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빌

꿈은 그만 꾸렴, 메리. 책도 적당히 읽고 공상도 정도껏 하고 엄마아빠의 일을 도우렴. 밭을 일구고 요리를 해. 착한 아이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신께서도 어여삐 보시지.

메리는, 어쩌면 그래서 자신이 신님께 벌을 받았을런지도 모른다 싶었다. 꿈에서 깨는 꿈을 꾸었다. 깨고 깨어도 일어날 수 없었다. 보아도 보아도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공기처럼 기포처럼 꿈을 부유하며 온갖 것을 보고만 다녔다. 하지만 꿈의 어떤 층에도 그가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 이후로는.

엄마, 전 상을 받은 것만 같아요. 다시 만나다니 꿈만 같아!

그가 죽어야만 할 때마다 소녀의 손길이 스친다. 앙증맞은 금장 지팡이에서 몽환이 피어난다. 다친 곳을 지울 거야. 빌헬름이 죽게는 두지 않을 거야! 깃펜 끝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소녀는 꿈마다 부단히도 움직인다. 그리고 빌헬름은 내장을 안고 괴로워한다. 어째서 죽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왜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소녀가 닿지 않는 손을 뻗어 울면서 웃는다.

닿을 수 없는 당신은 그저 내 꿈일 뿐이거나, 아니면 내가 당신의 꿈이거나. 꿈속에서라도 당신이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신님, 부디 제가 계속 빌헬름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계속계속 벌을 주세요.

그리하여 이 세계의 신은 영구히 자비롭고 소녀는 오늘도 단잠에 든 채로.

린나딘

이따금 그는 집 문을 열기 전 걸음을 멈춰 내용물의 상태에 대한 상상을 한다.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찾아 부르던 것처럼 숲이 그리워 영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빈 방일지도 모른다.

혹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보초병 시절의 습관이라며 소파에 앉은 채로 선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리를 하고 있거나 마당에서 동물을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이면 곤란하겠지만 그러더라도 별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리니어스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한쪽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린다. 나딘은 문을 연 리니어스가 다리를 절며 소파까지 오는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옷 더 사올까아.”

나딘이 자신에게는 영 맞지 않는 셔츠 한 뼘을 쥐어보았다.

“입고 있는 거 싫어?”

“아니.”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작은 것 같아서어.”

“그런가?”

물론 흉부 외에는 작은 부분이 없다. 나딘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리니어스는 이 가장자리를 뱅뱅 도는 가벼운 긴장감에 문득 신물이 났다.

“나딘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나한테 바라는 거 뭐 따로 있어?”

적나라하다. 그간의 기나긴 긴장에 대해 무례할 정도로 직구였다. 그러나 여우같은 여자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글쎄… 그렇게 묻는다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확인?”

“당신은 강한가?”

머리 위에 비죽이 솟은 귀가 쫑긋거렸다.

“나는 강한 자 아니면 흥미 없거든.”

“아니, 나는 나딘같은 전사는 못 된다고오. 이렇게 다리도 불편한걸.”

“그런 의미를 말하는 게 아냐. 이 세계에서의 힘이 내가 있던 곳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나도 이해해.”

나딘이 천천히 걸어왔다. 리니어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손에 지팡이를 쥐여주었다. 구부정하던 사내의 등이 곧게 펴졌다.

“리니어스. 당신은 강한가?”

“나는 약하려고 한 적은 없어. 단 한 순간도.”

“그렇구나.”

나딘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소파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나도, 그랬었는데. 항상 강했었는데. 하지만 여기서 나는 강한 걸까?”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찾아왔다. 리니어스는 머뭇거렸다. 위로를 해야 할까? 해도 될까? 손을 내밀어도 될까? 만져도 될까? 그러나 망설이는 사이 여자가 얼굴을 들었고 그는 흠칫 손을 거두었다.

“이제는 내가 물어야겠네. 당신은 뭘 원하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는 거야? 내가 찾아달라는 숲이 뭔 줄 알고?”

