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레그] 봄날은 간다

그는 더는 거만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늘 걷어올렸던 소매 끝이 주름없이 단정히 여며진 것과 조용히 웃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우리는 나이가 들었구나 느끼고 어린 날을 떠올리고 그때처럼 또 새롭게 사랑에 빠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이 젊기만 하건만 그녀는 미세한 차이를 어렵잖게 눈에 담았다; 가령 야무졌던 입매가 수십년의 웃음을 거쳐 허물어졌다. 그녀는 남자의 입가의 보조개 주름을 매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정열은 쇠하고 잦아들었으나 흔들림은 줄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다음 계절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 계절에 그를 만난 곳은 묘지였다.
여자는 이제 다음 계절보다 지난 계절을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을 택한다. 생각속의 그는 계속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그녀는 머리끝까지 사랑에 잠긴다. 첨예하게 아름다운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