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remember you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6호라고 적힌 문패 아래 두 번 노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들어와라. 변변치는 않지만.”
“변변치 않은 게 아니라, 완전히 엉망이네…….”

딱 떨어지게 정돈되진 않아도 나름 깔끔한 방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어수선했다. 바닥에 놓인 온갖 서류 박스부터 시작해 마이크나 잡다한 기자재까지 정신없이 쌓여서 천장까지 닿을 기세였다. 편하게 발을 디딜만한 장소도 마땅찮아 조심조심 걸어가자 크로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엘리엇 방은 그냥 악기 보관소고, 네 방은 어지럽히기 좀 그렇고… 작업실로 쓰기는 내 방밖에 남는 게 없잖냐. 그래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지쳐서…….”
“얼라라, 리더 씨가 마음 약한 소리를 다 하네.”
“리더 같은 거 아니야.”

린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입을 벌렸다가 말을 하는 대신에 한숨만 푹푹 쉬고 있자 크로우가 큭큭 웃으면서 축 늘어진 어깨를 쳐왔다.

“하하, 이거 완전히 녹초구만. 엘리엇이 쬐끔 스파르타지?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그 순둥이한테 그런 면이 있을 줄이야. 완전히 다시 봤어.”
“조금이 아니야, 조금이……. 오늘도 방에 못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내가 도무지 연주에 집중을 못하니까 보내준 거지.”
“건 의아하긴 하구만. 뭐 딱히 심란한 일이라도 있어? 그러니까 인생 선배의 조언이 필요해서 온 거구나. 역시 여자 문제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그래. 어디 이 형님한테 다 털어놔 보라고.”
“응, 그게-”

대답을 하려고 얼굴을 드는데, 크로우가 눈을 크게 뜨고 빙글 웃고 있었다. 빤히도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응? 쉽게 말 못할 일이야?”
“아, 아니.”

급히 고개를 돌렸다. 요새 들어 갑자기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많아진 것 역시 모를 일이었다.

“그냥, 모르겠어……. 요즘 갑자기 여러 생각이 들거든. 벌써 가을인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어, 내 말이 그거다만. 시간이 훌쩍 가지 않냐. 아직 블레이드 삼천 판도 다 못 채웠는데 말이야.”
“……음, 이천 판도 굉장하다고 보지만 일단 넘어갈게. 아무튼, 내가 학교에 처음 들어올 때는 그저 나의 ‘길’을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특과 VII반에 들어온 것도 그저 수련하는 입장에서 편한 길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하하. 설마 이렇게 황궁에 초청받아서 폐하께 치하까지 받게 될 줄은 몰랐네.”
“아아, 동감. 확실히 굉장했지. 이 학급도 대단한 놈들 투성이지만 정말로 높으신 어른들은 느낌이 확 다르더라니까.”
“그래서……, 지금 자꾸 현실감이 없는 거야. 입학하고 나서 계절이 한두 번 바뀌었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기대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걸 얻었어. 실습의 성과도, 친구들도, 너무 내게 분에 넘치게 충만해서, 오히려 불안해져. 정말 앞으로도 이대로 지낼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생각나는 대로 말을 죽 늘어놓고 한 숨이 지난 후에야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안……, 이래서야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오호. 하긴 뭐, 그럴 때구만.”
“그럴 때?”

크로우가 손을 허리에 얹고서 씩 웃었다.

“가을을 탄다는 거지.”
“아……. 그런가.”

툭, 툭.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손의 무게가 머리 위에 두 번 실렸다가 사라졌다.

“뭐 그런 걸 고민하고 그러냐, 인마. 앞날의 일이야 누구라도 모르는 거지. 불안하고 걱정되는 게 당연해. 하지만 그렇다고 움츠리고 경계만 하고 있기엔, 네 말대로 그 넘치게 충만하다는 이 순간이, 너무 아깝잖냐. 그러니 그저 불안하다고 느끼는 만큼 더 맘껏 즐기면 되는 거지. 아무래도 그래야지 청춘이라는 녀석한테 실례가 안 되지 않겠어?”
“크로우…….”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긴 답에 반쯤은 감탄하고 반쯤은 얼떨떨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크로우는 또 금방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내가 길게 말한다고 바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즉에 해결됐겠지만 말이야.”
“하하, 그것도 그렇네. 그래도 이해했어, 크로우의 생각. 너무 청춘을 즐기다가 유급하는 건 역시 곤란하겠지만…….”
“야, 야. 기껏 멋있는 말 해놨더니 여기서 그 얘기를.”
“그래도 아직 싱숭생숭하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명쾌한 기분이야.”
“그거 다행이구만.”