“그냥…”

생각보다 먼저 대답이 튀어나왔다.

“당신이 당신의 숲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나딘은 어이없다는 듯, 그러나 또한 일말의 애정을 품은 웃음을 지었고 리니어스는 이 순간 그녀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쫑긋거리는 귀를 슥슥 쓰다듬든, 대충 걸친 남자 셔츠 대신 예쁜 새 옷을 사 주든, 아예 숲을 만들어주든 이런 표정에든 뭐든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는 가늠할 수가 없다. 익숙해진 다리가 오늘따라 유독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 모두 다리 때문인 것처럼.

 

그 날 숲에서 여우와 나비가 함께 뛰노는 꿈을 꾸었다.

타이씨씨 조금

도무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비행정의 선체는 일정한 주기에 맞추어 끊임없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떠밀리는 것처럼 타이렐은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이마를 기댔다. 까마득한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흡사 바람에 물결치는 먼지나 안개 덩어리 같았다. 타이렐은 검붉은 빛을 띤 이 파도의 정체를 알고 있다.

비행정이 속력을 줄이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아득히 먼 아래에서 일렁이던 광경이 점점 뚜렷해진다. 물결의 정체는 피를 뒤집어쓴 사람의 군집이었다. 아니 사람이었던 존재들이었다. 이 도시는 이제 살아 움직이는 시체의 도시가 되었다. 바로 타이렐 자신이 구동시킨 프로그램이었다.

그가 해석한 코덱스. 그가 진전시킨 연구. 그가 구축한 프로그램. 그가 봉합한 단말. 그가 도전한 목표.

광장에 상륙한 타이렐은 결과의 재검토를 위해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갈레온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시체 몇 구를 베었다. 조각나거나 타다 남은 시체의 잔해가 죽지 않고 꿈틀거렸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의 수렁을 헤쳐 타이렐은 기어이 그가 정복한 죽음의 앞에 도착했다. 희열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에게서 비롯해 이 도시를 뒤덮어버린 감정의 원류를 이제 타이렐은 안다. 질투.

인형에서 떠오르는 빛을 향해 타이렐이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이겼어.”

“당신이 나를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빛은 여자였다. 안경을 끼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수 년 전에 사라져 보지 못한 여자였다. 밝은 밀짚색 머리칼이 태양 같다. 눈이 부셔 넋을 놓은 사이 그녀가 키득거렸다.

“그녀도 죽음의 권속이니까. 나는 당신의 인형으로 만들어져 죽음이 되었지. 그러니 당신은 이제 나를 이길 수 없어요.”

여자가 웃으며 밝은 청색 머리카락으로 변한다. 그리고 저를 향해 내민 타이렐의 손에 해골 모양의 지팡이를 휘두른다. 뱃가죽이 갈라지고 복부와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들어차 세상을 꽉 막는다. 따신 피와 함께 생각과 상념이 요동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

기필코 이기려 했던 여자가 죽었을 때,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시꺼먼 것을 뿌리뽑기 위해서 그는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미끄러지고 구르고 실패하고 좌절하다가 다시 기어서 정상에 올랐다. 마침내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높은 희열로부터 고꾸라진 장소는 가장 낮은 밑바닥이었다. 그 자신의 죽음.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그는 알 수가 없다. 부옇고 꿈결같다. 선명하고 몸에 스민다. 세계가 이상하다. 바람이 불었다. 언젠가 보았었으나 이제 다시는 보이지 않아야 할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죽 훑어 거쳐, 타이렐은 마주한다. 눈을 깜박인다. 그는 아직 숨을 들이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꿈인가? 기만인가? 바람인가? 타이렐은 다시 한 번 손을 뻗는다. 이 감촉은 목소리는 꿈도 환상도 아니다. 당신은 분명

