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의 하루

리퀘스트 박스(연금술사 슈와 제자 미카) + 지난주 주간 주제 설탕 버무렸습니다. 판타지 세계관을 생각하고 리퀘주셨을 것 같은데 최근 읽은 창백한 말에 영향 받아서 적당히 흐로닝언입니다.. C’est la vie! 약간의 얀데레 주의.

 

***

 

1.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2.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눈을 뜨고 창 밖을 보면 이미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지붕 위 첨탑까지 올라 있는 느즈막한 아침. 길게 기지개를 켜고 탁자 쪽을 보면 계란과 호밀빵으로 차린 간소한 식사가 있다. 보통 연금술사와 그의 제자라고 하면, 식사나 잡무를 챙기는 것은 제자 쪽이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집의 하녀들이 챙겨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슈는 굳이 자신이 미카의 식사를 준비하기를 고집했다. “사람은 적당량의 고기와 곡류, 과일을 먹어야 해. 특히 너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내장이 뒤틀려 아무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꼴불견인 녀석은 더더욱 그렇다. 더 이상 내게 실패작처럼 거치적거리지 마라.” 미카는 빵을 한 손에 들고 냠 베어물었다. 맛있으니까, 스승님의 그런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인들이 사는 곳보다 별달리 나을 바 없는 다락방에 머물고 있지만, 슈에게 딸려서 이곳에 묵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작은 손거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옷깃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 안 그러면 슈가 또 잔소리를 할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는 않지만 오늘은 참아야지 – 펜과 종이 더미를 챙겨서 2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방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죽인다. 혹시라도 스승님을 방해할까,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열어 보면 어느새 중천까지 오른 한낮의 햇빛이 창문 틈으로 비죽 쏟아진다. 그렇다고 눈부시지는 않았다. 멀리서부터 초청받은 연금술사를 위해 일부러 남향으로 창을 낸 방이 주어졌지만, 직사광선에 종이가 변색되는 것을 싫어하는 슈는 창문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커튼을 쳐 두었다. 옅은 아이보리색의 리넨 커튼 뒤로 부드럽게 너울거리는 아침의 햇빛. 그리고 그 아래 책상에 얼굴을 박다시피 앉아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 미카가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종이 가득 수식을 써내려가고 있던 슈는, 펜으로 마지막 점을 찍자마자 미카가 서 있는 쪽을 휙 돌아보았다.

“뭘 멀뚱하게 서 있는 거냐. 옆에 앉아라, 미카.”

“와, 앗. 스승님. 내 못 본 줄 알았다!”

“흐로닝언의 연금술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보다 지금이 몇 시지? 방에도 일찍 들어갔을 텐데, 너는 대체 왜 그렇게 늦게 일어나는 게냐.”

“응아, 스승님이 일찍 일어나는 거다이가~? 스승님은 맨날 아침 닭이 울기도 전에 새벽같이 일어나니께, 내 그 시간에 맞추기는 쪼까 힘들어서…….”

“웃기는 소리군. 너처럼 어린 녀석이 나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서, 이렇게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난다고? 아직도 몸이 엉망인 건 아니겠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겠지?”

“응, 걱정 마라! 내 잠을 쪼매 많이 잘 뿐이지, 이제는 밥도 잘 먹고, 팔다리도 일케 잘 움직이고 힘도 잘 쓰고, 몸에 아무 이상도 읎다!”

“네 걱정을 하는 걸로 보이나? 내 옆에 거치적거리는 녀석이 붙어있는 걸 참을 수 없을 뿐이야.”

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미카를 홱 쏘아보았다.

“지각한 주제에 또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게 하는구나……. 더 늦기 전에 오늘의 작업을 시작하지. 작업실을 준비해라, 미카.”

 

 

3. 연금술의 목표는 납 따위의 자잘한 물질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눈만 껌벅이고 있던 미카에게 언젠가 슈는 말했다. “그런 건, 여기 흐로닝언의 상인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소리야. 연금술의 목적은 그런 단순하고 세속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지.”

“높은 가치?”

“그래. 자연의 법칙, 세계의 질서.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진리. 영원으로 이끄는 것, 그 무엇과 대어도 견줄 수 없는 순도 깊은 진실.”

“뭐라카노. 스……승님이 하는 말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슈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애초에 너처럼 비천하고 멍청한 놈이 진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도, 대체 왜 너 같은 녀석을 내 제자로 삼는 건지……. 하지만 이왕 내 제자로서 행동하는 이상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하거라, 미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하나의 진리에 있어. 연금술사는 늘 그런 마음으로 행동하는 거다.”