팔자로 풀린 눈썹을 하고 빙긋이 웃고 있는 크로우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다가 곧 미간을 확 좁혔다. 장난기가 그득해진 눈동자를 린 쪽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배부른 놈이네. 불과 며칠 전에 유미르에 휴가 갔잖아? 부모님도 보고 귀여운 여동생도 봤으니 이래저래 좋았을 거 아냐. 아, 그래서 싱숭생숭한건가? 두고 온 귀염둥이가 그리워서? VII반 여자애들도 귀여움이라면 지지 않을 텐데, 욕심이 많으시네~”

―라고 하면 당연히 평소처럼 당황해 쩔쩔맬 줄 알고 한 말이었겠지만 린의 반응이 단호했다.

“몰아가지 마, 크로우. 그리고 여동생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엘리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줄래…”
“앗차차, 이 녀석 시스콤이었지…….”
“엘리제는 아직 사교계 데뷔도 하지 않은 몸이야. 혹시 엘리제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거라면, 아무리 크로우 너라고 해도…”
“히야~ 이거 큰일 날 사람이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조용히 팔엽일도류의 기까지 담기 시작하는 린에게 질겁해 크로우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제 아가씨는 너무 어리잖아. 아직은 응석쟁이던만. 나는 귀염둥이도 좋지만, 좀 더 믿음직한 쪽이 더 좋다고.”

손사래를 치던 크로우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눈을 깜박였다.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대로 린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지. 나는 좀 더, 내가 기댈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넓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눈빛이 아까보다 사뭇 진지했다. 린은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예를 들어… 저런.”

보란 듯이 높이 치켜든 크로우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헐벗은 여자의 포스터가 있었다. 끝이 자꾸 벽에서 떨어지는 걸 열심히도 붙였는지 테이프 자국이 벌써 몇 겹이었다.

“하아아…….”

어째 그만 기운이 쏙하고 빠져버렸다. 내가 이 한심한 선배 상대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람.

“그럼 이만 가 볼게.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허탈한 기분이 되어 뒤를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와 놓고 가긴 어딜 가, 어딜.”

아까 잡힌 어깨를 다시 잡혔다.

“어-”
“괜히 정리가 안 되는 기분이라면- 역시 그거지.”

다시 돌아서니 눈앞에 크로우가 손을 불쑥 내밀고 있었다. 치켜세운 집게와 중지가 딱 딱 부딪혔다.

“아.”
“자리가 따로 없어도 괜찮겠지. 침대에 앉아, 린.”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크로우가 옆의 선반 위로 손을 올렸다. 린도 거의 동시에 침대 위로 몸을 날려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좋아. 오늘은 지지 않을 테니까 각오해, 크로우.”
“큭큭. 어디 한번 그동안 얼마나 실력을 갈고 닦았는지 봐 주마.”

 

게임은 평소보다도 치열했다. 첫 판에서는 크로우가 짐짓 여유를 부렸지만 둘째 판은 기습에 미처 대처하지 못해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 결국 끝까지 승부를 보자며 크로우가 엄포를 놓고 둘 다 제법 투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판세는 막상막하였다.

“이 녀석, 생각보다 꽤 하잖아… 역시 집에 갔다 와서 원기회복 한 건가. 부럽구만.”
“응, 원래 가려고 했던 건 아닌데…….”

손패를 훑느라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린이 카드를 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부러울 것까지야……. 그러고 보니, 크로우의 집은 어디에 있어?”
“그냥, 북부에 있는 시골구석. 아마 이름을 얘기해도 넌 모를걸.”
“헤에…”
“헤에, 가 아니라, 다음 카드부터 내지 그래. 이건 남자 대 남자의 진지한 승부라고.”
“방금 냈잖아.”
“역시 실력이 늘었잖아……. 곤란하네.”

