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엔지니어로서 직위를 부여받은 사람 중에 판데모니움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말 안 듣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어미는 짓궂게 일렀다. 너 지상으로 보내버린다. 개중에는 지상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래로 아래로 고이는 구정물을 목도하고 돌아오면 대개는 정결하고 위생적인 고향의 정취에 젖어 말하고는 했다. 아, 지상은 정말 멋진 풍광이었지. 다시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엔지니어들 중에서도 금숟가락 물고 태어난 이른바 우월한 개체들이 테크노크라트였다. 남들이, 특히나 지상 인간들이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부러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긴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다르고말고. 말초적인 풍류를 좇는 이들과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유구한 사명에 온몸을 바친 우리는 다르고말고. 입에 문 금숟가락을 굳이 흙바닥에 떨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들 합리화를 했다.

당시 학술원에 재학중이던 이오시프라는 자는 그중에서도 그 사명의 순수함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였다. 그 어리숙이는 매일 샛별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폈다. 그리고 즉물적인 쾌락에 자꾸 한눈을 파는 동료들에게 엔지니어의 본분에 충실하라며 엄하게 야단을 쳤다. 멀리서 히죽히죽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말에 따랐다. 그자의 주변은 늘 그렇게 진지했다.

그러나 그 무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책에 몰두하던 떼거리의 공기가 일순 술렁였다. 햇볕 아래서 그녀가 머리를 대강 올려 묶으면 갸름한 상앗빛 목이 드러났다. 살짝 붉은 꽃 위에 시선을 둔 더 붉은 눈동자가 고왔다. 사내는 자신도 그녀에게 꽤나 시선을 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녀가 부딪쳐 오기 전에는.

“미안, 실수예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하며 여자는 눈모를 휘었다.

“이오시프. 맞죠? 나는 마르그리드. 우리 서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말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서로 많이 봤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던 거죠.”

장난치듯이 한없이 가벼운 태도에 불쾌해진 사내는 굳게 고개를 돌렸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여자가 남긴 향기가 뒤늦게야 코에 훅 끼쳤다.

공부만 하는 샌님을 놀리기 위한 내기 같은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어쨌거나 그 말 한 마디, 그 찰나의 감촉이 꽤나 효과가 있었다. 이오시프는 마르그리드가 나타나면 절로 시선을 빼앗기다가 그녀가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말로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2주가 더 걸렸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여자였다. 목소리가 크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오시프와 의견이 갈리는 일이 있으면 화제가 다 끝나고 나서야, 참 아까 무슨 일로 시끄러웠나 봐요? 난 못 들었어요. 내 의견은 이러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체를 했다. 그렇게 새침하게 굴다가도 갑자기는 솔직하게 외로움을 털어놓으며 눈물지었다. 어리숙한 사내로서는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퍽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남녀는 그리 계속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이윽고 시선이 마주쳐서 서로 웃어주고 말았다. 눈동자에 담긴 애정과 호기심을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2주를 사귀었다. 그 중 어느 날인가 마르그리드가 말했었다.

“나는 지상에 가 보고 싶어. 알지? 요즘 유행인 거. 땅이 끝도 없이 탁 트여서 공기에서 나는 냄새부터가 판데모니움이랑은 다르다는데, 당신이랑 같이 마셔 봐도 좋을 텐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마르그리드는 학술원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전공인 지상의 소용돌이를 직접 눈으로 관측하기 위해 수색대에 지원한 것이다. 사내는 가슴이 휑하기보다도 그 짧은 2주간이 오히려 꿈같았다. 아주 아름다운, 이 세상에는 원래가 없었던 꿈. 꿈을 꾼 사람이 곧 제정신을 찾는 것처럼 이오시프도 무탈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학술원 졸업 후, 연구소에서였다.

백의에 슬리퍼를 끌고, 피곤에 찌들어 그늘이 어린 눈으로 마르그리드가 복도를 걸어왔다. 마르그리드가 걸어왔다. 마치 꿈의 단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현실이 되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연구원이었다.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붉은 눈동자가 소용돌이의 변화를 관측할 때는 사뭇 진지했다. 관측해낸 지표로부터 예측 가능한 변화에 대하여 논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밤새 연구하느라 메마른 입술이 연구소의 정책에 숨을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꿈이 아니었지만 꿈보다 더 경이로웠다. 아직도 자신이 어리숙하다 느끼면서, 남자는 이 놀라운 여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2주 후에 마르그리드가 말을 걸었다.

