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위백합

#멘션_주신_단어_넣어서_트윗_단문_연성 스타킹 / 의미 / 평화주의자 / 라면 / 레드그레이브님의 팬티 / 질척질척 / 노랑
적당히 필터링해서 썼습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수위주의.

 

동화속 삽화에 나올 것 같은 여자였다. 나는 처음 봤을 땐 그녀가 어느 돈 많은 집의 고명한 따님이 틀림없다 믿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 같은 방에 더부살이하게 된 것을 보면 결코 그런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겠지. 그런데도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다. 입매 가장자리는 늘 조금치 뺨 쪽으로 들려 있었고 꼬박꼬박 닦은 치아는 노랑 기도 없이 하얗게 고르다. 나는 그 멍청하게 예쁜 얼굴이 치 떨리게 싫었다.

“나쁜 아이들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보는 게 어때?”

“내가 왜? 나는 언니 같은 평화주의자는 못 돼서.”

“에이, 그렇게 말해도 말야. 너는 착하잖아.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나랑 같이 살아주지도 않을 거구 말이야. 우리 착한 동생. 나는 살갑게 웃으며 내게 뺨을 부비는 그 여자의 멍청함이 치 떨리게 싫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착하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살이 닿는 그 감촉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그 날 그 여자는 내가 라면을 먹는 동안 스타킹을 허물처럼 벗고 있었다. 나는 구멍난 스타킹을 버리는 대신 매니큐어를 발라 때우는 그녀에게 건성건성 물었다. 새 스타킹 살 돈도 없으면서 답잖게 치마는 왜 입느냐고. 그리고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아무 것도 몰라야 할 멍청한 여자가 감히 얼굴을 붉히고 주제에 꿈과 사랑을 논했다. 그래서였다.

죽던 순간에, 그 생각 없는 여자는 비로소 내 질척거리는 감정을 이해했을까? 드디어 나를 마음 깊이 증오하고 원망했을까? 내가 얼마나 그녀를 증오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 감정의 깊이를.

갈 데 없는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흐느끼다 보니 허기가 졌다. 아까 먹던 라면에 젓가락을 꽂고 몇 가닥을 입에 물었다. 차갑게 식어서 맛대가리가 없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던지고 걸신들린 듯 그녀의 팬티를 벗겼지만 그녀 역시 차갑게 식어서 맛대가리가 없다. 이제는 모두 의미 없게 된 일들이다. 미소가 따뜻했던 방은 구석까지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