카드를 노려보고 있는 크로우에게 린이 가볍게 물었다.

“크로우의 고향, 어떤 곳인데?”
“뭐…….”

크로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럭저럭 살만한 동네였어. 너희 마을만큼 특별나진 않아도, 나름대로 특색도 있고. 풍광도 볼만하고. 자그맣지만 전통도 있고. 인심도 괜찮아서 어른들도 쪼끄만 나를 많이 예뻐해줬던…….”

크로우는 한참이나 카드를 뒤적이며 고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영 답이 안 나오는 촌구석이었어. 제대로 있는 게 없는 답답한 동네라. 한마디로, 말이 안 통했어. 그런 데 박혀 있기엔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래서 아예 훌훌 털고 나왔지.”

마침내 3 위에 7 카드가 올라갔다. 잘 이해되지가 않는 선택이었다.

“캬, 역시 이 몸은 화려한 도시 체질이랄까. 경마장이 있는 헤임달이나, 젤리카네 아버지가 꽉 잡고 있는 루르나, 그래, 켈딕도 꽤 괜찮지. 그 동네야 조그맣지만은 사람도 많고 시끌벅적하고.”

린은 다음 카드를 내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결국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것 치고는, 아까 그리워 보인다 싶었는데…….”
“응, 뭐 그런가……. 아주 싫어서 떠난 건 아니니까. 나도 어렸을 땐 꿈 같은 게 있었거든. 내가 잘 하면, 이 고향을 먹여 살릴 수 있겠다, 다 같이 더 잘 지낼 수 있겠다, 뭐 그런 거.”
“뭐야, 크로우답지 않네. 그런 책임감이 있었다고?”
“그래, 아주 건실한 꼬맹이였지. 큭큭. 왜, 부럽냐?”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그렇지만 떠나왔다는 건……, 그 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 거야?”
“엇차. 카드가 뒤집어졌네. 잠깐 이것부터 처리해야겠는걸.”
“응, 크로우?”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혀 처음 듣는 얘기에 궁금증이 동해 되묻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크로우는 무심하게 카드를 정리해갔다.

“우연히, 딱 한 번. 그동안 안 가기를 잘 했다 싶었지. 앞으로도 안 갈 작정이고.”
“하지만 그러면 좀…… 쓸쓸하지 않아?”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혹시 실수한 걸까 하는 자책감과 함께 호기심도 널을 뛰어 어디까지 말을 해도 좋을지 딱 가늠해 잘라낼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들르고 봤더니 그리웠다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못할걸.”

크로우는 카드를 부채꼴로 펼치고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였다.

“네가 길을 찾아낼 때까지 유미르로 안 돌아가려던 거랑 비슷한 거야. 너나, 나나, 사람이 거취를 옮길 때는 다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는 거잖냐. 성공하겠다고 버리고 온 이상, 더는 돌아갈 이유가 없지. 이대로는 역시 얼굴 떳떳하게 들 수 없잖아.”

성공? 의문이 들었다. 이 되는 대로 사는 선배가 성공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이던가? 린은 크로우와 성공이라는 단어를 결부시키는 데에 꽤 애를 먹었다. 그리고 의문보다도, 어쩐지 안타까웠다.

“그러면, 성공한 후에는? 그때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어?”
“글쎄다. 그래, 그때쯤이면 거기도 좀 봐줄 맛이 나려나…….”

혀끝이 썼다. 분명 게임은 유리하게 끌어가고 있는데, 가슴이 갑갑했다. 대화의 흐름이 어쩐지 어딘가 허공을 빙 에둘러가고 있는 듯했다. 지금껏 크로우와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크게 탁 소리가 났다.

“그럼 여기서 순진한 후배님이 얘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볼트―!”
“크……크로우, 날 속였구나?”
“헤헷. 이거야말로 형님의 고등 테크닉이라는 거란다.”

회심의 한 수를 던져 놓고 크로우는 그야말로 득의양양했다.