그렇게 말하며 슈는 긴 손가락을 들어 미카의 관자놀이에 가져다대었다. 기억해, 미카. 우리의 단 하나의 진리를. 옅은 보랏빛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시야에 가까워진다. 얇은 눈썹이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고, 결의가 서린 이마가 곧다. 진리란 무엇일까. 스승님은 대체 무엇을 추구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걸까. 스승님이 가르치는 수식과 추구하는 가치를 전부 이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4. 미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솥을 닦았다. 관 사이에 입김을 불고, 깨끗이 삶은 헝겊으로 쇠막대를 감싸 관에 집어넣고 이물질을 제거했다. 순도 깊은 진리, 순도 깊은 작업. 슈는 미카에게 늘 강조했다.

“조금의 이물질이 매개 사이의 반응을 방해하는 수가 있어. 내 작업의 성패가 너에게 달린 거나 마찬가지다. 모든 기구는 될 수 있는 한 정결하게 유지하거라.”

헝겊을 둘둘 만 쇠막대가 들어갔다, 나왔다 관 사이를 왕복한다. 목 사이로 땀이 흐른다. 하지만 땀이 기구에 닿아서는 안 된다. 다급히 상체를 들자 자욱하게 피어오른 수증기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작업실에서도 겉옷을 단정히 여미고, 언제나 변함없이 진지한 얼굴로 실험에 일하는 남자. 매일 보는 남자이지만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새롭고……. 수증기 중에 숨이 막혀 아득함을 느끼던 미카는 퍼뜩 이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슈. 나의 스승님. 흐로닝언의 연금술사. 그가 소매를 걷는다.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치고, 관을 들어, 쇠막대를 받쳐 시약을 조금씩 따른다. 유리병 안에 든 액체가 붉게 빛나기 시작한다. 미카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슈는 숨소리조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시약 위로 푸른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붉은 빛과 푸른 빛이 일렁이고, 연결된 불꽃이 한차례 관 위로 튈 듯 하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막대를 내려놓고 슈는 얼굴을 두 손 위에 묻었다.

“왜 안 되는 거지? 공식에서는 오류를 찾을 수 없어……. 증류가 충분하지 못했나?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포기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어째서……?”

“와 그래 짜증을 내노? 스승님답지 않다~. 어디까지나 더 큰 진리를 찾는 과정이다. 눈앞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내 생각이야 그렇지. 하지만 후원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으니까.”

“후원자라고 하면, 그 하얀 옷 입은 도련님 말이가?”

“그쪽이겠지……. 나는 표면상으로는 그의 아버지의 손님이다만, 어디까지나 그의 호기심으로 이곳에 초빙된 거니까.”

“하지만, 스승님. 애초에 이상하지 않나. 처음 만났을 때 스승님은 후원자 같은 거 없이도 혼자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사람들이 찾아왔으니께 스승님이 이름난 건 안다. 그때는 이렇게 기구도 많지 않았고 작업실도 작았지만, 스승님이 그런 걸 신경쓰지는 않았잖나.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왜 굳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누구 지나갈 때마다 어울리지도 않게 굽신굽신 인사를 하고 있냐 이 말이다.”

슈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미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아까까지 보던 유리관이나 책 속이 아닌 아닌, 미카의 얼굴 위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이마며 눈이며 턱이며 얼굴 구석구석을 요모조모 훑어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미카는 연금술사의 제자이다. 스승님은 언제나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미카는 대답할 수 없다. 지금 대답하면, 어쩌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 말 것 같다.

 

 

5. “지금 가져갑니더~!”

미카는 빨래더미를 안고 종종거리며 뛰었다. 정식 손님이 아니라 연금술사인 슈에게 딸려 온 식객에 가까우므로, 작업이 끝난 저녁이면 잡일을 도우며 어느정도 밥값을 해야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택 본관에서 빨래를 받고 빨래방에 가져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하늘은 뉘엿뉘엿 붉은 놀이 지고 있었다.

“히야아, 예쁘구만…….”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저녁 시간을 알리는 성당의 종이 친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수도원과 주교는 힘을 잃은지 오래이니까.

