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 에이안즈

레뮤님이 신청해주신 단챠형 커미션입니다! 학교 근처의 먼발치에서 안즈를 발견하고 바라보며 완벽하게 빛나는 안즈를 손에 넣기를 바라는 에이치, 독백 위주, 애정어린 집착 냄새..라고 하셔서 좋아하실 것 같은 느낌으로 써봤습니다 ㅇ.<..!

 

***

 

오후 2시 50분. 시침과 점점 가까워져 가는 분침을 확인하며 에이치는 초조한 기분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정장을 입은 그는 유메노사키의 교문에서도 눈에 띄어, 지나가는 사람 몇이 그를 보고 수군거렸다. 가끔 알아보는 기색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멀리에서 수군대다가 사라지는 것이 전부다. 나름대로 작년까지 ‘황제’로서 군림했던 남자였으나, 그가 졸업하고 유메노사키에 발을 끊고 나서 한때의 전설은 한때의 전설로만 남았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청춘은 현실 속에 묻혀버린다. 시간은 한 번도 그의 편인 적이 없었다.

‘바보 같네.’

한때 그렇게 집착했던 청춘이 덧없이 흘러가버린 것을 피부로 느끼며 에이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유메노사키 근방에 있는 기업체와의 회견에 굳이 대표인 직접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바로 에이치 자신이었다. 회견은 한 시간 후, 출발하기까지 남는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지금 그의 몸은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바깥에 서서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동안 오한이 들었다. 텐쇼인 에이치는 결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원하는 것은 곧바로 팔을 뻗어 손안에 움켜쥐어야만 하는 성미였다. 지금까지 그 과정에서 망가뜨린 것들에게는 미안함을 안고 있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시간은 한 번도 그의 편인 적이 없었기에.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얌전한 아이처럼 교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째서? 에이치는 자문했다. 그리고 문득, 겨울이 끝나가던 날의 졸업식을 떠올린다. 몽글몽글한 눈송이가 흩날리며 시야를 부옇게 하고, 졸업을 축하하러 온 후배들 중에서 이제는 낯이 익은 한 소녀를 마주치고, 자신도 모르게 짓궂은 소리를 했던 순간을.

“그동안 고마웠어, 안즈쨩. 너에게는 많은 고생을 시켰구나. 이렇게 내가 졸업하는 게, 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려나?”

마지막까지 얄궂은 소리에 소녀는 당황한 표정을 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순간까지 이런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도 참 악취미라고 생각하며 에이치는 자조했다. 하지만 소녀는 곧 거짓말처럼 웃는 것이었다.

“마지막처럼 말하시네요.”

“그야, 이제 졸업이잖아.”

“선배는 계속 업계에 있으실 거잖아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도 금방 따라갈게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순진한 말을 하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에이치는 피식 웃었다.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오한이 가라앉았고, 학생들의 시선이 아까처럼 신경쓰이지 않았다. 곧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왁자지껄 교실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그중에 책가방을 대충 걸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고, 세상이 흐드러졌다.

이제 3학년이 된 안즈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티 없는 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었다. 여자라기엔 너무 티가 없고, 소녀라기엔 이제 부쩍 여자 태가 나는 그녀는 뒤따라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 틈에서 의젓하게 앞장서고 있었다. 신설된 프로듀서과의 아이들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유메노사키는 다시는, 한 명의 독재자가 이끄는 학원은 되지 못할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언젠가 네가 나를 부수어주기를 기다렸지. 하지만 너희는 나에게 복수하지 않았어. 순진하게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굴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이치는 걸어가는 안즈를 지켜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꿈을 꾸는 소녀는 짧은 머리가 길어 이제 허리까지 내려왔고 눈웃음이 짙어졌다. 키가 좀 더 커서 치마가 껑충 올라갔고 그럼에도 아직 보조개가 핀 뺨에 앳된 기가 남아있었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대로인 부분 혹은 달라진 구석 하나하나가 눈에 박혔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의식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네가 언제야 다 필지 궁금해. 순진한 네가 졸업을 하고 이 지독한 토양에 나오면 너는 견디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어 시들어버릴까, 아니면 내 앞에서 버티었듯이 만개해서 짙은 향기를 피우게 될까. 에이치는 눈을 반 접어 웃었다. 즐겁고 황홀했다. 아, 나는 이걸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어떤 쪽이든 기대되어 견딜 수가 없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다림이 두근거린다는 걸 알았어. 처음으로, 시간이 내 편을 들어주었어.