“더 쓸 패가 없겠구만. 어때, 내 말이 틀려?”
“윽, 맞아…….”
“자, 이제 판돈을 줘 보실까.”
“판돈 같은 거 애초에 건 적 없었잖아!”
“무슨 소리셔. 판돈은 게임의 기본이야, 기본. 설마 100미라도 없냐?”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거든!”
“정 싫다면―”

크로우가 자리에서 반동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린도 얼결에 그 손을 받아서 끌려 일어났다.

“헛차. 판돈 대신에 같이 밤 산책이나 갈래? 누구 덕분에 이번엔 내가 기분이 영 텁텁~해져서 말이다.”
“그런 건…… 환영이지.”

 

10월의 밤이라 어쩔 수 없이 냉기가 얼굴에 스몄다. 아무리 기능적이라고 자랑하는 교복이라도 방에 있다가 나오니 뒷목이나 소매에 바람이 들어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은 어찌할 바가 없었다.

크로우는 늘 하는 양대로 팔을 올려 머리 뒤에 손을 얹고 앞서 걷고 있었다. 따라가는 것이 어째 어색했다. 그리고 곧 린은 이런 식으로 크로우의 뒷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면 늘 상대를 충실히 의식하고서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아까도 그랬다……. 생각에 젖어 있는데 크로우가 불쑥 뒤를 돌았다. 팔짱을 끼고 몸을 과장되게 움츠린 채였다.

“오늘 좀 쌀쌀하구만. 미안, 들어갈래?”

지금만큼은 이게 배려 차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나는 괜찮아. 크로우는 어때?”

대답 대신에 희미한 미소가 돌아왔다. 크로우는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린도 다시 그 뒤를 따랐다. 늦은 밤이라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많지 않았다. 길게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고요 아닌 고요는 크로우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릴 때까지 이어졌다.

“이거 꽃은 다 져 버렸구만.”

무슨 말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더니 라이노 꽃나무뿐이었다. 린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벌써 가을이잖아. 꽃이 진 건 벌써 몇 달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 그랬지.”

크로우는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빛과 섞인 가로등 불빛이 은발 위에 발간 기운을 드리웠다. 린은 익숙치 않게 느껴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네 말대로 많은 일들이 있었네. 그치?”

크로우가 다시 빙글 뒤를 돌아 씩 웃는다.

“그런데 어쩌냐. 너한테는 앞으로도 일이 많을 것 같다 싶단 말이지~ 불운의 별 아래 태어난 그런 느낌.”
“으……. 저주하지 말아 줄래…….”
“하여튼 너도 참 공사다망한 놈이야. 오늘도 그렇지. 이 몸은 연출가 자리를 찜해놨으니 연주 연습 같은 건 필요없다만, 너는 정말 고생이 많아.”
“연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인걸. 크로우가 없었으면 우린 이렇게 무대 준비를 못 했을 거야. 응. 확실히 작년의 무대는 굉장했어서, 크로우가 나와 준다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그치만 어쩌겠냐, 2학년에 편입생인데 내가 참을 수 없는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후끈하게 폭발시켜도 반칙이잖아. 약 오르더라도 좀 참아라. 금방 학교를 떠날 인간보다는 너희가 눈도장을 찍어 놓는 게 아무래도 낫지.”
“역시 안 어울리네. 이상해, 오늘의 크로우는.”
“뭣.”
“크로우는 늘 자기 멋대로고, 기분파라, 딱 보면 못미더워 보이지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 점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크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가가 싱글싱글했다.

“호오, 이 형님을 그렇게 동경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방금 말 취소하고 싶어졌어.”
“뭘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고 그래. 이 여세를 타서 얼마나 존경하는지 형님한테 확 고백을―”
“크로우한테도 보기랑은 다르게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건 알겠어. 정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데, 어쩐지 배신감도 들고.”
“헤헷. 이거 유감이겠네~ 생각보다도 멋진 형님인줄 이제야 알아서 어쩌나.”
“또 혼자 센 척하지.”

―했다.

