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린 합작 – 콘라드 x 이블린

1. 너는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였지.

교단의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 비슷하다. 아이라고 믿을 수 없이 마냥 처진 눈매나 그 가운데서도 비현실적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나 누구에게도 웃어보일 준비가 된 입매, 식사에 비해 과다한 활동량으로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팔다리. 이블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는 제 얼굴에 때가 앉은 것도 모르고 ‘신벌’을 돕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무엇 하나 다를 거 없는데도 이블린은 시선을 끌었다. 그 아이는 예뻤으니까.

불 속의 나무 장작 같은 눈동자나 올망졸망한 콧망울, 아이답잖게 깔끔하게 올라간 턱선과 도톰한 입술이나, 굳이 어느 한 구석만 따져 보지 않더라도 소녀는 그냥, 어쩐지 한 번씩 더 눈길을 가게 만드는 아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소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몸이 여물었을 때 이블린은 자연스럽게 교단에서 ‘내세우는’ 아이가 되었다. 사람을 모으고 여론을 호도해야 할 때 가장 앞장서서 들리는 아이의 고운 목소리. 이블린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씻고 몸에 씨앗 기름을 바랐다. 그리고 때마다 확인을 받았다.

“이 정도면 괜찮나요, 교부님?”

“그래.”

그렇게 눈에 띄게 고운 채로 소녀는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배웠다. 곱게 치장한 이블린은 작전의 선두에 투입되었고 더 많이 노출되었고 더 자주 미끼가 되었다. 스스로 제안했던 계획이 잘 되어 가는데 어딘가 불안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콘라드는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그때부터 알았던 것처럼.

내 눈에 보물이 남의 눈에도 보물일까봐 불안했던 것처럼.

재앙 같은 소년이 교단에 나타나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얗고 목소리가 고운 여자아이를 찾은 일이나, 그게 이블린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던 일이나, 그리고 그 많은 아이들 중에 하필 네가 신내림을 받고 까무룩 발작해버리는 이유라거나. 상황과 정황이 콘라드에게 외친다. 너는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그게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고 아이를 이용한 원죄의 대가야.

콘라드는 악몽에 시달리는지 끙끙거리는 이블린의 둥근 이마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왜 그 많은 아이들 중 네가 신내림을 받고 수많은 재앙과 악귀가 너를 노릴까? 너는 내 보물인데. 내가 빼앗고 내가 기르고 내가 알아봐 내가 윤을 냈어. 누구에게도 다시 빼앗기지 않아. 어떤 방법이라도 불사해서. 식은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팔에 약을 놓았다.

그 후로 이블린은 온전히 콘라드의 것이었다. 수십 년간 그랬다. 일상도 생각도 기억도 능력도 고민도 이야기도 자기 전에 작은 목소리로 하는 인사도 맥없는 웃음도 이제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어. 팔을 끌어안고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을 털어놓는 소녀에게 자상하게 상담을 해준 후에 콘라드 선생님은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밤 인사를 한다. 만 번째의 오늘도 좋은 꿈을 꾸렴.

 

 

2. 이블린은 자신의 몸이 아주 낡은 물건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용물을 너무 많이 담아 한계가 넘은 것을 칭칭 동여매어 억지로 무너지지 않게 감싼 것. 조금만 무리하면 숨이 가쁘고 벅차 사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블린은 매일 차가운 창문에 뺨을 가까이 대고 입김을 그렸다. 이런 모래성 같은 몸으로 밖에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꿈에서는 달랐다. 이블린은 맨발로 숲을 내달렸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넘어지고, 그래도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손을 내미는 콘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서로 웃다가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꿈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마치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이상하죠, 선생님. 자꾸 그런 꿈을 생생하게 꿔요. 저는 이 병실을 나간 적도 없는데.”

“그렇네. 정말 이상하구나.”

불안하고 이상해도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웃는 콘라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안심이 되어서, 더 자꾸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요. 꿈에서라도 나갈 수 있잖아. 그래도 이왕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다면…….”

“꿈을 꾼다면?”

“다른 곳에도 가고 싶어요. 예를 들자면… 바다처럼, 평소에 보지 못하는 그런 곳이요.”

“그러면 그렇게 할까.”