그러니까 지금은 이 기다림을 만끽해야지. 에이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회의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지만, 아직은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만으로 이 두근거림을 만끽할 셈이었다. 주머니에서 기기를 꺼내어 차를 부르려는 찰나,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배!”

등을 돌리자 말간 낯에 웃음기를 띠고 손을 흔들며 이 쪽으로 달려오는 안즈가 보인다. 꽃이 피듯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이고, 하얀 얼굴이 흔들리며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에이치는 손을 들어 안즈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늘 그랬듯,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안에 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꽃의 언어

장미향기가 잔뜩 났어요. 아주 코를 찌를 지경이었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꽃에 둘러싸여 차 마시기를 좋아하시니, 장미를 산더미처럼 쌓아 보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시는 흰색 장미를 하얗고 하얗게 쌓았어요. 그런데 도무지 기분이 좋아지실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죠.

아, 이제 황제 폐하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려나요? 에이치는 학원을 졸업했으니까요.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니군요. 결코 잊지 못할 졸업식이었죠. 졸업식의 마지막 공연은 물론 학원 정점인 우리 「fine」이 맡았습니다. 아아, 「fine」의 「마지막」이라니 이 얼마나 유쾌하고 영광스러운가요?

귀여운 토리는 분명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알고 있어요. 제법 영악한 아이입니다. 작은 몸에 하얀 유닛복을 앙증맞게 걸치고 발을 구르고, 보는 사람이 웃음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애교를 부리죠. 그날은 특히나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답니다. 주인이 힘을 잔뜩 냈으니 원래도 완벽한 유즈루야 말할 여부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히비키 와타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무대에 입장할 때마다 탄성과 환호를 듣는 일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네, 확실히 그날의 공기에는 평소의 무대보다도 더 뜨겁고 애태우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의 등장입니다.

팡파르 속에서 황제 폐하가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거짓말처럼 환호성이 멎고 모두가 숨을 죽였어요. 에이치는 천사 같았어요.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가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랍니다. 갓 하늘에서 내려와서, 금방 다시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천사요. 희끄무레 웃는 에이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그 어느 무대에서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이것만은 제가 살아온 세월을 걸고 확언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습니다.

황제는 무대에서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학생회장이 병원에 실려가는 동안 졸업식은 끝났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꿈의 학원도, 한단지몽도, 무지갯빛의 서커스도 모두 끝났고 지금은 모라토리엄입니다.

그래도 아직 유예기간이 조금 남았죠. 원하던 대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거기에 조금 더 시간이 남았는데 왜 그리도 심통이 난 채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광대가 풀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에이치는 한 송이를 들고 장미 향기를 맡는 듯 얼굴을 가져다대더니 주먹을 쥐어 손에 쥔 꽃잎을 우그러뜨려버리더군요. 그리고 내던졌습니다.

“꽃이 마음에 차지 않나요?”

“응.”

참, 별일입니다. 곧 쓰러질 듯 아플 적에도 언변은 유창했던 우리 폐하가 아닙니까? 그런데 짧은 단답에 입조차도 꾹 닫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광대는 광대의 일을 하고, 폐하가 꽃이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성에 찰 만한 것을 가져와야죠.

그래서, 특히나 향이 빼어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장미를 대령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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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안즈

단챠5성기념 리퀘 중 에이안즈입니다!
휘두르는 에이치와 마주 서는 안즈의 배틀노말이 좋은 느낌입니다.

***

안녕, 안즈쨩,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안색이 썩 좋지 않구나. 역시 너는 지나치게 무리하는 것 같아. 최근에 준비할 드림패스라도 있었던가? 미안해, 학생회장인데도 아직 비공식 드림패스는 전부 파악하지 못했거든. 아니면 역시 그 표정은 나 때문인 걸까. 나는 상대하기 거북한가? 그렇다면 조금 서운하구나. 나는 안즈쨩과 좀 더 친해지길 바라고 있거든. 어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차라도 한잔 하겠어? 때마침 학생회실도 비어 있단다.

“괜찮습니다.”

