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든자넷(꼬마검들)

그때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만으로 열 살, 이글 홀든이 열두 살, 벨져는 열네 살 다이무스는 열일곱 살이었다. 만날 때마다 무슨 까닭인지 심기를 긁어놓고 기세 좋게 날뛰는 (다이무스를 제외한) 두 형제를 크리스티네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형제 둘이 겉보기보다 훨씬 죽이 잘 맞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자애들이 크리스티네보다 나이도 많고 키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자아이는 사내아이보다 좀 더 이른 성장기를 맞는 법이라. 이글이 프리츠 가문의 검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자신들 같은 어린 후계자가 없지 않냐고 놀렸을 때 크리스티네는 이글의 목 바로 앞까지 서슬 퍼런 레이피어를 들이밀었다.

“나와 겨뤄 보면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을걸?”

흥미를 느낀 벨져가 심판을 보았다. 이글은 내심 요 맹랑한 여자애 성격이나 자세가 좋은 것에 구미가 당겨 실력이 얼마나 되나 간이라도 볼 심산이었다. 기본적인 포즈나 흔들림 없이 전방을 멀리 보는 눈빛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봤자 여자애라, 태도를 들고 쓰는 홀든 가문의 검술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부드러웠다. 자기 키보다 큰 태도를 들고 막으면 저런 공격 못 막을 리가 없지. 이글은 빙글빙글 웃으며 공격을 여유 있게 흘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여자아이는 멀리 나가떨어져 좀 심했나 싶던 찰나, 소녀는 바닥을 딛고 빠른 스텝을 밟으며 이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칼끝이 거의 눈앞에서 이글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제압당할 위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갑자기 품으로 파고드는 계집아이의 얼굴에 당황해버려. 이글의 빠른 시력과 본능은 반사적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아냈다. 한 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기세 좋게 마지막 승리의 쐐기를 박으려던 크리스티네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아얏!”

“뭐야, 크리스티네. 너무 진지하면 재미 없잖아.”

그리고 이글은 그대로 칼을 들어 용케 놓지 않은 크리스티네의 손에서 레이피어를 쳐내버렸다. 소년의 발밑에 크리스티네의 드레스 자락이 밟혀 있었다.

“이글이 이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벨져의 목소리에 크리스티네는 바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번쩍 들었다.

“받아들일 수 없어. 이글은 비겁한 방법을 썼다고. 이건 정정당당하지 못해!”

벨져는 잠시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직접 눈으로 본 크리스티네의 실력은 확실히 기대 이상이었다. 홀든 가의 아이와 대등하게 겨룬다는 것 자체가 그들 형제 외의 타인, 그것도 여자아이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신속함과 날카로운 시야 역시 그가 보아 온 여느 검사들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기가 달랐다. 크리스티네의 검술을 유심히 살펴 보면 아직 기술이 모자라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 소모되는 힘을 줄이고 빠지는 법, 가벼운 동작으로 상대를 교란시키는 법. 적어도 검을 배운지 몇 년 이상 되지는 않은 것 같아, 계속 싸우다가는 분명 사소한 부분에서 격차가 벌어져 힘만 잔뜩 뺄 것이 뻔했다.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일부러 결정지어 준 것인데. 벨져는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티네. 네가 보통의 짐덩어리보다 조금 나은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네가 여자인 이상, 갈수록 우리와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벨져 홀든이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칭찬이었으나, 명문 프리츠 가문의 검사들에게 칭찬을 자자하게 들어온 크리스티네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소녀는 그대로 다시 쥔 검끝을 돌려 벨져에게 향했다.

“나는 그냥 여자가 아니야. 프리츠 가문의 여자지!”

“쯧.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팔을 괸 채로 벨져가 혀를 쯧 찼다.

“네가 검술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지금 네가 얼마나 편한 환경에 있는지 알고 있나? 우리가 최고의 검술을 잇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는지는 알아? 방금도 드레스 자락을 밟혀서 졌지. 그런 드레스. 그런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하고 다니면서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 것 같아?”

뭐라는 거야, 저 새끼는. 순간 긴 머리를 높이 묶은 이글이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벨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네는 자신답지 않게 분에 잔뜩 겨워 이상한 점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드레스는 벗으면 돼. 머리카락은 자르면 되고!”

“자기가 얼마나 보호받는지도 모르는 여자애가. 그럼 해 봐.”

경멸하는 어조에 어린 크리스티네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벨져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검을 잡았다. 왼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채를 쥐었다.

망설임 없는 행동에 벨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그러나 이미 한번 뱉은 말을 취소하기엔 벨져 홀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크리스티네가 팔을 확 당기고, 벨져가 뒤늦게 후회하려는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크리스티네의 손을 잡았다.

“내가 부탁하지, 크리스티네. 지금 행동은 거두어 주었으면 해.”

그러나 이미 뿔이 잔뜩 난 작은 아가씨의 고집을 파하기에는 과묵한 다이무스의 부탁도 충분하지가 못했다.

“상대에게 행동을 거두라는 말을 할 때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다이무스 홀든 경.”

다이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 크리스티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예쁜데 자르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나는 크리스티네의 지금 모습이 마음이 든다. …이걸로는, 불충분하니?”

크리스티네는 순간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뇨.”

“그러면 됐구나. 가자. 한나 유모가 맛있는 파이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

크리스티네는 다이무스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머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다이무스의 동생들은 뭔가 일 돌아가는 게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툴툴거리느라 크리스티네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고 따라서 다이무스와 크리스티네가 나누는 대화를 듣지는 못했다.

“있죠, 오빠.”

소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한 결의에 차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절로 발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나중에 언젠가, 정말로 벨져 말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면… 그러면 그때는 내가 싫어요?”

다이무스 홀든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잠시 머리를 짧게 자른 크리스티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좀 더 자라난 소녀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크리스티네를 돌아보니, 실제의 소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여운 소녀. 다이무스는 크리스티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소녀를 안아 올리고 귓가에 작게 대답을 속삭였다.

크리스티네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행복하게 웃었다.

“그럼 괜찮아요.”

 

나에게 그녀는 언제나 소녀. 처음 느낌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