웃음기가 그림처럼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린은 크로우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걸치지 않은 크로우는 평소와는 표정이 아주 달라 보인다. 그리고 분명 이런 표정을 가끔,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금방금방 사라져 놓쳐 버렸을 뿐. 명멸하는 기억에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어쩌면 주제넘은 말일지도 몰라. 나는 크로우가 아니고 크로우는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얼마 전 나는 유미르에서 분명하게 깨달았어. 앞을 꿈꾸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첫 번째라고. 그러니까 크로우도 마음이 복잡할 땐 굳이 애써서 멀쩡한 척할 필요 없잖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보여도 괜찮잖아.”
“내 참. 너는 젊으니까 그런 부끄러운 소리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을지 몰라도, 형님은 이미 세상 물이 들어버렸다고. 그렇게 티 없이 반짝반짝 하는 거 어려워요.”
“나한테 말했잖아, 크로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그리워도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다거나, 곧 졸업할 테니까 나서지 않는다든가, 그런 거 역시 크로우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린의 열띤 얼굴에 크로우가 쳇, 하고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린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단호했기에 아예 얼굴을 돌려버리지도 못했다.

“나도 있지, 크로우. 그래, 길을 찾기 전에는 유미르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정작 내가 한 단계 성장한 건 동료들과 함께 유미르로 돌아가서였어. 지금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동안 함께해온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거기엔 분명 크로우의 도움도 적지 않게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크로우도 만약 고향에 혼자 가기 마음이 복잡하고 꺼려진다면, 나를 불러줬으면 해.”

말을 하다가 가슴에서 무언가 왈칵 치솟아 린은 크로우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니, 성공이라거나 성장한다거나,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잖아. 크로우는 지금 이대로 내가 보는 것처럼 믿을 만한 사람이잖아. 혼자서 돌아가기 마음이 복잡하다면 다른 친구들도 있고, 나도 있어. 어떤 사정이 있든 나에게 크로우는 크로우니까. 크로우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물론 나는 지금 크로우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적지만 보기보다는, 크로우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런 나라도 나에게 네가 그런 만큼, 떠올렸을 때 힘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걸…… 역시 너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응. 나는 지금 바라고 있어.”

크로우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힘이 빠졌다. 눈썹이 처졌다.

아주 환하게 웃거나, 아니면 완연한 울상이거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과도 비슷했다. 크로우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네 녀석 말이야.”
“응?”
“아니, 새삼 VII반 여자애들이 불쌍하다 싶어서 말이지.”
“지금 내 욕하는 거지?”
“용케도 알아채네.”
“아, 정말-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아까부터 자꾸만 힘이 빠지게 만들어버리는 건 분명 크로우의 잘못인 거다. 뿔이 나서 홱 뒤를 돌았다. 발을 떼기가 무섭게, 머리 위에 무언가 얹혔다. 린은 발을 더 옮길 수가 없게 되었다. 잠시 후에 깨달았다. 손일 거다. 크로우의.

“고마워, 린.”

등 뒤에서 작지 않은 체구가 조금씩 무게를 실어 기대 왔다. 뺨 위에 팔이 닿았다. 뒷머리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느껴졌다.

“이건 진심이야.”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은 듯했다.

쌀쌀한 날이라 유독 다른 사람의 체온이 따끈따끈했다. 등에서부터 어깨 위, 얼굴에서 열기가 점점이 퍼졌다. 라이노 꽃은 진 지 오래일 텐데 밤바람에 달큰한 잔향이 있었다. 등 뒤에서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남겼다. 린은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크로우의 실루엣이 자신의 실루엣과 섞여서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입김이 피어올랐다. 조금씩 간격을 두고 가지런히 설치된 가로등 불빛과 달빛이 뒤섞여 밤공기 위에 범벅이 되었다. 밤이 찰나나 영원 같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크로우가 헛기침을 하고 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흠, 이만 돌아갈까.”
“응…….”