“네?”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콘라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약병을 내려다보는 콘라드의 얼굴에서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 꿈을 꾸면 되는 게 아니겠니. 자, 오늘은 함께 꿈을 꿀 거야.”

콘라드가 입을 닫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주사바늘이 찌르는 느낌이 났다. 세상이 아찔했다. 까무룩하고 소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이블린은 얇은 원피스 하나를 입고 모래밭을 밟았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콘라드가 옆에 함께였다. 소녀와 남자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다가 지쳐서 바닥에 엎드려서 모래성을 쌓았다. 다 쌓고는 함께 체중을 실어 성을 밟았다. 놔두면 어차피 곧 파도에 무너질 성이라고 그렇게 밟았건만 모래성의 잔해를 보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그러자 콘라드가 팔을 잡고 속닥거렸다.

하나도 속상해할 거 없어. 이건 꿈이야. 모두 꿈이란다. 알겠지, 이블린.

알았어요, 콘라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이었다. 또 별안간 정신을 잃고 꿈을 꾼 모양이다.

정말로 콘라드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꿈을 꾸게 되었잖아. 역시 선생님은 정말 유능한 분이야. 그런데, 정말 꿈이었을까? 그래. 이건 꿈이라고 했었지. 꿈이 현실이던가, 아니면 이 현실이 꿈이던가? 아무래도 좋다고 이블린은 생각한다. 내일은 또 무슨 꿈을 꿀까.

오래도록 공들인 모래성 안에서, 모래 소녀는 그럭저럭 행복했다.

젊은 빌헬름 쿠르트의 슬픔

케스에 빌헬름 자살하는 단편 낼까 했는데 안ㄴ냈다 내가 그렇지 뭐

***

서른 살이 가까워졌다. 이럴 때 사람이 하는 생각은 보통 하나다. 나는 언제까지고 젊을 줄 알았는데. 빌헬름 쿠르트도 누구나와 같은 그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정말로, 언제까지고 젊을 줄은 몰랐는데.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세월의 잣대는 인생이 아닌 전쟁이 된다. 이번 전장에서의 교착 상태는 칠 개월 째였다. 어서 이 전투가 끝나기를 바라며 그저 싸우고 전진하고 감내하다가 눈을 뜨고 보면 코 베인 듯이 해가 바뀌어 있었다.

빌헬름 쿠르트는 언젠가 야영을 하던 밤에 상관인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입대했다고 한다. 장군의 희끗희끗한 머리와 굵게 주름진 이마를 바라보며 빌헬름 쿠르트는 스무 살의 그를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스무 살의 빌헬름 쿠르트를 생각해 본다. 이쪽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언제든 거울을 보면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이 있었다. 이제 마냥 어리다고 하기는 어려운 나이다. 그래도 빌헬름 쿠르트는 여전히 젊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빌헬름 쿠르트는 귀환한 브론하이드 왕성에서 맞이했다. 전장에서는 생일이나 날짜마저도 잊고 지냈기에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는 때맞추어 왕실에서 열린 연회에 불려나갔다. 빛나는 천과 휘장을 몸에 걸친 왕족들과 대신들은 대리석으로 바닥을 댄 연회장 안에서 그림처럼 웃었다.

그들은 긴 시간동안 사악한 제국의 마수에 맞선 빌헬름의 용맹함과 노고를 치하하며 향기로운 음료를 잔에 붓고 포도주에 재운 고기와 우유를 굳힌 디저트를 융숭히 대접했다. 녹색 주단으로 지은 드레스를 입은 부인이 소령은 군인답지 않게 얼굴도 잘생겼다며 환담을 한다. 어색했다. 빌헬름 쿠르트는 이 자리가 어색했다.

생이란 원래 이런 자잘한 화려함을 누리며 사는 것이었던가? 그는 사지에서 죽지 않는 자신의 몸을 던지는 대가로 남의 목숨을 구하며 살았다. 그러고도 구하지 못한 목숨들이 있었다. 새 소리를 좋아했던 카엘과, 이번 전투를 마지막으로 영영 귀향하려고 했던 세드릭. 그 외에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이름들.

