미친 사람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고 날뛰었다. 소용이 없자 크레니히를 쏘아보았다. 수분이 모자란 몸에서 눈물이 흐르다 말라 피가 흘렀다. 소년이 말하는 어머니와 로쏘가 아는 마르그리드는 완전히 다른 여자라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은가 궁금해진 크레니히가 살짝 테이프를 떼자 오래 열지 못한 입새로 억눌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악므으 스끼는 새끼 악마지

“그러니까, 저는 가끔 로쏘가 정말 멍청한 것 같아요.”

크레니히는 언젠가 로쏘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로쏘를 걷어찼다.

 

 

22. 아저씨가 실종돼서 다들 난리예요. 그렇지만 아직 여기까지 뒤질 생각은 못한 것 같아요. 이 집이 워낙 외지잖아요. 나는 조금이라도 무리했다가 언제 발작해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까 엄마가 일부러 이런 허허벌판까지 찾아서 이사를 했어요.

근황을 알아보다가, 엄마랑 아저씨에 대한 소문도 들었어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깊은 관계였다고들 하던데. 아저씨는 그런 소문이 도는 거 알았어요? 소문이란 거 꽤 상세하더라구요. 개중에는 부풀려진 것도 있는 것 같고. 어때요, 궁금하죠? 더 궁금해 해봐요. 자세한 건 다음에 말할 테니까 나를, 기다려 봐요.

그리고 또, 아저씨가 요즘 부쩍 이상해졌다고들 하던데. 항상 냉철하던 사람이 갑자기 멍하고, 심지어는 귀신을 본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요. 그거 엄마의 죽음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정말 궁금해요. 아저씨는 왜 그렇게 나한테 엄마가 싫다고만 해요? 뭐, 더 말하면 정말로 아저씨가 발작해버릴 것 같으니까 이쯤 할게요. 전에 쓰던 약에 내성이 생긴 것 같아서 오늘은 다른 걸 섞어봤어요. 한층 더 잘 들을 거예요. 꿈도 꾸지 말고 잘 자요, 로쏘. 잠꼬대로 엄말 부르는 거 시끄러우니까.

 

 

23. 일단 몸으로 하는 저항은 그만두기로 했다. 손 없이 하는 생활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결코 익숙하고 싶지 않았던 상황에서 로쏘는 그가 있는 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르그리드에게 이 풍경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탁상 위에 동그란 거울, 그리고 잡다한 용품들. 마르그리드가 소일거리를 하던 장소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저 서랍 안에는 그녀가 말하던 약품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무색에 톡 쏘는 냄새가 나는 것이 유독성 용매다. 서랍장까지 어떻게든 기어가서 저 꼬마 악마를 용액에 노출시켜 없애면 약기운도 흐려질 테고 이 끔찍한 생활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거울을 보다가 손을 뻗어서 도구를 챙기곤 했다 하니 아마도 의자 아래쪽에 있는 왼쪽 서랍장일 것이다.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서랍장 위에 여자의 손이 보였다. 거울을 보던 마르그리드가 뒤를 돌아 로쏘에게 눈짓하며 웃었다.

지금 무슨 생각해, 로쏘. 당신 주제에.
로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귀신 주제에.

 

 

24.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어.”

지금까지 만난 시간 동안 마르그리드가 이토록 눈을 빛내며 환하게 웃은 적이 없었다.

“수고했어, 로쏘. 우리는 이제… 성공했어. 성공한 거야. 우리 연구가 마침내 끝난 거야.”

“연구가 끝난 거야, 관계가 끝난 거야?”

평소라면 웃어버렸을 마르그리드는 답지 않게 멍청한 표정이었다.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한 듯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로쏘는 다시금 확인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의 의도를.

“결과는 줄 수 없어. 너무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로쏘.”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이거 보이지, 마르그리드? 우리 연구자료야.”

로쏘는 커다란 용액 병을 열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쏟아 부었다.

“아, 안 돼…….”

마르그리드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로쏘는 병에 달려드는 마르그리드의 허리를 급하게 잡아챘다.

“당신 정말 미쳤구나? 저건 강산이야. 어디다 손을 넣으려고 해?”

“로쏘…….”

“크레니히라고 했나?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고 있어서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했지. 당신의 아들은 죽을 거야. 당신은 나한테서 아무 것도 못 얻는 거고.”

