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주간_미카슈 주제 : 카페, 소나기

슈가 외국에 나가 있었다는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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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7월 14일, 이츠키 슈는 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책을 읽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탓에 근육이 뭉친 데다가, 피로로 몸이 무거워 바닥에 늘어붙을 것 같았다. 수화물을 찾는 것도 통관 절차도 번거롭게 느껴져 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귀에 들어오는 모국어는 정겨웠지만, 아직도 딱히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얄브레한 가디건을 걸친 채 캐리어를 끌고 기계적으로 걸어가던 이츠키 슈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 년간 보지 못한 얼굴을 떠올렸다. 창백하다시피 희게 마른 얼굴에 기이할 정도로 밝은 눈동자가 눈에 띄는, 꽤나 강렬한 인상이지만 여전히 앳된 기가 남아있는 청년의 얼굴. 그래, 이 나라에는 그 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제야 이츠키 슈는 생각한다. 나는 돌아왔어.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공항과 캐리어 바퀴 끌리는 소리, 구두 소리가 소음처럼 페이드 아웃되고 머릿속을 스치는 카게히라 미카의 목소리. 스승님. 슈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으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한데 이 목소리가 정말 미카의 것이 맞는지 아니면 자신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되뇌이다가 그려낸 환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갑작스러운 일정 때문에 온 도쿄였다. 미카에게 말하면 자신의 일정을 무리하게 빼서 공항에 마중나올 게 뻔하기에 일부러 말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구나. 슈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 37분. 일요일의 느즈막한 아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가 최근에 주말마다 시간을 보내는 카페가 있다고 했던가. 공항 밖으로 나온 슈는 택시 문을 열고 더듬더듬 생각나는 주소를 불렀다.

택시 기사가 고개를 뜨덕이고 시동을 걸자 부연 창 밖으로 희끄무레한 도시가, 나무가, 거리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름이었다. 7월의 일본은 후덕지근한 날씨였지만 그마저도 어쩐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참동안 그렇게 창밖을 내다보던 슈는 택시 기사가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맞냐고 묻지만, 미카에게 카페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와 본 것은 처음이니 아마 맞을 거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이지색으로 벽을 칠하고 원목 탁자 위에 흰색 다구를 놓고 전면 유리를 댄, 깔끔하고 조용한 카페였다. 미카는 왜 이곳을 좋아하게 된 걸까. 여기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슈는 차를 주문하고 탁자에 앉아 비행기에서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Essays in Love. 책을 읽어내려가며 연애하는 주인공과 끌로에를 따라 하이드 파크, 켄싱턴 스퀘어, 그리고 여러 런던의 거리를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세찬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빗줄기가 유리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슈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 일본의 여름 날씨는 변덕스러웠지. 세차게 내리는 비에 가로수의 꽃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달라붙었다. 엉망이었다. 이츠키 슈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차다가, 제 꼴이 더 우스워 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이런 날씨면 너라도 밖에 나오지 않겠구나. 괜히 헛고생을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츠키 슈가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을 때

눈을 드니 그 얼굴이 있었다. 하얗고, 창백하고 깡말라서 걱정되고 그리운 얼굴. 후드를 눌러쓴 채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느릿느릿 걷던 카게히라 미카는 카페 안에 앉아 있는 슈를 발견하고는, 제가 헛것을 보나 걱정되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크게 벌리고 있었다.

슈는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여즉 손에 책을 든 채라는 걸 미카의 코앞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곧 책이 바닥에 나뒹굴고 빠르게 비에 젖어들었다.

몇 년 전, 여름보다 더 갈증이 나던 때가 있었어. 지치고 지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세상이 아무 의미 없는 무채색으로 보였어, 그런 적이 있었어. 그런데 삭막한 세상에 네가 툭, 하고 한 방울, 떨어진 거야. 나는 너를 피하려고 했지만, 해진 종이에 한 방울 떨어진 물은 금방 끝까지 번지기 마련이라. 네 덕분에 세상은 금세 수채가 되었지. 물처럼 투명하고 촉촉한 것들이 세상에 아롱아롱 꿈처럼 번져서 색채가 되고 서정이 되었지.

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가, 우산을 놓고 젖은 손을 들어 슈의 뺨을 확인하듯 만져보더니 우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발꿈치를 바짝 들었다. 환상이 아닌 걸 알았으니 남은 부분을 마저 확인할 차례였다.

세찬 소나기였다. 주인을 잃은 우산이 바닥에 뒹굴고 책이 완전히 젖어서 눌어붙었다. 빗방울은 차갑고 옷은 젖어들고 세상에 남은 온기는 서로뿐. 두 사람은 조금이라도 체온을 더 나누고자 몸을 밀착한다. 달라붙고 젖어들고 수채가 되어 아롱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