이런 만찬을 부러워했을 그 많은 병사들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며 빌헬름이 은제 나이프로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자 붉은 피가 접시 위에 배어나왔다. 마치 전장에 흩뿌린 빌헬름 자신의 피였다. 또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피였다. 잘게 잘라 입안에 넣은 살점은 여지없이 달콤했고 빌헬름은 비참해졌다.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파티에서 빌헬름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예전에 야영을 함께했던 그 장군이었다. 먼저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와 감사하다는 인사가 한 차례 오갔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사지를 함께했던 사이인지라 빌헬름의 안색이 피로한 것을 눈치챘는지 장군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빌헬름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장군님께서, 예전 야영 중 밤에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전쟁의 잔혹함도, 지금은 영문 모를 인생의 다른 일들도 나이를 충분히 먹으면 전부 익숙해질 거라고.”

“그래. 그랬네. 기억이 나.”

“그러면 제가 나이를 충분히 먹는 것은, 언제쯤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에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포도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다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에야 장군은 빌헬름 쿠르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글쎄, 쿠르트. 나도 귀경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다네. 실은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도 나에게는 놀랍다네. 귀경은 지금도 이렇게 젊으니까 말이지.”

빌헬름 쿠르트는 장군이 비릿하게 웃으며 핏빛의 술을 들이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죽어 볼 작정이었다.

그룬빌인가 뭔가 모르겠음

론즈브라우 외곽 해안가 출신의 젊은 빌헬름 쿠르트 청년이 브론하이드 성에서 환대받는 소령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참전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군인치고는 드물게 마음씨가 여린 이 청년은 도륙과 학살에 앞장서는 데는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대신 아군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는 곳, 가장 위험한 곳에 몸을 던졌다. 실날같은 희망을 등에 이고 그는 오늘도 전선에 앞장서 뛰어든다. 이번에는, 죽을 수 있을까.

빌헬름 쿠르트가 쿠르트 소령이 되는 과정의 기억은 바닥에 흥건한 피와 꿈틀거리는 내장과 떨어져나간 살점으로 점철되어 있다. 빌헬름 쿠르트의 목을 쥐고 칼을 꽂아넣던 병사가 비명을 지른다. 찌른 것은 빌헬름 쿠르트의 복부인데 자신의 복부에서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그 다음 병사가 내장을 주워담는 빌헬름 쿠르트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빌헬름 쿠르트는 소리지르는 병사의 입을 막고, 병사는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무너져내린다. 전장에 흥건한 비명과 생명을 그러모아 그렇게 쿠르트 소령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저는, 전하께서도 목숨만 부지한다면 무사하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빌헬름 쿠르트는 왕국의 태자인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였던, 몸뚱이의 팔이 잘린 절단면과 가면을 씌웠음에도 턱 부분이 비어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구해낸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것입니까?”

턱이 없는 생물은 말을 하지 못한다. 빛 없이 어두운 방에는 그르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때 당신을 구해낸 것도,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죄송합니다. 그저 저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었다. 태자를 구해낸 것도, 지금 이렇게 와서 좋을 대로 말을 지껄이는 것도. 아마 답변은 들을 수 없으리라. 빌헬름 쿠르트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섰다. 그때 등 뒤에서 탁탁, 하고 기이한 기계음이 났다. 어둠 속에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에게 연결된 콘솔이 하얗게 빛을 냈다. 틱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몇 글자가 띄워졌다.

[그래서 그대는 죽지 못하는 것인가.]

빌헬름 쿠르트는 태자 본인의 상태를 물었다. 그런데 태자는 빌헬름 쿠르트에 대해 말했다. 순간 잘못 읽었나 싶었다.

[그대도 죽음을 갈망하는 게지. 걱정할 것 없다. 그대는 역시 틀림없는 나의 충신이다.]

왜인지도 모르고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 궁정회의에, 나를 알현하라.]

그 다음 문장이 뜨는 시간은 찰나로 짧았으나 또한 영원처럼 길었다. 영원한 소망이 콘솔 위에 띄운 글자의 형태로 의태하여 나타났다.

[그대가 소망하는 죽음을 주지.]

