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레그살가

쇠와 톱니바퀴는 단백질과 뉴런보다 안전하게 기억했다. 기계로 몸을 바꾼 레드그레이브는 어느 종류의 사람 앞에서도 기억력으로 흠집을 잡혀보거나 자신감을 잃는 따위의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모든 질문과 의문에 조리있게 대답하고 상대에게 쉽게 신뢰를 얻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잊혀진 이름을 가진 어느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가드는 이따금 그 남자에 대해 물었다. 그, 라이, 바흐, 라고 세 음절로 이루어진 이름을 발음할 때 살가드는 통증 비슷한 것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질문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한 번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질문에도 명료한 정답으로 반응하던 레드그레이브가 그 질문을 들을 때면 그저 웃었다. 어린 소녀처럼 웃었다. 미소는 통증이나 갈망처럼 사내에게 다가오고 그는 보챈다. 레드그레이브님, 레드그레이브님께서는 제가 궁금해하는 질문에는 언제고 응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면 한 늙은 소녀와 한 젊은 남자는 짧은 시간 동안 작은 방에서 아주 긴 시간과 아주 넓은 세계를 헤매이게 된다. 6백 년을 거슬러 레드그레이브는 어느 지나간 옛적 시대에 생존했던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논문에 저술한 내용이나 개발했던 기술 같은 것들을 서술하지만 이야기는 맥이 없고 자꾸 주변을 빙빙 돌게 된다. 그녀가 정작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둘이 함께 어떤 빛깔의 꽃이 핀 들판을 거닐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남자의 얼굴이 보일 때 어째서 세상의 어느 것도 겁나지가 않았었는지, 그가 어떤 향이 나는 홍차를 그녀의 코앞에 드밀면서 웃었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너는 어떤 이유로 그럭저럭 잊혀져 가는 감정들을 나에게서 끌어내려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