“왜 내가 지상에 가고 나서 연락하지 않았어?”

남자는 멍청하게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당신이 다시 나랑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마르그리드는 채근하듯이 눈을 올려다봤다. 못난 남자가 애정과 호기심을 채 감출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계속 눈을 확인하던 여자가 마침내 고개를 내리고 한숨을 푸 쉬었다.

“이오시프, 내가 당신과 함께 지상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어.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어. 나 사실은 전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거든요. 당신과 내 부모님이 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나한테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었거든. 당신이 학술원의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도 쭉 봐왔어요. 난 사실은, 지상 따위는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여기 청결한 판데모니움에 당신과 함께할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누구보다도 안락하게, 아름답게 살고 싶어…”

이오시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결혼 후에도 누구나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여자였던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는 긴 머리를 잘랐다.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치마 대신 길게 내려오는 바지를 입었다. 누구든 두려움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대화를 주도하던 여자가 과분한 행복에 차 있다는 듯 고개를 내리고 수줍게 웃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어머니였다. 사람들과 얘기하기 좋아하고 짓궂게 농담하곤 하던 여자가 약속을 줄이고 집으로 빠르게 돌아가 아기 용품을 매만졌다. 그러면 그 놀라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짧게 자른 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위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르그리드는 하얗게 웃으며 달처럼 둥글게 차올라 가는 배를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이오시프. 나 여기서 아이와, 당신과, 나 셋이서 이렇게 계속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마워.”

그 사람이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모습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마르그리드는 피고 지는 꽃이었다. 차고 기우는 달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흐르고 넘치는 물이었다. 여자는 변화했고 남자는 경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여자가 흘러서 연구원, 연구원이 고여서 어머니, 어머니가 넘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나는   마르그리드를   사랑했다

이 기록은 곧 폐기될 것이다.

 

 

 

엷게 깔린 어둠 아래 가라앉은 판데모니움의 밤거리를 소년은 지치는 줄도 모르고 뛰었다. 한번 뛰고 숨을 몰아쉴 때마다 신선한 공기가 폐 바닥까지 차 들어왔다. 소년이 원하는 것은, 더 높은 것. 새로운 것. 잡을 수 없는 것. 가쁜 찬 숨 한 움큼 들이쉴 때마다 소년 특유의 끊이지 않는 생각이 새롭게 머리를 메웠다. 오늘 낮까지 도출하던 공식들의 결과와, 자신의 예측이 틀렸을 확률, 그리고 귀에 익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차례로.

“그동안 연구해서 알아낸 게 겨우 그거니? 남들도 다 아는 지식 따위는 의미가 없어, 로쏘. 먼저 얻어내는 새로운 지식만이 가치가 있는 거야.”

로쏘의 어머니는 뛰어난 연구자였다. 과거형인 것은 그녀의 추론으로는, 남편과 아이에게 까닭이 있었다. 야망 있던 여자는 재능을 타고났지만 자신의 빛을 가릴 만큼은 아닌 신랑감을 찾아냈다. 각자의 뛰어난 정자와 난자를 추출해 인큐베이터에서 자식까지 완벽하게 배양해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임신과 함께 우울증이 그녀를 파도처럼 덮쳤다. 약 일 년의 공백은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남편과의 격차를 한참이나 벌려놓았다. 어떻게든 보상을 받기를 바라는 그녀는, 희생의 대가로 얻은 아이에게 축문이자 저주를 계속해서 속삭였다. 진정으로 새로운 지식은, 혼자서만 얻을 수 있어.

어쨌거나 두 테크노크라트 사이에서 태어난 로쏘는 천성과 환경이 빠짐없이 갖추어진 수재로서 연구소에서 수습하고 있었다. 소년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중앙총괄탑을 향해 달렸다. 판데모니움 곳곳의 가로등 불빛은 달빛을 밀어내고 높이 솟은 건물은 시야를 가렸다. 천문관측소의 사용은 제한되어 있으니 근방 가장 높이서 방해요인 없이 달을 뚜렷하게 관측할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중앙총괄탑 위였다. 늦은 밤이라 정식 루트는 닫혀 있었기에 소년은 한참을 끙끙거리며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드디어, 달이 있었다. 로쏘는 숨을 푸 내뱉었다.