“그럴 리가 없잖아……. 다시 생각해봐, 로쏘. 나한테 왜 이래. 우리 잘 지냈었잖아?”

처음으로 마르그리드가 진심으로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로쏘는 고통스러운 쾌감을 느꼈다. 심장 한쪽이 뻐근했으나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저 여자의 안중에는 정말로 아들밖에 없다. 십오 년을 그렇게 살아서 이제는 습관적으로 아들을 위해 생을 바치게 되어 있다. 아들이 살아있는 한 여자는 자신의 곁에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니, 차라리 그런 공존은 없는 것이 좋았다. 마르그리드는 그 밤 내내 제안과 회유로 로쏘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아무 것도 제대로 내주지 않고 필요한 걸 얻어가려고만 하다니, 욕심이 과하지.”

“그러면 내가 바칠 수 있는 걸 모두 바치면 되겠네.”

“소용없다니까.”

들러붙는 마르그리드를 밀쳐내고 멀어지는 로쏘의 뒷모습을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줄게, 로쏘.”

그러나 로쏘는 돌아보지 않았다.

 

 

25. 마르그리드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뜬눈으로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자신이 연구중이었던 약물의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다. 발견자는 공동연구자인 로쏘였다. 마르그리드와 전날 가장 늦게까지 함께 있었던 당사자였기 때문에 살해 혐의를 쓰기도 했으나 그의 상태를 보고 곧 의심은 거두어졌다.

마르그리드는 웃고 있었다. 보란 듯이 웃는 얼굴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로쏘가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였다. 죽은 사람을 보는 것이니 귀신을 보는 것이 맞았다.

 

 

26. 약기운에 취해 세상이 분홍색으로 연두색으로 보라색으로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거 재밌네, 로쏘.”

“마르그리드.”

“어때요? 엄마가 이런 말씨를 썼다면서요? 비슷해요?”

“마르그리드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너는 마르그리드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어.”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

“엄마를 사랑했어요?”

“죽일 만큼.”

“나는 엄마를 안 닮았어요?”

“닮았지. 안 좋은 쪽으로만.”

“이제 그만 엄마 말고 그냥 나를 봐주면 안 돼요?”

“안 돼.”

“그러면 나한테서 엄마를 봐 줘요. 닮을 수 있게 노력할게요.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한테 알려줘요…….”

그러고 보니 우는 표정은 조금 닮았던가. 언제나 울고 있는 붉은 눈, 마르그리드의 눈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집에는 단둘이었다.

소년과 남자는 아직도 여자가 눈물로 쌓은 소금 성에 갇혀 있다. 짠 내음이 났다.

 

 

27. 소금 성은 언젠가 녹아서 무너져 없어지라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화제가 되었던 생화학자 로쏘는 한적한 빈 집에서 몸이 밧줄에 묶인 채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를 납치한 범인에 대해서나 그 동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로쏘 본인이 그러기를 원했고 스스로도 함구했기 때문이다. 학계의 동료들 역시 사건이 로쏘 본인에게 트라우마가 된 듯하다고 판단해 굳이 자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입을 닫아주었다. 로쏘가 충격으로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로쏘는 정확히 진상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28. 눈을 떴을 때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익숙한 밧줄도 약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허전했다. 로쏘가 아직 익숙하지 못한 사지의 자유를 시험해 보는 동안, 경찰은 부대에 추격당하던 어린 범인이 끝내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고 알려주었다. 소년과 함께하는 단발머리 여성의 모습이 목격되었다고도 한다.

경찰은 피해자인 로쏘에게 소년 외의 공범이 있었는지 물어보았지만 로쏘는 정신적 안정의 필요성을 이유로 굳이 입을 꾹 다물고 사건에 대해 아무런 증언도 하지 않았다. 도무지 안 닮은 것 같던 녀석이 가만 보면 이상한 데서 닮았더니만 끝맛까지 닮았다 싶었다.

 

 

29. 악마의 새끼는 새끼 악마라고, 로쏘에게 들러붙은 악귀는 이제 둘이 되었다. 남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신에게 웃어주는 여자를 보고,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면 차를 권하는 소년을 보았다. 두 악귀의 모습은 슬픈 눈이 꽤나 닮았다.

그래 봤자 소금이다. 언젠가는 녹아서 흐려지겠지. 로쏘는 그것이 못내 슬펐다. 무너진 성의 잔해에서 짠 내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