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합작 – 그라레그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

파자마가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뉘이자 자동으로 불이 꺼진다. 눈을 감자 목이 죄인다. 숨이 막힌다.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머리맡의 장 위로 손을 뻗는다. 한 움큼 약을 쥐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입에 털어넣는다. 독한 약이 금세 녹아나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화끈거린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고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귀를 찌르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떴을 때, 뺨 위에 눅눅한 짠내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증세가 개선되었다고 생각해 눕기 전 미리 약을 먹어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주치의와 센서 레코드 전문가를 급히 다시 초빙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결국 이러한 증세에 대해서 뚜렷하게 알아낸 것은 없다. 그저 그의 ‘죽음’이 재생되는 순간 지각 정보가 사라지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흩어졌고, 그렇게 발생한 ‘오염’의 잔해가 남았다고만 추론하고 있을 뿐. 확실한 치료 방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해결된 채이다.

그라이바흐의 죽음의 원인 역시 미해결이다. 매일 치안관리국을 방문하여 담당 수사관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있지만 항상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 흔적이 끊겨 버린다. 당국의 수사력을 의심해본 적은 일찍이 없었는데도 스무 날 동안이나 뚜렷한 진척이 없다.

사실은, 그간의 스무 날이 무엇을 하면서 지나갔는지 또렷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흐릿한 감상 삭혀지지 않는 감정 꽉 막힌 울분과 발작적으로 방망이질하는 맥박. 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나간 오늘이 스물 한번째 날. 홍보국에서 이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의하지만 역시 아직까지는 거절하고 있는 중이다. ‘오염’의 후유증이 더욱 안정될 때까지 기자 초청은 최대한 연기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 정리할 것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슬슬 공석인 그라이바흐의 후임에 대해 결정을 내릴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토마타의 연구에 있어서 그라이바흐에 비견될만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기에 홍보국과의 회의가 끝난 후 형질 연구소를 방문해 보았다. 나와 메르키오르 그리고 그라이바흐의 유전자 정보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연구소에는 우리 유전자의 외형정보까지 세밀하게 저장되어 있었고 나는 입체영상을 통해 그라이바흐의 유전자를 다시 발현시켰을 때의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영상을 바라보다가 치워주길 부탁했다. 영상은 웃고 있는데도 왼쪽 뺨에 보조개가 더욱 깊게 파이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반쯤 접히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새로 만드는 개체는 그라이바흐가 아니며 연구의 공석을 당장 메울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가지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연구소를 나서는 길에 눈발이 날렸다. 가을 날짜에 걸맞지 않은 싸리눈이 나뭇가지 위로 걸려 한 겹씩 쌓였다. 그러고보니 그간 기상조절장치에 대해서 지시하는 것을 한참이나 잊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는, 고의로 눈이 내리도록 기상조절장치를 조절하기도 했었지만.

겨울의 한 달에 다섯 번쯤이었다. 사실 눈이란 것은 썩 효율적인 기후는 아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눈발이 희게 희게 흩날리고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그라이바흐만이 뚜렷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날에 당신과 나는 손을 맞잡고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세상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보이는 것은 그 뿐이었던, 어깨에 진 모든 것을 잊고 다만 당신의 여자로 있을 수 있었던 찰나. 한참을 단둘만이 눈 속에 묻혀 있다가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면 곧 녹아버렸고 이 순간도 잠시뿐임을 깨달은 나는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돌려놓았다. 그럴 때면 그는 말했다. 나보다 안정적으로 인민을 통치하는 오토마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나는 그 진심이 금방 녹아버리는 거짓이라도 좋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상 가운데, 잠시간의 오류였는지 눈이 그쳤다.

세계의 외각선이 머리 아플 정도로 또렷한 색채가 되어 아프게 눈을 찔렀다. 어지러워 욕지기가 났다. 몸이 떨렸다. 구역질을 하다 손을 옆으로 뻗어 허공을 낚았다. 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 이 메스꺼움이 오염 같은 것일 리 없다. 당신이 없는 세상부터가 이 몸에 오염이었다. 당신이 사라진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라이바흐, 당신이 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지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어.

남은 삶이 너무나 길어.

 

너무나 길었던 삶, 당신이 사라진 지 204948일째 되는 밤이다. 지상은 당신의 의지대로 다시 오토마타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것이고, 당신이 원했던 대로 이 세계를 통치하는 여자 역시 오토마타다. 오랜만에 눈발을 낚았다.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웃음이 났다.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