크고 둥근 달과 소년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바로 잡힐 듯 손을 뻗었다. 금과 은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달빛은 꿈결처럼 은은했다. 더 높은 것, 닿지 않는 것, 새로운 것, 잡을 수 없는 것. 준비해 온 초소형 천문망원경을 꺼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 결과에는 분명 어머니도 만족하시리라. 중앙통괄탑의 꼭대기에서 손을 허공에 든 채 히죽거리는 소년을 보고, 경비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체 중요지역에서 무슨 짓을 하려던 거냐는 힐책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소년은 부모님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고 나서야 활짝 웃었다.

“제 가설이 틀림없어요, 어머니. 저번에 나타난 혜성이 표면에 충돌하고 달 주위를 도는 위성이 생겨서 공전 주기가 달라지고 오차가 생긴 거예요. 지금이라도 로켓을 보내서 더 자세히 관측하게 해요.”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속상한 것 같기도 했다. 사고를 쳐서 화나신 건가, 그래도 이 발견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려지면 어머니도 기뻐해 주시리라 믿었다. 연구소 사람들이 수습생 소년을 보고 전과 다르게 수군거리고, 뉴스가 떠들썩해지고 모두가 로쏘를 추켜세우게 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입은 웃어도 눈이 죽어 웃지 않았다. 마침내 둥글던 달이 이지러졌을 때 로쏘는 깨달았다. 아, 어머니는 내가 자신을 뛰어넘는 게 무섭구나. 나는 이제 이 사람을 뛰어넘었구나. 새로운 지식 하나 알려주지 못하는 여자에게, 로쏘는 흥미가 없어졌다.

더 새로운 지식을 찾아 판데모니움을 떠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스스로 ‘개방파’라 지칭하는 일련의 무리를 만나 금지된 연구에 발을 들인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쌓아올린 연구 결과는 확실히 놀라운 것들이었지만 로쏘는 썩 기쁘지는 않았다. 진정으로 새로운 지식은 혼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로쏘 혼자서만 관측할 수 있는 것, 진정으로 새로운 지식을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생각에, 단 하나였다. 마르그리드. 인류 최후의 난제라는 사후세계를 몸으로 겪은 여자. 케이오시움에 영혼이 매인 여자. 인간이 현한 코어 생물. 그러나 이 진귀한 연구 대상은 결코 로쏘의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달이 보고 싶어,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뜬 마르그리드를 찾아서 로쏘는 그로서는 드물게 연대의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밤바람에 부옇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흐릿한 입김 너머에서 여자가, 로쏘가 오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따라서 하늘을 보니 그놈의 달은 여전히 둥글고 은은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다시 마르그리드나 관찰할까 하고 시선을 내리던 로쏘는 퍼뜩, 그가 보려던 것은 투영체일 뿐임을 깨달았다. 진짜 마르그리드는 그 옆에서 둥둥 둥글게 떠 있지 않은가. 달이 달을 보는 꼴이었구만. 피식 웃어버렸다. 낮이 되면 모습을 숨기는 달. 이곳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여자. 차라리 달 쪽이 더 실재감이 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르그리드가 그믐으로 이지러진다.

“달이 그렇게 좋아?”

대답 대신 뒤돌아선 여자의 얼굴에는 예의 하얗고 상냥한 미소뿐이다. 저 달에 로켓을 쏘아버릴 거야. 로쏘는 마르그리드의 팔을 꺾었다. 그녀의 얼굴에 고통의 단서는 없다. 대신에 엄한 표정이 투영된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로쏘?”

“이러면, 아파?”

로쏘가 반문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당신이 왜 굳이 이런 헛수고를 했는지 모르겠네.”

피식 웃으며 마르그리드는 한 발치 멀리로 영사되는 위치를 옮겼다. 로쏘는 한 발짝 성큼 걸어가 투영된 입술 위에 입을 겹쳤다.

“그럼 이럴 땐, 좋아?”