흐로닝언, 북부의 상업도시. 이곳에는 예로부터 큰 강을 끼고 상인들이 모여들어 길드를 형성했고, 발달한 시장만큼이나 상인들이 인맥을 과시할 예술가와 후원을 원하는 학자들도 모여들었다. 배 몇척에 이국의 향신료와 공예품을 가득 쓸어모으는 거부들이 금팔찌를 반짝거리고 모피코트를 펄럭이는 대신, 자신이 후원하는 후원인의 성과를 휘두르는 도시. 그런 의미에서 연금술사 슈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거상 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이 도시에서 종교나 신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곳의 신에 가까운 것은, 오히려…….

“거기 서서 뭘 하고 있니?”

옆을 돌아본 미카는 화들짝 놀라 빨랫감을 떨어뜨릴 뻔했다. 겨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부여잡고 눈앞의 남자에게 꾸벅 인사할 수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꺼!”

“후후, 그렇게 격식 차릴 건 없잖아? 슈 군의 제자였지? 그렇다면 나에게도 손님인 셈인걸.”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말하는 본인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을걸. 그렇게 생각하며 미카는 환하게 웃었다.

“이름이 뭐였지?”

“미카. 미카입니더.”

“성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눈을 굴리는 미카에게 금발의 도련님은 온화하게 웃었다. “자네에게는 성이 없었지? 그래, 제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아이를 슈 군이 주워 왔다고 들었던 것 같네. 그래도, 슈 군도 보기보다는 배려심이 부족하구나. 성 정도는 붙여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응아아, 지는 괜찮습니더. 내 같은 사람한테 성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꺼.”

“글쎄, 미카 군. 내 생각은 다르거든. 사람은 달라질 수 있어. 출생이 비천해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귀한 몸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자네도 모처럼 예쁜 얼굴로 태어났는데, 흐로닝언의 연금술사의 제자 쯤이나 되어서 이런 꼴이라니 슬프구나.”

“지랑 스승님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예.”

미카가 더는 눈치 보지 않고 대답하자 도련님은 눈을 휘며 웃었다.

“맞아, 미카 군. 특히 자네의 스승님에게 관심이 많아……. 슈 군은 어쩐지 나를 경계하고 있지만, 나는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연금술의 성과는 아직일까?”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더. 스승님, 완벽주의에 사소한 오차도 넘어가지 못하고, 귀찮은 성격이니까예.”

“후후……. 그 점에서는 나와 생각이 맞는구나. 하지만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지. 그 나이에 이미 다른 연금술사들이 이룬 업적을 뛰어넘는 천재이면서, 젊고, 곱상해. 지나치게 결벽적이고 오만하지만 그것마저도 이목을 끌 만한 태도지.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말이야.”

“스승님이예? 지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 사람은 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깁니더. 저번에도 밤을 새다가 문서 위에 커피를 엎을 뻔하지 않았습니꺼. 지가 잡아다 놓았으니 망정이지예.”

그렇게 말하자 도련님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다가, 미카의 귓가에 얼굴을 숙였다. 숫제 어린아이가 비밀을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미카 군.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을 알고 있어. 자네는 슈 군을 처음 만났을 때 앙상하게 굶주려서 길바닥을 헤매고 있었지. 궁금해서 조금 알아보았어, 물론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자네는 그 눈에 띄는 눈동자와 반반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이용당했겠지. 사람이 모인 도시, 온갖 장사치들이 욕망을 따라 도착한 곳. 자네는 이 도시의 길바닥에서 온갖 더러움을 보았겠지. 얕보일수록 착취당하고, 아래에 있을수록 짓밟힌다는 걸 알겠지. 그렇게 버려졌다가 도련님에게 거두어졌으니, 얼마나 욕심이 날까. 처음 입어본 좋은 옷이, 양껏 먹을 수 있는 식사가, 가슴에 단 금장식이……. 하지만 슈 군처럼 처음부터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만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의 열망을 모르는 거야. 그러니 나를 도와줘, 미카 군. 자네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

황금빛의 저녁놀을 머리 뒤에 이고, 금발의 도련님은 천사처럼 웃는다.

“슈 군이 어서 무엇이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줘. 그가 집착하는 수준의 학문이 아니어도, 바깥에 선보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아. 나는 그를 선보이기 위해 데려왔어. 내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걸 알았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네가 내 소식통이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지원해줄게. 희귀한 재료나, 작업 도구나, 무엇이든 좋아. 아니면 자네에게 좋은 옷이나 식사나, 금이라도 가져다주지.”

