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병

#주간_미카슈 주제 : 애정
슈그녀 기반의 미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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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 슈는 작은 것들을 좋아한다. 키가 작고 채 팔다리가 여물지 못한 어린아이. 조밀하게 잡아 실을 박은 공단 프릴. 가느다란 은사를 정교하게 엮은 토션 레이스. 그 얼굴 안에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도자기 인형. 바람이 훅 불거나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작고 가볍고 바람에 쉽게 흩날리는 것들.

본래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고 존재가 흐릿해서 곧 사라지더라도 크게 이목을 끌지 못할, 금방 사라질 것들을 사랑하는 습관. 카게히라 미카는 그런 습관은 질병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약한 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게 되고, 가치 없는 것에 집착한다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랑하는 것이 스러질 때마다 상처받고. 그런 식으로 인생에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이라면 애정보다는 질병에 가깝겠지.

아마도 이 질병은, 전염성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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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를 동경했더니 털을 벗고 작은 고양이가 된 꼴이었다. 그것도 처량하게 울며 길을 떠도는 고양이. 동경해 올려다보던 사람을 곁에서 보살피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가령, 금발머리의 여인을 작고 소년 이츠키 슈가 얼마나 사랑했는지의 여부 같은 것들. 어린아이의 부인에 대한 짝사랑이라니 흩날리는 눈송이보다도 의미없는 것이었을 텐데, 이츠키 슈는 이렇게 멀쑥하게 커서 끝끝내 그녀를 자신보다 훨씬 작은 존재로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새싹이 고목이 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거대하게 자라난 사랑. 일생을 꽉 메운 그런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 따위는 정말로 눈송이처럼 사소한 것이 틀림없어서, 카게히라 미카는 가끔 사랑하는 상대에게 묻고 싶어졌다. 스승님, 스승님은 이런 걸 어떻게 견뎠어?

그해 겨울은 혹한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부쩍 추워진 탓에 슈의 몸상태가 좋지 못해서 ― 물론 날씨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더 클 거라고 미카는 짐작했다 ― Valkyrie의 연습은 한참이나 소강상태였고 두 사람은 수예부실에서 모포를 덮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슈는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옆에 두고 홀짝이며 의상을 만들고는 했고, 미카는 차를 끓여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게나 섬세하고 부서질 것 같은 사람인지 이전에는 몰랐지.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사랑하는 병이 옮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카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바느질에 열중한 스승님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도중 슈가 갑자기 옷감을 탁상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을 반쯤 열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해 창문 밖은 흰빛이 완연하게 빛나는 설국이었다.

“얼레, 언제 이렇게 눈이 내렸대. 스승님 눈싸움 좋아하나?”

“별로.”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아는 사람의 장례식날, 눈이 내렸어.”

그렇게 말하며 슈는 아까까지 바느질을 하던 손가락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눈송이가 붉은 손끝에 스치다가, 체온에 닿아 곧 녹아내린다.

“그때도 꼭 이렇게 폭설이었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묘소에서 장례 절차를 밟는 데 애를 먹었어. 세상 모든 게 서럽더군. 눈 따위가 펑펑 내려서 그분의 장례를 방해하는 것도 서럽고,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어버린 것도, 내 기원이 조금도 닿지 못한 것도 서럽고……. 그리고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오후가 되어서 햇빛이 내리쬐자 눈이 또 금방 녹아버린 것도 서럽더군. 처음부터 내 마음은 덧없는 거였구나. 보답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나 혼자 바라보고 기리고 싶었는데, 그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거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전부 눈처럼 허망하게 녹아버린 거였구나.”

눈에 반사되는 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얼굴로 뇌까리는 낯빛이 창백했다.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슈는 멍한 표정의 미카를 돌아보고는 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잔뜩 횡설수설했군. 이렇게 말해봐야 너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잊어라.”

“그치만, 스승님.”

미카는 이를 악물었다.

“눈도 오래 쌓이면, 얼음이 되잖나. 무게가 실리면, 가지가 부러지거나 천막이 무너지거나 하기도 하고.”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덧없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하면 어때. 눈이 많이 내렸으면, 누군가는 그 흔적을 좇아갈 수도 있는 거잖아. 스승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말을 마치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해받을 리가 없다. 이 마음은 부인을 사랑하는 아이만큼이나 처량하고 손끝에서 방금 녹은 눈송이만큼 덧없는 것이다. 십년간 외사랑을 간직한 사람에게 고작 한두 해 곁에 있던 사람의 마음이 닿을 리 없다. 내게는 녹지 않는 폭설이지만 당신에게는 작은 눈송이일 뿐이겠지.

바라보는 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있을까. 알리고 싶었다.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적어도 응답을 느끼고 싶었다. 눌러둔 마음과 함께 욕심이 가슴 속을 뭉텅뭉텅 비집고 나왔다. 몇 년이고 당신을 지켜본 내 무게는 이제 당신에게 조금쯤 얹혔을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미카는 겨우 눈을 들어 상대의 표정을 확인해 보았다.

슈는 웃고 있었다.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이. 눈매가 둥글게 휘고 청보랏빛의 눈동자가 빛나고 둥글게 올라온 뺨이 발갛다. 감사와 연민과 감탄이, 뭉근한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 오롯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눈앞이 아찔하고 눈시울이 뜨거워 미카는 눈을 들었다.
창 너머로 잔뜩 쌓인 눈의 무게에 휘어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그 추운 겨울에는 못된 전염병이 돌았다. 서로를 연민하고 사랑하는 병이 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