달이 어둡게 기운다. 로쏘는 조소했다. 마르그리드에게. 손에 잡히지도 않던 달빛에 홀려서 달 주위를 빙빙 도는 자신에게. 로쏘가 이지러진다. 그간 차마 뱉지 못하던 말을 욱하고 토했다.

“공중도시를 보는 게 그렇게도 좋아? 거기서 당신은 자기 아이를 연구에 쓰고 죽은 사상범일 뿐인데 말이지.”

미처 놀라지도 못한 마르그리드의 얼굴이 미친 사람처럼 공허했다.

“내가 당신이 뭘 보는지 모를 것 같았어? 람한테 물어봤더니 그러더군. 당신은 처음부터 아이를 구하려고 개방파에 접촉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아주 대단한 어머니 나셨군 그래. 나한테는 기억이 없다고 잘도 거짓말했으면서.”

“어머나, 나는 아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한 적 없어.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던 건 당신 아닐까, 로쏘?”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그 꼴을 하고도 그놈의 공중도시가, 남편이, 자식새끼가 그립냐는 거야. 달이 뭘 상징하는지 알아?”

“달. 임신. 출산. 모성.”

뇌까리는 투영체의 입을 로쏘가 제멋대로 잡아 벌린다.

“아니지. 미치광이. 아직도 자기가 테크노크라트고 어머니고 사람인줄 아는, 되돌릴 수 없는 걸 되찾으려고 하는 미친 여자.”

여자의 얼굴은 그믐이었다.

“뭐라고 하든 좋아. 케이오시움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기에 우리는 여기에 있는 거야. 극복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건 없다고. 나는 도약할 거야, 로쏘. 내 아이가 있는 곳까지 도약할 거야.”

“추락하지나 말라지.”

차라리 나랑 같이 지옥에 떨어져버려, 라는 말은 입 안에서 짓눌렸다. 로쏘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달은 백치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알 수 없는 것, 늘 새로운 것, 보고 있어도 알고 싶은 것, 잡히지 않는 것.

분명 잡고 있는데 마르그리드의 얼굴이 자꾸만 이지러졌다. 눈시울이 뜨거워 달빛이 잡히지 않고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갔다.

달은 거듭해 기울고 차고, 푸른 여자와 붉은 남자는 아른거리는 달빛 아래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 레지멘트부터 인페로다를 거쳐 미리가디아까지, 이루지 못해서 미친 여자와 가지지 못해서 미친 남자가 발맞춰 미친 스텝을 밟아나갔다.

 

 

 

아가야, 오늘도 뒤척이고 있구나. 겨우 반수면 상태에 들었어. 그러니 이건 꿈이야. 꿈이니 듣고 잊으려무나.

네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 배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을 때, 그리고 조금 더 커서 요람 안에서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때. 나는 너에게 동화를 들려줬던 것 같아. 착한 아이가 선물을 받고, 나쁜 아이는 잘못을 반성하고 구원받는 이야기들이었어. 좋은 나날이었단다. 꽃잎이 피어오르고 잎사귀에는 물이 차올랐어. 부인은 순종했고 여자는 절망을 몰랐지.

들으렴, 크레니히.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그리고 영혼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고인단다. 젊을 때 나는 높은 하늘 위에서만 살았어. 빛나게 화려했고 내 행복을 의심치 않았단다. 내가 얼마나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지 몰랐고, 얼마나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할 수 있는지 몰랐어.

아가야, 영혼은 물과 함께 밑으로 흘러 고인단다. 금기를 어긴 내 혼은 심해로 떨어지고 그 안에서 다시 죄를 헤엄쳤어. 그렇게 업을 쌓고 쌓으면서 고꾸라져서 나락까지 떨어졌어. 무저갱 안에는 수백 년간 업을 쌓은 악마가 있었어. 아가야, 나는 그 악마의 아래서 몸을 지옥불에 불태우는 하수인이었어.

하지만 아이야. 그런들 어쩌니?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네 곁에 있잖니. 여섯 개의 눈으로 너를 더 세심하게 보호할 거야. 달빛이 비추는 밤에 한 쌍의 눈은 감아도 두 쌍의 눈으로는 네가 천사처럼 새근대는 모습을 지켜볼 거야. 길게 늘어진 온 몸으로 너를 완전히 휘감아서 껴안을 거야. 그리고 여덟 개의 손으로 너의 고운 몸을 한 구석도 빼놓지 않고 보살필 거야. 무간지옥에 매인 내 혼으로 너의 모든 바람을 이루어줄 거야.