“하지만 말입니더. 스승님 같은 사람이 도련님 뜻대로 따라드릴까예? 스승님을 연회의 장식품으로 쓰겠다는 거 아닙니꺼. 그 사람은 연구밖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예.”

“확실히 그는 결벽하지만, 연회의 늙은이들도 한때는 꿈으로 빛나는 청춘이었어. 놀랍지? 결벽한 사람일수록 유희와 권력의 맛을 보면 더 큰 욕망에 빠질 수 있다는 거야.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자네는 그저 슈 군이 무엇이든 성과를 내도록 도와주면 돼.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문을 휘어잡을 적기거든……. 이미 소문은 내 놓았어.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은 진리와 황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이 도시 최고의 천재는 슈 군이지……. 잘만 되면, 자네는 이런 빨래 따위 할 필요 없이 평생 좋은 식사와 황금에 둘러싸여 탄탄대로를 걷게 될 거야. 슈 군의 제자라는 이름보다도 훨씬 빛나는 영예 속에 살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미카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튼, 스승님이나 도련님이나 높으신 분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모르겠습니더……. 하지만, 좋습니더. 그러면, 방에 설탕 한 포대만 전해주이소.”

“설탕?”

“스승님이 연구하다가 자꾸 단 걸 찾는다 안캅니꺼.”

“그런 거라면, 우리 집에서 최고의 요리사들에게 디저트를 부탁하면 되는데.”

“그런데 사람이 또 입을 가려서, 아무거나 안 먹고 설탕으로 막 녹여 만든 과자나 찾는 깁니더. 그래서 그냥 지가 계속 만들어 줄라꼬예.”

 

 

6. 빨래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자 의자에 앉아 있던 슈가 벌떡 일어났다가 민망한지 미카에게 되려 잔소리를 했다. “이제야 들어오는 거냐. 조금이라도 빨리 자야 좀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게다.”

“헤헤, 내가 미안타. 오늘따라 손님이 많은지 일이 많대~.”

“쯧. 누구와 놀아나고 있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꼴은 뭐냐. 물에 젖은 생쥐 꼴이로구나.”

“아. 아까 빨랫감을 쏟다가 물이 확 튀어버린기다. 이런 거 좀 냅두면 마르니께…….”

“안그래도 비쩍 마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벗어라.”

“에, 에, 여기서~?”

“그럼 어디서 말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뜸 들이지 마라.”

미카가 쭈뼛거리며 상의를 벗자, 슈는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 미카의 몸에서 물기를 살살 닦아냈다. “이것 봐라. 물기가 다 남아있지 않느냐…….” 그리고 제가 입고 있던 모피 외투를 벗어 미카에게 걸쳐주었다. 졸지에 큰 외투를 벗은 몸 위에 뒤집어 쓴 미카가, 외투 결을 살짝 쓸어보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드럽다. 미카는 부드러운 외투 자락을 들어 뺨에 대어보았다. 기분이 좋아 얼굴이 붉어졌다. 외투 자락을 양손에 꼭 쥔 미카가 슈에게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은 성공하고 싶나?”

“성공이라…….”

한참 창밖을 내다보던 슈가 입을 열었다.

“하고는, 싶지. 너도 언제까지 그 꼴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나처럼 연구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 옆에 붙어 있어서야, 길이 없지 않겠느냐는 게야. 네가 진정으로 연금술에 관심이 있다면, 나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와 함께 이곳에 묵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지어낸 자리에 불과하지 않느냐……. 너를 언제까지고 시종처럼 부릴 수는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성과를 내어서 재물을 얻어야겠지. 모처럼 근방 최고의 거상에게 후원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네게 계속 예의와 지식을 가르치고, 형편없는 몸에 살을 찌워서 제대로 선을 보일 생각이다. 좋은 혼처를 얻어서 그곳의 성을 받으면, 지금처럼 무시당하거나 험한 일을 할 필요도 없겠지. 안 그러냐, 미카?”

옅은 보랏빛 눈이 휘어져 웃고, 큰 손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미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스승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슈가 무안한지 눈을 돌린다. 고개를 돌리고 드러난 뒷머리 사이로 보이는 귀 끝이 살짝 붉었다. 미카는 몸을 움츠리는 슈에게 바짝 붙어서, 품 속에서 주섬주섬 종이 꾸러미를 꺼냈다.

“저기, 스승님. 이거 아까 부엌에 빨래 갖다주면서 얻어 왔다. 말린 과일인데, 내 없고 입 심심할때 좀 먹어 도.”

