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져자넷] 호접의

원고를.. 안쓸것같아서… 부분부분 이은 거라 좀 두서없어요

 

* * *

 

벨져 홀든이 열여섯 살 늦은 여름에 머물렀던 그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미가 만발한 화단이다.

여자아이는 온갖 달콤한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열한 살짜리 소녀는 잘 가꾼 장미 화단 속 샛길을 통해 나타나서 훈련을 받던 세 형제에게 식사 시간을 알렸다. 손발이 조막만하고 뺨이 발그레한 인형 같은 아이였다. 정원에 온통 흐드러진 백장미와 허리까지 구불구불 말린 은발의 곱슬머리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하얀 목에 감긴 섬세한 레이스 리본이나 층층이 댄 치맛단 끝이 어떻게 한 번도 장미 가시에 걸려 찢어지지 않는지 소녀를 볼 때마다 벨져는 궁금해 했다.

열여섯 살의 벨져는 예민한 소년이었기에 어린 크리스티네가 나타날 때마다 멀지 않은 어딘가에 프리츠 가문의 무사가 소녀를 지키고 서있음을 어렵잖게 눈치챘다. 그 양을 볼 때마다 마음 구석에서부터 치미는 불편함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벨져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던 형 다이무스와 동생 이글은 크리스티네가 장미 화단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면 화색이 되어 그 모습을 반겼다. 워낙 인형처럼 어여쁜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 애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건 엄격한 제레온 프리츠 경이 그 애만 나타나면 영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작은 딸아이를 끼고 도는 모습이었다. 남이 아끼는 보석이면 내 눈에도 귀해 보이는 법이라 다이무스는 짐작으로, 이글은 본능으로 이 소녀야말로 이 집에서 가장 꼭꼭 귀하게 감추어 둔 보물임을 알고 그리도 반색해 대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벨져는, 바로 그 이유로 크리스티네가 나타날 때마다 위화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 장미 화단 한가운데에 프리츠 가문 전체가 열과 성을 다해 향을 뿌리고 치장을 다한 거대한 조화 한 송이가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

 

그 집에 가장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날을 기억한다.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무거웠다. 사람 소리가 많았던 정원은 이미 황폐했고, 담벼락을 손끝으로 쓸자 벽돌 조각이 바스러져 거미줄 위로 떨어졌다. 말하자면 이 집은 반역자의 집이며 미치광이의 집이었다. 가문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 사용인들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하나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집에서, 앙상하게 가지와 가시만 남은 장미 덤불 사이로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소녀가 나타났다. 열일곱의 크리스티네는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긴 머리며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용케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나타나 벨져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언쟁과 도발과 흐느낌과 가벼운 모욕이 있었다. 벨져는 손끝으로 늘 거슬려했던 드레스 자락이며 머리카락을 툭툭 쳤다. 명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늘 기억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장면 자체이다.

“알려주지 않는 거야? 역시, 내가 여자라서? 그럼 이러면 되겠네.”

크리스티네가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았다. 왼손으로는 긴 머리채를 잡았다.

앙상한 덤불 위로 하얀 장미가 만발했다. 하얗게 빛나며 흩날렸다. 흐드러진 꽃잎 같기도 했고 나풀거리는 나비 떼 같기도 했다. 한층 가벼워진 목을 그녀가 똑바로 든다.

“이래도 안 돼?”

그는 처음으로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벨져 홀든은 단 한순간도 완벽을 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때도 모든 것이 벨져를 위하여 안배되어 있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릭 톰슨을 만난 것도 수도원에서 때맞추어 이글과 사이퍼들이 나타난 것도 무엇 하나 요행은 없었다. 그가 기한 모든 신중도 그리하여 잘 짜 맞춘 완벽함도 그저 벨져라는 인물에게 당연할 뿐.

그러나 그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에 차질이 생겨버린다.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 언덕 위, 석벽으로 된 수도원 앞에서 기어코 제 아가리를 벌리고 빠르게 돌아가는 커다란 문.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진실도 거짓도 뒤엉켜 돌아가는 문. 문이 그를 부르고 벨져는 꼭 지금처럼 문을 보았던 발람 수도원에서의 열아홉 살을 떠올린다. 어지러워 구토감이 일고 그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는다. 멀게 울리는 동료들의 부름 속에 문은 계속해 인식과 사고를 뒤흔들고 그는 문득 의문을 느낀다.

