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받은 크로린백합

제도 근처에 명문이야 많지만 가장 이름난 두 학교를 꼽자면 역시 황가에서도 몸을 의탁하는 토르즈 사관학교와 성 아스트라이아 여학원이다. 다만 귀족 여학생의 경우 아스트라이아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학교의 교육 과정은 포괄적인 학문과 교양에 더해 숙녀로서의 소양과 신부의 자질을 겸한다. 때문에 토르즈의 여학생이라 하면 아스트라이아에 재적하기엔 신분이 여의치 않거나, 무술 혹은 군부에 뜻이 있어, 한 마디로 비교적 괄괄한 이미지가 있었다.

‘뭐, 이 녀석은 아니지만 말이지.’

린 슈바르처. 귀족 영양으로서는 다소 규격 외의 사람이긴 하다만 확연하게 다른 사람을 끄는 면이 있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이 서글서글해 귀염성이 있는 얼굴인데, 여기에 신비로울 정도로 침착하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이라, 기사도를 꿈꾸는 뭇 남자들이라면 무릎을 꿇고 청춘을 바치겠다 부르짖고도 남겠지.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는 것 같지만서도.’

계속 혼자서만 속으로 평가하는 것도 성미에 안 맞는 일이라 담벼락 위에 앉아 있던 크로우는 그만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야, 멋있다~ 이거 1학년 아가씨들은 아주 든든하네. 라우라 아가씨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실력자가 많잖아.”

“서, 선배님? 전혀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래? 너무 연습에 열중하고 있어서 몰랐나 보네. 야, 안그래도 물 가져왔는데 좀 마시련?”

감사합니다. 휙 던진 물통을 린이 얼결에 받아들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물을 꿀꺽꿀꺽 마시면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옆목에 들러붙고 가는 목선이 드러났다. 본인이 조금만 자각이 있다면 남자 몇은 가뿐히 몰고도 남을 텐데 영 아깝다 싶어서 크로우는 청초한 후배의 자태를 심드렁히 바라보았다.

“묘한 기집애네.”

“네?”

“아니, 알제이드 가 아가씨나, 피 아가씨야 특별한 경우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멀쩡한 귀족 영양께서 왜 검술 같은 걸 그렇게 열심히 수련하느냔 말이지. 처음부터 이쪽 진로를 생각한 건가? 사관학교에 온 것도 군 쪽을 지향해서 그런 거?”

“…뭐, 검술은 조금 사정이 있어서 수련의 일환으로 배웠던 겁니다만.”

“흐으음.”

크로우는 뺨을 푸우 부풀렸다. 니삭스에 가죽 부츠를 덧신은 다리가 담벼락 앞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여학생으로서는 퍽이나 부주의한 태도였다.

“있지, 내가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아가씨야. 너 연애 같은 건 관심 없니? 출신도 그만하면 괜찮겠다, 외모가 빠지나 품행이 빠지나. 토르즈가 이래봬도 명문이라 고귀한 남자분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 하나 잡아서 결혼하는 게 이 학교 아가씨들 사이의 공공연한 드림 루트♥라는 거야. 지금은 황가 사람은 없으니 무리지만 백작가랑 연애결혼이라도 성공하면 그야말로 인생 대박이라는 거지. 너도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왜, 바로 급우 중에도 사대명문 가 도련님 있지 않던가.”

-라고 말을 하면 뭐하나, 역시 그런 거 관심 없다고 고개를 저으려나 이 고지식한 아가씨는. 왜 이렇게 참견을 하는지 스스로 헛웃음이 나는데 린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웃고 있는데 눈매가 씁쓸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제 출생에 대해서는 이미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하거든요. 출신도 모르는 고아 출신의 계집애라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선배님 말씀처럼 결혼을 통해서라도 거둬 주신 은혜를 갚을 수 있었겠지만…”

린은 다시 한 번 단호한 표정으로 앞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여자의 몸으로 검술을 배운 건 제 정도는 제가 건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라우라와 같은 레벨에는 절대 이르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요.”

크로우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턱을 긁다가, 담벼락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반동으로 긴 은발머리가 위로 훌쩍 날렸다가 다시 내려왔다. 다른 것도 같이 날렸다.

“선배, 그… 그러면 치마 보입니다만…”

“괜찮다고, 스패츠 입었으니까.”

“그 그런 문제가 아닌데요!!! 아니 문제인데요!”

“헤헤, 기특한 후배님을 가까이서 보려고 내려왔는데 밀쳐내면 섭하징.”

“제 말좀 제대로 들어주세-”

“미안.”

크로우가 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까 대답에 한방 먹은 기분이 됐지 뭐야. 역시 쓸데없는 참견이라 기분 나빴으려나? 기회니, 뭐니, 네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함부로 말한 건 사과할게.”

갑자기 다가가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쑥맥 아가씨라 연애를 못하는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아깝다는 건 진심이야.”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채로 당황한 후배의 볼을 콕콕 찔러주었다.

“모처럼 이렇게 귀엽잖아? 팔다리도 가늘가늘 청순하잖아? 그런데 자기 취미나 계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늘 수녀님처럼. 나는 안된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게 최고다~ 모처럼의 주말에도 남 일이나 도와주는 게 최고다~ 이런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언니는 억장이 무너져요. 청춘은 눈 녹는 것처럼 짧아요! 그러니까 좀 더 할 수 있는 걸 이것저것 경험해 봐도 나쁘지 않다고. 너는 저얼-대로 어느 한 구석도 빠지는 아이가 아니야. 이렇게 이쁜 후배인데. 정말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뚝 버리라고.”

“그, 그래도요. 역시 그런 쪽은 익숙하지 않아서……”

린이 손가락 끝을 붙잡고 쭈뼛거렸다.

“선배님은, 미인에다 몸매도 좋으시고 사교성도 좋아서 누구에게나 인기 있으실 것 같아요. 사람도 잘 만날 것 같고… 하지만 저는, 역시 연애 같은 건 그닥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할까, 연애라는 건 누가 저를 전적으로 좋아해주는 걸 텐데, 누가 저 같은 걸 그렇게 좋아해줄 거란 사실도 믿기 어렵다고 할까….. 역시 그렇게 쉬운 것처럼 말씀하시는 선배님이 부럽기도 하고…….”

헤에.

그 단정한 아가씨가 이렇게나 횡설수설 쑥스러워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남에게 부럽다고 하는 것 또한. 입가에 웃음이 실실 나오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장난기가 일었다.

“저기 말이야. 그러면 나는 어때?”

“네?”

“그 생각해내기 어렵다는 연애 상대로 나는 어떻겠냐고. 내가 너를 전적으로 좋아해준다면 어떻겠냐고.”

“네?”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아마 여자와 여자가 사귈 수 있다는 생각조차도 못해본 게 분명했다. 그러면 알려주면 그만이지. 크로우가 눈매를 휘면서 생긋 웃었다. 웃는 채로 가까운 얼굴을 더 천천히 다가갔다. 눈만 깜박이고 거부할 생각을 못하는 걸 보면, 역시 성향은 있는 게 아니려나. 눈을 감고 손을 잡았다. 다음은 입안이었다.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처음이 아닐리가 없네. 크로우는 기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양심이나 죄책감 따위보다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는 악독한 장난기가 훨씬 짜릿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후배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단, 대강 이런 게 연애의 일부라는 거야. 어때? 기분 나쁘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