 

서로 반 보쯤 떨어져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오니 샤론이 올 걸 알고 있던 듯이 현관에서 완벽한 인사를 했다. 돌아오셨군요, 린 님, 크로우 님. 바깥에서 오래 있다가 만남을 마치셨는데 출출하지 않으신가요? 야식을 내올까요? 린은 도망치듯이 거절하려고 했지만 크로우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방에 들어가려는 린에게 배라도 채우고 가라고 윙크를 한다. 조금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서 요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에 부엌 소리를 듣고 나온 사라가 합세했다. 이 냄새는 설마… 조개구이? 여기엔 맥주가 제 맛이지! 아니, 교관님. 내일도 출근하시잖아요. 그렇게 빡빡하게 귀염성 없이 굴면 어떤 여자가 데려가겠니. 맞아, 사라. 이 녀석이 영 귀염성이 없지. 크로우 너는 왜 맞장구야!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2층의 남학생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방에서 공부하던 마키아스가 안 그래도 출출했다며 이것저것 집어먹자 유시스가 남을 위해 만든 것을 빼앗아 먹냐며 질책하고 언제나처럼 싸우기 시작하려는 것을 엘리엇이 땀을 흘리며 겨우 말린다. 소란이 점점 커지자 1층에 내려와 본 알리사가 테이블을 보고 질겁을 한다. 샤론~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요리재료가 다 여기에 있는 거냐고. 계단 위에 피가 자다 깬 얼굴로 나타나 일침을 놓는다. 시끄러워, 다들. 뒤에 선 엠마가 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조용해질 거예요. 다시 가서 자요, 피. 뭐야, 뭔데? 나도 끼워줘! 왜 돌아가는 거야? 발을 구르는 밀리엄도 겨우 진정시켰다. 가이우스가 느긋한 얼굴로 말한다. 기숙사 생활을 담은 그림도 나쁘지 않겠군. 그렇게 야밤의 깜짝 파티는 해산이 되었다. 여학생들은 3층으로, 남학생들은 2층으로 돌아갔다. 린과 크로우는 함께 2층 가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까부터 쭉 함께 있어서인지 린은 크로우가 방까지 따라 들어올 때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방 안쪽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앞에 서 있는 크로우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오늘……. 고마웠어.”

고마웠다? 즐거웠다? 한심했다? 그립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뒷머리에 손을 얹고 있으니 크로우가 빙긋이 웃었다.

“나야말로. 그럼, 잘 자라.”
“잘 자, 크로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뒤돌아 떠나는 크로우의 뒷모습이 쌔했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좀 더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계속 함께 있는 편이 당연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실례잖아. 이미 한참 시간이 늦었는데. 크로우의 말대로 이런 것도 가을을 탄다는 건지 모른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온지 얼마 지나지가 않아서, 그래서 외로워진 거라고, 크로우의 뒷모습도 아마 그래서 외로워 보이는 걸 거라고.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누워 있자니 좀이 쑤시고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크로우에게 찾아가야만 할 것만 같다. 그리고 하던 만남을 계속해야만 할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붉게 얼룩져 있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진정해, 린 슈바르처. 내일 일어나서, 내일.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으니까. 대화가, 목소리가, 얼굴이 꿈 대신 아른거렸다.

 

린은 눈을 떴다. 트리스타 제3기숙사 201호였다.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차림을 정리했다. 짐 꾸러미는 침대 앞에 정리되어 있었다. 웬만한 준비는 자기 전에 갖추어 놓았다. 짐을 메고 나와 건너편 방으로 향했다.

린은 206호 방문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그대로 서서 작게 숨을 쉬고서 습관적으로 노크를 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 뺨이 달아오르고 콧등까지 시큰했다.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리자 자주 사용되지 않은 경첩이 녹슬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방에는 별 물건이 있지 않았다. 린은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눈에 담았다. 방 오른편에 선반과 화분이 있고, 안쪽으로는 먼지 쌓인 침대가, 왼편으로 시선을 옮기니 책상 위에 펜과 책 몇 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나무로 만든 간소한 함이 놓여 있었다. 린은 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갈까?”

허리를 굽혀 함을 두 손으로 들었다. 손이 묵직했다. 내용물이 혹여나 새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움직임이 뻣뻣했다. 서늘한 기운이 훅 몸을 감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가까운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 작은 싸리눈이 날리고 있었다. 혹여 눈발의 습기가 함에 닿을까봐 조심스레 천을 두르고 받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도 불안해 가슴에 닿도록 받치니 꽤 안정적이게 되었다. 팔 안쪽과 가슴과 턱 아래에 닿았다.

온몸으로 한껏 끌어안은 채 기숙사를 나섰다.

1205년 초 겨울날 린 슈바르처는 줄라이 특구로 여행을 떠났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