내가 찾는 진실은 무엇이었지? 나는 어째서 진실을 찾고 있었지?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다 벨져의 머릿속에 남은 것 하나는 열여섯 늦은 여름에 보았던 장미 화단이다. 하얀 장미가 만발한 화단. 나비 하나를 베기도 망설여졌던 그 어린 날의 늦은 여름.

환각의 꽃잎은 바람에 흩날려 화원 바닥에 내려앉더니만 하얀 머리카락으로 녹아난다. 문 안에서 현재도 과거도 진실도 거짓도 뒤엉켜 돌아간다. 동경과 질투와 연민과 애정이 동치가 된다.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던 소녀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게 들린다.

‘알아. 당신은 나비 하나도 못 베는 그런 사람인걸.’

아니야. 그게 아니야. 고개를 젓자 다음 목소리가 귓가에 미끄러졌다.

‘역시, 내가 여자라서?’

 

***

 

완벽하지 않은 채로 돌아올 수는 없었으니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두 해가 지난 후였다. 얼마나 긴 시간이라고 아껴 놓은 은구슬 같던 크리스티네 아가씨는 이미 흐려져 벨져를 맞이한 것은 회사의 능력자 자네트였다. 둥근 얼굴에 젖살이 쪽 빠지고 부드러운 살집이 잡히던 사지는 근육으로 단단해졌다. 곱슬거리는 잔머리는 깨끗하게 정리했으며 서글서글하던 파란 눈동자가 이제는 날카로웠다.

“오랜만이네, 벨져.”

“이거 몰라보겠군.”

머리를 짧게 자른 크리스티네, 아니 자네트는 그저 씩 웃어보였다.

“원래 내가 치렁치렁하게 치장한 걸 싫어했잖아? 지금 모습을 보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소리를 다 하는군. 머리를 자를 때 내가 꽤 놀랐었는데 기억 안 나나?”

“그래, 그때… 지금이라면 말할 수도 있겠네.”

모든 몸짓이 단호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사실은… 뭐라고 할까. 싫었어.”

언뜻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리고 벨져도. 내가 여자라서… 편의를 봐 주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벨져는 문득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이제는 알아. 벨져는 수련 중이라도 나비 하나도 못 베는 그런 사람인걸. 굳이 내가 누구라거나, 어떻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닌 거야.”

“…….”

“벨져가 무얼 하고 있는지, 그동안 나도 회사에서 알아봤어. 이제는 이해해. 기사단의 일을 바깥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너무 어렸고, 벨져에게는 벨져의 길이,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는 거야. 설령 그게 같은 방향이더라도 말이지……. 몸 건강하고,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래.”

“그럼 됐네.”

등 뒤에서 회의 시간이 되었다며 누군가 그녀의 코드명을 부른다. 누가 보기에도 썩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여자는 치장을 않았다고는 하나 화사한 얼굴과 몸에 밴 기품에 금욕적인 몸가짐이 도리어 도드라지게 화려했다. 장미라고 불린 여자는 응답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고 아직 채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들은 벨져의 머릿속에만 맴돌았다.

네가 좋든 싫든 너는 결국 우리 모두의 장미였고, 우리는 네가 품은 가시까지 사랑했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회사의 문을 나서는 순간, 머리 위로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졌다. 눈이 부시고 부연 시야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벨져가 크리스티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다시 ‘문’을 접한 이후로 그는 환각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이 증세가 아홉 살배기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안타리우스에 납치된 이후 겪었었다는 환각과 비슷한 것이리라고 이해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리는 너무도 닮았고 가는 방향마저 같으니 평행선처럼 교차하지 못하고 계속 각자의 길을 걸어갈 터이다. 그러나 그 끝에는 무한히 가까워질 것을 믿어.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하얀 나비가 나풀거렸다. 벨져는 허리춤에 맨 두 검으로 이 나비를 베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환각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는 하얗게 나풀거리며 쏟아지는 나비 떼를 바라본다. 입을 굳게 닫고 검을 뽑아들지만 번쩍이는 섬광의 궤적은 나비 사이만 스쳐지나간다. 나비는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지고, 다시 이어지는 환청에 벨져 홀든은 그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