빌헬름 쿠르트는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사지에서 구해낸 데에는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말세레그

우리는 영겁을 노를 저었어. 황혼의 낮은 불빛, 아프도록 찬란했던 마지막 광선을 지나 암흑 속에 타닥대는 불씨까지 우리는 세계를 저어 건넜지. 당신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잠에 들 때, 내가 태어나 노를 이어받고 끝 모를 항해를 지속했어.

항해를 하다가 나는 지쳤어, 이름 모를 선구자를 원망하다가 해져 땅이 되었지. 그 땅에 선구자인 당신도 잠들어있었어. 우리는 잠이 들어 땅에 썩고 다시 땅에서 피어나기를 거듭했어, 씨앗처럼, 곡물처럼.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깨어나 교차했을 때 우리의 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노를 내버린 지 오래지만 당신의 앞에서 뱃사공의 시늉을 하고 당신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곧 알게 되겠지, 탄생에 우리는 평행히 서 있었으나 당신은 나의 심장에 날을 대겠지.

그러나 우리가 노를 당기고 세월을 거스르며 세기를 교차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수많은 자리를 지날 거야, 마치 모자가 되고 사제가 되고 친우가 되고 연인이 되고, 종내 적수가 되겠지. 조금은 즐거웁겠지. 우리가 자맥질하던 이 시대의 마지막 날까지.

리라이트 콘블린 배포지

1.

좋아해요, 선생님.

이 병원이요. 새하얀 병실 안에 점처럼 찍힌 꽃 몇 송이. 코끝을 알싸하게 찌르는 약품 냄새.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붕 파란 숲.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보게 하는 새 소리. 그러면 나타나서 잔소리를 하는 미쉘. 어깨를 움츠리며 뒤돌아 보면,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을요. 좋아해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언제부터 이 모든 걸 좋아했지요?

“옛날부터. 처음부터 그랬잖니, 이블린.”

“옛날은 언제예요? 처음은 언제고요? 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블린은 아주 야윈 소녀였다. 헐렁한 병원복에 안색이 파리해 조금만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면 픽 쓰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주치의인 콘라드가 아주 오랫동안 이블린을 맡아 왔기에 그녀를 다루는데 도가 텄다는 점이었다. 뒤에서 간호사인 미쉘이 차트에 기록을 적으며 중얼거렸다.

“암시가 잠시 약해진 것 같군요. 당신이 처리해야겠는데.”

“나도 알아, 미쉘. 이만 나가 봐.”

콘라드가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동안 미쉘이 키득거렸다.

“새삼스럽게 아직도 부끄럼을 타나요?”

쾅,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콘라드는 이블린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소녀의 두 뺨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앞머리가 흐트러지며 드러난 소녀의 오른쪽 눈에서 안광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숲은 느닷없이 휘몰아치는 돌풍에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콘라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니, 이블린?”

“네? 선생님, 하지만.. 저는…”

“이블린. 그래서 옛날부터, 처음부터 너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이 병원, 병실, 숲과 꽃, 미쉘, 그리고 나를, 너는 좋아하지 않니?”

“…좋아해요.”

부러질 것처럼 가냘픈 소녀를 콘라드는 꼭 끌어안았다.

“그럼 됐잖니. 나도 너를 많이 좋아한단다.”

그는 말을 속삭이고 얼른 고개를 돌려 이블린의 눈치를 살폈다. 소녀의 눈동자는 눈물 고여 흔들리고 푸른 안광도 깜박거렸다. 콘라드는 재빨리 앙상한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소녀는 그대로 발작처럼 경련하기 시작했다. 맥없이 흔들리는 이블린을 그는 품에 꽉 끌어안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경련이 잦아들고 소녀의 눈에 보이던 푸른 빛도 완전히 사그라졌다. 콘라드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고 가냘픈 소녀는 기어코 주치의의 품 안에서 실신해 잠이 들었다.

콘라드는 이블린을 안은 그대로 그녀가 옛적부터 보기 좋아하던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벌써 수만 번째 날이 그는 청년이고 그녀는 작은 소녀인 채로 저물고 있었다. 그는 깨지기 쉬운 날카로운 것을 품에 안고 있다고 느꼈으나, 놓고 싶지는 않았다.