나의 시
나의 이름
내가 잊고 살았던 세상의 모든 언어

[그라레그] 봄날은 간다

그는 더는 거만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늘 걷어올렸던 소매 끝이 주름없이 단정히 여며진 것과 조용히 웃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우리는 나이가 들었구나 느끼고 어린 날을 떠올리고 그때처럼 또 새롭게 사랑에 빠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이 젊기만 하건만 그녀는 미세한 차이를 어렵잖게 눈에 담았다; 가령 야무졌던 입매가 수십년의 웃음을 거쳐 허물어졌다. 그녀는 남자의 입가의 보조개 주름을 매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정열은 쇠하고 잦아들었으나 흔들림은 줄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다음 계절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 계절에 그를 만난 곳은 묘지였다.
여자는 이제 다음 계절보다 지난 계절을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을 택한다. 생각속의 그는 계속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그녀는 머리끝까지 사랑에 잠긴다. 첨예하게 아름다운 세월이었다.

[그라레그] 고래

그녀의 본질이 다스리는 이라면 그의 본질은 빚어 만드는 이라서 유달리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그녀와 그는 연애의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거야. 도시의 아이들과 섬의 아이들을 보면서, 노인과 통치기구 그리고 땅거미가 지는 지평선을 보면서 그네들은 그렇게 말했다. 세상 구석구석의 만물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땅 아래 깊은 광맥부터 희귀한 풀까지 세상 모든 재료를 모아다 그가 만들고 그녀는 다스렸다.
온 세상을 대상으로 삼는 이는 천재라고도 불린다. 그의 손가락이 빚는 것에는 끝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조각가나 작곡가처럼 기계를 조립하고 유전자로 장난질을 쳤다. 하늘을 나는 고양이든, 털이 곱슬거리고 다리가 길게 뻗은 여우든, 그는 세포는 물론 기계로도 생명을 만들다 못해 전설과 신화까지 탐을 냈다.
한동안 그라이바흐의 작업실에 고래나 공룡의 뼈대가 걸렸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던 그녀도 감히 작업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방을 가득 채운 화석은 비할 데 없이 거대했으나 금방 무너질 듯 위험해 보였다.
“이게 뭐야?”
“신화의 모델.”
여자 얼굴에 사자 다리를 가진 스핑크스 모양의 오토마타를 정비하며 그가 대답했다.
“생명윤리 건으로 경고를 받으니까 이제 기계로 신화를 쓰겠다는 거야?”
작업실에 들어가지 못한 여자가 문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알게 모르게 비꼬는 동안 남자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한 때 자신의 세상을 정복했던 생명체들이야. 인간처럼.”
그는 손을 들어 고래의 심장이 있던 자리의 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개발품이 반드시 인간의 형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이 녀석들은 먼 옛날에는 우리처럼 세상의 지배자였어. 미래에는 또 다른 어떤 형태의 생명이 문화를 지배할지, 혹은 인간이 어떤 형태가 될지 어떻게 확신하겠어? 당장의 시야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지, 특히 우리는 말이야.”
“그냥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고 말해, 그라이바흐.”
“그래.”
발소리가 울렸다.
내키는 대로 하는 긴 손가락이 움직이고 심장이 가볍게 뛰었다. 얼굴 위 손길을 그대로 따라 눈길이 한 마디를, 두 마디를, 그리고 키스.

 

먼 세월이 흘러 세상과 문화가 바뀐 어느 날 레드그레이브는 낡은 책상 서랍에서 기계 손으로 사진 한 장을 꺼내다가 이것이 고래의 뼈대와 같다고 깨닫는다.
한때 세상을 완전히 지배했었던 생명체의 기억. 낡고 오래되어 드물게 전시된. 지금은 형태가 바뀌어 스러진 여자의 몸뚱어리와 미소와, 그리고 한때 그녀의 세계를 지배했었던 사랑과
나지막한 웃음소리 사소한 농담과 손가락 몇 마디에 부드럽게 잘 썩는 심장이 사라지고 남아 하얗게 바랜 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