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 이야기

몸이 뻣뻣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는 숨이 불편해 입을 벌리고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아주 오랜 잠에 들었던 것처럼 정신이 개운치 않았다. 나는― 나는. 그는 눈을 깜박였다. 나는, 죽었었지.

그 재수 없는 마왕 놈 때문에. 크로우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엔드 오브 버밀리온이 오르디네의 등에 꼬리를 박은 순간부터 크로우는 내내 그렇게 웃고 있었다.

8년 만에 처음으로 미래를 꿈꾸었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의 설렘은 흡사 불안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심장을 꿰뚫리고 죽음을 직감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결국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거다. 오래도록 기다린 결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눈을 뜬 걸까.

숨을 가슴 깊이 들이쉬고 내쉬며 눈을 계속 깜박거리자 부옇게 흐리던 시야가 겨우 막 선명해졌다. 눈앞엔 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잘 아는 후배를 무척 빼닮은 사람이었다. 젊고 말끔한 얼굴이지만 지친 인상에, 검은 머리와 파란 보랏빛 눈동자를 한 남자.

크로우는 저도 모르게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닮은 게 아니라, 바로 그 녀석이잖아. 한심해빠진 표정이 죽기 직전에 본 것과 꼭 같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생각과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상대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크로우는 질문을 바꾸었다.

“올해가 몇 년이지?”

남자는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1206년.”

“그렇구나. 나는 2년 만에 눈을 뜬 건가. 살아있는 게 맞겠지?”

말을 맺기가 무섭게 남자 ― 19세의 린 슈바르처 ― 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기에 크로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제 제법 힘이 돌아와 몸을 가눌 만했다. 들이마신 공기가 몸을 순환하고 피가 도는 것을 느꼈다. 역시 지금 살아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린.”

크로우가 다시 웃었다. 그러나 아까까지의 웃음과는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후배를 바라보았다.

“한심한 얼굴 치우라고 했잖아.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

크로우는 팔을 들어 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기억하는 것보다 더욱 높이까지 팔을 올려야만 했다. 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좀 크로우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후배와 같은 모습이다. 린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크로우의 손을 잡고 뺨에 대어 보았다가, 가슴께 앞에 두고 조금씩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그래. 나야. 기껏 살려놓고 손도 못 대고 있긴.”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크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 하나하나를 겨우 만져보고 있는 후배에게 한 발짝 다가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린이 곧바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었기에 크로우는 분위기를 타서 객기를 부린 것인가 후회했다. 눈을 들자 린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로우.”

린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웃었다. 웃는 얼굴이 어색했다. 기쁨과 울분과 걱정과 놀라움, 감격 같은 온갖 감정이 한 데 뒤섞인 그런 이상한 얼굴이었다.

“키스해도 돼?”

“……그런 건 말로 묻는 거 아니야.”

허락이 떨어졌다. 눈과 눈이 한 뼘 정도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아마 서로 알고도 모른 척 했던 마음이었다. 모른 척 해야만 했던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눈으로 서로를 보는 이상 모를 리가 없던 것이다. 목이 메었다. 갈증이 나는 기분이 들어 크로우는 입을 살짝 벌렸다.

“린―”

곧 목소리가 끊겼다.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린이 크로우의 뺨과 귀에 손을 올리고 벌린 입에 입술을 겹쳐 왔다. 혀가 곧바로 입천장을 긁고 입 안 깊이까지 얽는다. 크로우는 눈을 깜박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린의 목 뒤에 두 팔을 감고 눈을 감았다. 살에 닿는 체온이 불꽃처럼 뜨겁다. 아직 오한이 드는 몸에 더운 것이 좋아 더욱 밀착했다. 한참 숨소리만이 흘렀다. 일부러 빼는 것도 아니었건만 오래 지나지 않아 크로우의 목이 뒤로 넘어갔다. 크로우는 팔을 내려 린의 가슴을 살짝 뒤로 밀어냈다. 자칫하면 휘청거릴 뻔한 것을 겨우 면했다. 얼굴에 열이 올라 숨이 가빴다. 키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꼴이었다.

“왜 이렇게 능숙해?”

크로우가 볼멘소리를 했다.

“……싫어?”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싫다곤 할 수 없으니. 뺨이 확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내가 아는 린 슈바르처는 사람을 살살 꼬이는 주제에 숙맥이고 눈치가 없어서, 분명히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대체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많은 일이.”

린이 크로우의 어깨 위에 양 팔을 올리고 어깨와 가슴 사이에 쓰러지듯이 얼굴을 기댔다.

“아주, 아주 많은 일이 있었어.”

가슴 가까이 린의 귀가 닿아 있기에 분명 심장 소리가 들릴 거다. 빠르게 뛰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박동 소리가. 하지만 숨기거나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크로우는 천천히 팔을 들어 린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조금씩 토닥였다.

“하지만, 지금 크로우 너는 몰라도 돼.”

이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응.”

그렇게 그 자세 그대로 시간이 좀 더 흐르고서야 크로우는 린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저 그게 그렇게 좋아서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후배는. 그리고 크로우도 그저 그것이 좋아서 그대로 린을 안고 있던 것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