“아무튼, 쓸데없는 짓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카가 손을 들어 슈의 입에 붉은 과육을 집어넣었다. 슈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맛있제?”

“먹을 만, 하구나.”

“헤헤, 마리아 누나가 내 이뻐해서 주방 쪽 지나가면 자꾸 뭘 챙겨주고 그래. 내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잡일하는 거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라. 오늘은 어땠냐면…….”

조잘조잘 떠들다가 눈을 드니, 슈는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창 밖에서 달빛이 들어온다. 미카는 슈의 감은 눈매가 얇은 초승달 같다고 생각했다. 달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춤을 추게 한다고 했던가,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밝은 태양은 아니어도, 사람을 괴롭게 하고 망치는 광기일 리도 없다. 오히려 좀 다른 것에 가깝지 않은가.

 

 

7. 아직 달도 흐릿한 이른 새벽이었다. 온 몸을 천으로 감싼 사람이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걷는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복도를 헤매지도 않고 익숙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집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는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연금술사의 작업실 앞이었다. 그는 옆을 두리번거리다가 품 안에서 열쇠를 꺼내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후드를 벗었다.

작업실의 한가운데에 아직도 약한 불로 끓고 있는 솥이 있다. 그는 증류중인 솥에서 용액을 떠내어 시약을 따랐다. 용액이 뒤섞이며 붉은 빛과 푸른 빛이 일렁이며 번쩍이기 시작한다. 증기가 피어오르고 부연 방 안에서 노랗고 푸른 눈동자만이 빛을 받아 빛난다. 푸른 불꽃이 튀기 시작하더니, 불이 일었다. 시약이, 관이, 방 전체가가 푸른 빛으로 빛난다. 미카는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불빛을 바라보다가, 품 안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하얀 가루를 손가락 끝에 찍어 혀로 핥았다.

“다네.”

미카는 망설임 없이 종이를 뒤집어 설탕을 증류액 위에, 그리고 관에 쏟아넣었다.

“스승님은 틀리지 않았다. 스승님은 진짜 천재니께. 내도 수식을 확인해봤으니 안다. 그리고, 내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삽시간에 모든 빛이 땅거미처럼 사라졌다.

“스승님이 말하는 진리는 대체 무얼까? 도련님이 원하는 건 무얼까? 영광과 영예? 훈장이나 금 장식, 황금과 칭송? 그런 게 진리일까? 내는 잘 모르겠다.”

방 안에 남은 빛이라고는 희미한 달빛과, 달빛 아래 아이처럼 웃고 있는 미카의 눈동자 뿐이었다.

“내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어. 처음부터 찾아낸 후였다. 그건 설탕처럼 달고, 꿀타래처럼 붕붕 뜨고, 불꽃처럼 어쩌지 못하고 사방에 튀는 거다. 우리가 늘 함께 있고,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곳을 보면서 머리를 맞대고 수식을 고민하는 거다.”

방 안을 가득 울리는 어린 목소리가 흡사 오래된 노래나 예언 같았다.

“스승님은 천재야. 알 수 있다, 빛이 나니까. 하지만 어리석고 순진하기도 한 기다. 진짜 진리, 학문, 영원……. 그런 것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도시에는 아무도 없다. 진리 같은 거에 가까워질수록 말이야, 노리는 이빨에 뜯길 뿐이라고. 스승님은 망토를 두르고 은관을 쓰고, 저 큰 홀에서 매일 열리는 연회에 상품처럼 전시되겠지. 그리고 아무도 스승님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다.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렇다고, 이런 걸 말할까. 이 더러운 도시에서 제일 빛나는 내 스승님에게. 내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카는 슈의 방 쪽에 들렀다. 창가에 놓인 침대 위로 곧게 누워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슈의 얼굴이 보인다. 미카는 창을 밀어젖혀 슈의 얼굴 위로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이 창백하게 마른 뺨 위를 헤맨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말을 하면, 대답할 것 같았다. 미카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 자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진리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진리는 손 안에 얻지 않고 추구하고 있기에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연구에 몰두하는 슈의 모습을 보면서 미카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미카는 진리의 이름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빛나고 있으므로. 두근거리는 심장에, 언뜻 느껴지는 체온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남 몰래 소리 죽인 비밀에, 이러한 매일에.

“잘 자, 스승님.”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오늘도 진리는 달빛 아래 스미듯 묻힌다.

 

 

1.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다. 한 스푼 설탕과 진리를 맞바꿀 수 있는 어린 연금술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