저물어 가는 어둠 속에 영원히 어린 소녀를 안은 늙은 청년은 아까의 대화를 곱씹어 본다. 아주 먼 옛날부터, 처음부터 좋아했다고.

 

 

2.

이 지역에는 마녀에 대한 소문이 있어, 노인부터 아이까지 누구 하나 모르는 이가 없다. 마녀는 소녀의 모습이다. 나잇살 든 술집 주인이 어려서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 소년이 자라 아기를 낳아서 아기가 소년으로 자라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다.

소녀의 뺨은 창백하고 시든 풀 같은 머리카락을 가는 팔 위에 드리우고 있다.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가냘픈 모습이라 온정을 베풀다가는 놀라기 십상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마녀는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떤다. 그러면 바람이 요동치고 한여름에 눈발이 날려 짚으로 가볍게 얹어 둔 지붕이 내려앉는다. 마녀는 사탕과 꿀과 같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니 그런 것을 주고 달래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거죠?”

마녀의 소문에 대해서 듣던 외지인이 딴죽을 걸자, 술집 주인은 별 희한한 사람 다 봤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얘기 못 들었소? 그러니까 그때 그 마녀 때문에 우리 집 지붕이 다 날아갔다니까. 아기는 울고 마누라는 구박하고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몰라.”

“그게 그… 마녀가 일부러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녀를 이 쌀쌀한 가을에 바깥에서 떠돌게 한단 말입니까?”

“이 사람이 얘기를 귓구멍이 아니라 똥구녕으로 들었나. 마녀라니까 마녀 글쎄. 지붕이 날아가면 다행이지,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거 참 듣자하니 기분 상하는군요. 마녀, 마녀. 왜 굳이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낙인을 찍고 아예 밖으로 쫓아내 버리니까 그 애가-”

“내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으니까.”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가 두 남자의 대화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체격이 큰 외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블린!”

“누가 내 뒤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설마 선… 콘라드 당신일줄은 몰랐네.”

이미 남자와 소녀는 술집 주인은 안중에도 없었고 크게 머쓱해진 그는 험험 헛기침을 하며 바 안쪽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소녀의 가는 팔을 덥석 잡았다.

“돌아가자, 이블린.”

소녀는 큰 눈을 도록 위로 올려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다, 곧 다시 내리깔았다.

“싫어.”

“…계속 찾아다녔어. 지난 일은 잊자. 우리는 아직 네 힘이 필요해.”

“싫다고 했잖아! 이거 놔 줘.”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정착도 못 하고 밖에서 떠돌아다니다니, 대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 밖에서 자는 것도 힘들지 않니?”

“안 힘들어. 숲에는 모든 게 있어. 꽃도, 사과도, 꿀도… 비가 내릴 때 빼고는 문제없어.”

“그러면 나를 위해서는 안 되겠니?”

이블린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새처럼 작은 가슴이 위로 잔뜩 올랐다. 그리고 있는 힘껏 콘라드의 팔을 뿌리쳤다.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얇은 네글리제 위로 훤히 드러난 어깨가 신경이 쓰인 콘라드가 자신의 외투를 내밀었으나 그것도 밀쳐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블린은 퍽 종종거리며 숲 입구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흙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이제 와서… 너무해.”

이블린이 몽마에게 홀리고 병원이 무너졌던 날 소녀의 세상도 무너졌다. 모든 것이 기억나고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숲 깊은 곳까지 도망을 나와 이블린은 풀숲을 맨발로 헤맸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열에 들떠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소리가 숲에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이것은 벌써 오래전에 지난 일이고, 오래전에 체념해 포기했던 일이다.

“선생님은… 당신은 진작에 왔어야 했어.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할 때…”

흙바닥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중얼거리던 이블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차가운 것이 어깨에 닿았다. 손바닥을 펼치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소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내렸다. 이건 너무했다. 비가 내려도 하필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제풀에 겨워 이블린은 어린아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다 선생님 때문이야.”

그때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숲에 이블린 자신 외의 누군가가 올 일이 없었다. 소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깜찍한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머리 위로 그늘이 지고 비가 막혔다. 이블린은 돌아보지 않고도 머리 위에 있는 것이 누군가의 외투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스태프에 손가락을 세게 감아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젖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추워서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