크레니히.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야. 이런 네가 이렇게나 괴로워하고 있으니, 아기였던 너에게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는지 알겠니? 너는 나와 같이 살지 말렴. 인생이 언제까지나 아름다우리라 기대하지 마. 영혼은 결국에는 추락한단다. 영혼의 고결함이나, 정결함 따위는 넘실거리는 삶의 파도 앞에서 금방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것. 풍파에 휩쓸려 신념이 무너지고 겉으로 내세운 껍데기가 지옥불에 불타서 없어지고 나면 종국에 인간을 실체화하는 것은 욕망이란다.

그러니 아이야,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렴. 소중하고 소중한 너에 비하면 남 따위 파리만도 못한 것. 나의 아이야, 부디 너만은 삶에서 원하는 것을 마음껏 갈취하려무나. 엄마를 믿어,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없어. 너의 숨은 내 목숨으로 극복한 기적. 너는 나. 내 소원은 곧 네가 바라는 것. 네가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란다. 그 무엇이든지간에.

 

크레니히는 말했다. 엄마는 미쳤던 거구나. 환수는 생각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마르그리드라고 불렸던, 한때는 드론에 붙은 코어 생물이었던, 지금은 그 존재를 소용돌이 안에 놓고 와 몸조차 투영하지 못하게 된 환수는 지옥을 만들고 지옥을 보았다. 아이가 바랐던 지옥에서 신이 나 웃어젖히며 환수는 아이를 끌어안아 지켰다. 그러자 아이가 생각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아이가 생각했다. 역시 혼자는 외로워. 환수는 그동안 안아주지 못한 만큼 아이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심연은 너무나 깊어서 떨어져도 떨어져도 그 바닥이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죽어도 죽지 않았다. 크레니히는 자신도 사라지면 환수도 사라지는 것일까 했지만 그녀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혼자는 외롭다고 했다.

함께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흐르고 흘렀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찾아서 흐르다 어린 남자아이를 찾았다. 아이에게로 흘러 미리가디아에 닿았다. 케이오시움에 오염되어 외로이 꿈속을 부유하는 아이는 마치 죽은 아들과 닮았다.

나는 미친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야. 자신으로 인해 떨어진 아이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더 떨어져도 좋았다. 눈앞의 아이가 지쳐 스러질 때까지 그녀는 쉬지 않고 흘렀다.

그리고 얼마나 더 흘렀을까.

 

기억은 단편적이지만 세계는 분명 이상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다른 세계를 보았지만 그 모든 세계와 닮았으면서 또 달랐다. 한 발짝을 내딛자 어려서 주목받던 학술원 화단의 꽃이 있었고, 또 한 발짝을 내딛자 졸업 후 능력을 펼쳤던 연구소의 벽이 있었다. 다시 한 발짝을 내딛자 신혼 때 태교를 위해 즐겨 듣던 음악이 들렸으며, 하늘에는 개방파의 본거지로 향할 때 타던 비행정이 날아다녔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아이를 넣었던 ‘요람’의 구동을 닮았고, 땅의 끝에는 망각계를 거쳐 몸을 맡겼던 흑백의 물결이 굽이쳤다. 누군가 즐겨 관찰하던 이세계의 생물들도 있었으며, 몇 걸음을 더 걷자 디 아이의 코어를 지키던 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무너졌던 판데모니움 거리의 부조 새긴 석벽 너머로, 미리가디아의 빈민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것 같은 시체 더미가 보였다.

기억과 단편 순간과 조각이 머리 위로 흘러내렸다. 이상했다. 이 세계에는 지난 삶이 모두 고인 것 같았다.

팔의 관절이 드러난 조악한 오토마타의 손을 잡고,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한참 무어라 그녀에게 말했다. 어떤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 마침내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죽은 자들의 원혼이 되살아나려 모인 세계입니다.”

마르그리드는 다시 옆으로 눈을 돌렸다. 흑과 백의 물결이 중력을 무시하고 남실거렸다. 물은 더 이상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아아, 나는 드디어 바닥의 바닥, 가장 밑바닥으로 흘러 떨어졌구나.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