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는 것에 대하여

#주간_미카슈 주제 : 여백

이번주에는 어떻게든 쓰자! 하고……. 발키리 몰락 시점의 단문입니다. 언제나처럼 날조맛 앵슷향인데 많이 두서없네요.

 

***

 

인형보다 더 인형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도자기로 빚은 것처럼 날렵한 몸과 핏기 없이 하얀 얼굴이 조각처럼 어여뻤다. 음식을 먹지도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 앉아만 있는 것이 더없이 인형 같아 보였다. 그래도 인형이라면 이렇게 따뜻하지는 않을 텐데. 카게히라 미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곁에 붙어 앉은 남자를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스승님.”

불러도 말이 없다.

“스승님 맘 안다. 지금까지 숨 막히게 열심히 했으니께 스승님도 좀 쉬고 싶겠지. 그래도 암말도 안 하고 앉아만 있는 건 너무하지 않나? 나즈나 형도 요즘 안 찾아오고, 나 혼자 부실에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즈나의 이름이 들리자 잠시 미카 쪽을 향하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여백처럼 하얗게 가라앉았다.

표정도 없다.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런다. 물론 내같은 실패작이 스승님 걱정할 주제는 아니지만서도, 뭐라도 먹고 움직이기는 해야지 않겠나. 앞에서 붕어빵 사왔는데 이거라도 먹지 그래.”

미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붕어빵을 슈의 눈앞에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식욕도 없다.

“스승님.”

미카는 눈앞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남자를 재차 불렀다. 이번에는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상대가 살아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심장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얼굴을 천천히 올렸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각이 닿는다. 곧 슈가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애정은, 있는 걸까?

“카게히라, 네 녀석……!”

“아하하. 드디어 일어났네, 스승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소리를 지르는 슈를 보면서 미카는 천진하게 웃었다. fine와의 드림페스에서 음향 사고가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 * *

“아마도 스승님은, 사고를 당한 것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해.” 나즈나는 그렇게 말했다. “큰 사고를 당해서 뼈가 으스러지고 신경이 망가진 사람은 다시 전처럼 쉽게 걷지 못하지. 걷고 뛰고 운동하는 것 전부 그 전에는 당연하게 하던 일인데도, 감각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리잖아.”

“그치만 스승님은 사고를 당한 게 아닌데. 몸도 멀쩡하고 뼈도 안 나갔다.”

“몸이 망가졌다면, 고칠 방법이라도 알았겠지. 하지만 마음이 망가졌잖아, 미카칭. 무대를 구상하고, 노래를 만들고, 춤을 추고……. 스승님은 원래 그런 걸 노력 없이도 숨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하던 사람이니까, 오히려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리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천재성은 쉽게 돌아오지 못하겠지. 그날 부서져서 없어진 거야, 우리의 스승님은.”

“눈앞에 있는 스승님을 왜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스승님도 이상하지만, 나즈나 형도 참 이상한 말만 한다.”

***

하지만 괜찮은 척 하는 말 몇 마디로 한번 마음에 자리잡은 불안이 사라질 리 없는 법이라, 미카에게는 쉼없이 조잘조잘 떠드는 버릇이 생겼다. 발키리는 언제나 최고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얼른 무대에 다시 서서 최고의 무대를 보여줘야지! 그리고 대답 대신 돌아오는 표정은 언제나 여백처럼 하얗게 비어있다.

“조용히 해라. 정신 사납구나, 카게히라.”

그렇게 말하며 슈는 펜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던 책상 위에 종이가 놓여있었다. 곡의 제목만 쓰인 빈 오선지. 예전의 이츠키 슈는 절대로 눈앞의 종이를 빈 채로 둔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하얀 여백뿐이었다.

“잠깐, 스승님! 거기 앉아봐라. 쓰던 건 마저 써야하지 않나.”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잘 들어, 카게히라. 나는 이제 곡도 무대도 전혀 떠오르지 않아. Valkyrie는 이제 끝이라는 거다.”

“……그래도.”

미카는 펜을 들어 슈에게 건네주고는, 등 뒤에서 손을 겹쳐 함께 펜을 쥐었다. 그대로 종이 구석의 이름란에 펜끝을 가져갔다. 그리고 Va, 라고 쓰여져 있는 두 글자의 뒤에 단어를 마저 적어나갔다. Valkyrie.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빈 여백이 메꾸어졌다. 몸을 통해 두근거리는 고동소리가 전해진다.

“카게히라. 너는……. 전에 그런 짓을 해 놓고 잘도 스스럼없이 달라붙는구나.”

“응? 무슨 일 말이가?”

“아니, 됐다. 실패작에게 이런 말 해봤자 소용없겠지.”

“아닌데.”

“뭐라고 했지, 카게히라?”

“끝이 아니라고.”

아니야.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럼없던 적이 없었어, 스승님. 카게히라 미카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웃으며 계속 빈 여백을 메워나갔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의미 없는 잡담이나 예전에 함께 들었던 음악의 가락으로 빈 여백이 까맣게 메워져가고 말하지 못한 마음은 노래가 된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그날부터 당신은 여백투성이고, 하지만 나는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단 한 순간도 내 마음에 여백을 둔 적이 없지. 그러니까 우리는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