안즈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거절했다. 학생회장쯤 되는 사람을 대하기에는 너무나 미련 없는 태도라 나무라는 말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안즈쨩은 꼭 겁 먹은 토끼나 경계하는 사슴 같네. 긴장 좀 풀어,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사자가 아니라 텐쇼인 에이치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사자보다 무서운걸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저도 모르게 입을 내밀고 볼을 푸우 부풀렸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치는 깃털처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게 싫은 거구나.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의 텐쇼인 에이치가 조금은 너에게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했어. 분명 너는 프로듀서고, 나는 네게 내 무대를 보였으니까. 하지만 나답지 않게 속단했던 모양이야. 역시 혁명가 소녀에게 fine의 무대는 지나치게 지루하고 고답적이었던 거지.”

“아니에요.”

이번 대답은 아까보다도 한층 더 빨랐다. 격렬한 부정이었다. 곧이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속도도 대답하는 속도 못지않았다. 과연 명석한 소녀라, 안즈는 이미 들킨 표정을 숨기려 애를 쓰는 대신 빠르게 상대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선배 때문이잖아요. 왜냐하면 선배가, 당신이, 왜…….”

끝까지 똑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말끝을 에이치가 낚아챘다.

“왜 내가 계속 너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물끄러미 응시하는 파르란 눈빛이 미동조차 없이 서늘했다. 얼마 전 공연에서 저를 바라보던 시선과 꼭 같아서 안즈는 꿀꺽 침을 삼켰다.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는 관객은 본래 공연자의 시선까지는 캐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관객 본인이 공연가의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에이치가 간주에서 목소리 끝을 늘어뜨리며 응시하는 시선, 몸 상태를 고려해 짤막하게 넣은 안무의 끝에 향하는 고갯짓의 방향, 무대를 오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며 위치를 확인하는 눈짓까지 전부가 관람석의 안즈를 내내 곤혹스럽게 했다.

“그걸 알았다면 왜냐고 묻지 않았어요.”

에이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턱을 괸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나도 그 애들 이상으로 너에게 인정받고 싶었단다, 안즈쨩.”

긴 금발머리가 눈앞에 매끄러져 안즈는 눈을 세게 깜박였다.

“어찌됐든간에 너는 이 학원의 유일한 프로듀서니까 말이야.”

“그러면 거리를 지켜 주세요. 프로듀서에게 예의를 지켜 주세요.”

안즈는 어느새 바짝 다가온 에이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부쩍 귀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발이 멎고 말았다.

“하지만 안즈쨩. 그 애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잖아.”

숨이 귀에 닿는 것 같다. 바로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 닿을 것만 같았다. 아니, 과대망상이야. 안즈는 침착하게, 천천히 뒤돌아 보았다.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하이얀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길고도 짤막한 침묵의 끝에 에이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나는 질투하고 있는 거야. 구애하고 있는 거지.”

결벽적으로 창백해 천사 같은 남자의 열렬한 어조와 말의 내용에 그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거절한다. 거절해야 한다. 그것만을 겨우 생각해내고 입을 여는 찰나 에이치가 검지를 들어 안즈의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이 학원의 한 명의 아이돌로서, 유일한 프로듀서에게 말이야.”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위세가 꺾였다고는 하나 상대는 이 유메노사키 학원에 군림하는 절대군주다. 여기서 흐트러지고 얕보여서야 트릭스타의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 라고 생각하며 안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곧이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 놀랄 만큼 형편없었다. 물기가 어려 완전히 토라진 어린애 같았다.

“나를 놀리고 있는 거죠?”

에이치는 잠시 대답 없이 안즈의 얼굴을 수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란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순수한 환희나 승리감 같은 것이 눈빛에 그득해 아이처럼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아이처럼 잔혹해 보이기도 했다.

“드디어 내 앞에서도 이런 표정을 하는구나.”

곧 에이치는 눈을 반 접어 실없이 웃었다.

“말했잖니. 긴장 좀 풀라고. 나는 지금 정말로 기뻐, 안즈쨩. 이제 토끼처럼 경계하지 않는 거지?”

좀 전까지의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텐쇼인 에이치는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아이처럼 하이얗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안즈도 그만 그대로 맥이 풀리고, 웃음이 날 듯 가슴께가 두근대어,

아. 그러니까 그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시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