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일지

1. 미제(謎濟)

로쏘라는 남자는 뼈에 스미게 현실적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모든 상태와 이치는 공식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런 남자에게 그녀는 신비를 말했다. 이미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 있지만 없는 것. 그게 바로 나야, 로쏘. 반듯한 이 세상에 바이러스와도 같은 그녀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손으로 껴안거나 입술을 댈 때면 로쏘는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감각’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놀라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얻은 몸, 실체가 없는 몸. 그런 몸의 그녀에게는 고통도 쾌락도 반 푼짜리였다.

있거나 없는 몸에 체류하는 감각들에 그녀는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그도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혔다. 그녀는 극도의 쾌락 혹은 극도의 고통만이 겨우 의미를 가지는 그런 몸을 가졌고 그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순순히 협조해 영상을 취했다.

레지멘트 부지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로쏘는 혼자 우산을 썼다. 그녀에게는 빗방울의 차가움이나 신체의 건강 따위는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음이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자욱 질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쏘는 옆에 함께 걷는 여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척하지만 자꾸만 흘끔흘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빗방울이 똑 똑 떨어져 흐르는 그 목덜미.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그녀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길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이 교차하고, 눈앞의 남자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로쏘는 마주하고, 그는 그녀의 기대대로 당황하는 대신 눈썹을 찌푸리고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문득 느낀다. 감각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 푼어치 몸에 지금 닿는 빗방울이 지나치게 춥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하게 연구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그들은 평범하게 함께하고 평범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반 푼짜리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아이를 좇는 어머니의 망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로쏘와 함께하고 예전에 어느 남자와 그랬듯이 연애하고 핀잔을 주고 함께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입을 맞추고 연구를 하다가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그는 머쓱하게 검은 턱시도를 입고 식을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를 하고 신랑의 얼굴이 붉어지면 너도 사랑을 할 줄 아냐고 모두가 그를 놀렸겠지.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그녀에게 진심이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녀도 신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쾌락은 진짜배기고 어쩌면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건강했을 수도 있고 건강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로쏘는 결코 마르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안다. 알기에 슬프다.

그리고 망상의 효력은 잠시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 그녀는 우산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실체를 드론 속으로 숨기고 투영된 몸이 드론 안으로 사라지면서 찰나의 생각도 죽었다. 그 남자가 희구하는 것이 원래 그런 반 푼어치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우산을 내리고 한숨을 쉬며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힌다.

 

 

2. 가설(假設)

로쏘에게 행운이나 불운 따위의 개념은 본디 큰 의미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는 우수하고 남은 상대적으로 지루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그저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받아들이기 따라 행운일수도 불운일수도 있었다. 타인과 궤를 달리하여 동떨어진 수재의 이야기는 이미 흔한 소재거리였기에 로쏘는 이에 관련하여 한껏 감정을 부풀리려는 시도는 진작 그만두었다.

다만 그는 그때그때 스스로 마음 가는 대로 연구하고 탐구했다. 굳이 만족이냐 불만족이냐 따지자면, 로쏘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다. 연구 소재를 직접 채취하여 탐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고, 본래는 금지된 자료에 대량 접촉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귀중한 연구거리도 있었다.

그러므로 탐구의 대상에는 가령, 이런 것들도 있었다; 이세계의 코어 생물은 체내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혹은, 임의의 생물체를 코어 생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코어화된 생물의 관심과 욕구는 죽은 순간의 상태로 고정된 것인가. 과연 동일한 관계성을 가진 존재가 새로 생긴다면, 피붙이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애착은 대상을 바꿀 것인가.

그러나 로쏘는 이 가설에 대한 입증 시도는 그만두었다. 어찌됐든 눈먼 애착의 대상이 아이에서 아이로 변하는 것뿐. 예상 가능한 결과에서 아무런 실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론이 자명한 실험은 시시하고 부질없었다. 못마땅했다. 삶에 모든 인간과 생물을 연구 대상으로 두어 무심했건만 정작 생물도 못 되는 것이 못마땅하고, 안쓰럽고, 끔찍스러워.

 

 

3. 실례(實例)

옛날 어느 구루(Guru)가, 세계를 폭파시켰다.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흥미를 가진 지가 이미 한참이었다. 지금 로쏘는 기어코 바로 그 구루의 앞에 있었다. 메르키오르를 만난 로쏘는 그가 궁금해 마지않던 독창적인 발상의 동기에 대해 들었다. 구구절절 케케묵은 옛 이야기들이었다.

“그 모든 성과가 한낱 여자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했다는 건가.”

언제나 표정이 미미하던 노인이 이 순간 얇은 입꼬리를 밀어 올린다. 기괴하게 늙은 얼굴 가득 주름이 진다. 명백하게 비웃음이다. 로쏘는 그만 비위가 확 상해버렸다.

 

 

4. 해(解)

욕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너무 말도 안 되게 커서 그는 구태여 감정의 크기를 쟀다. 그리움 한 줌, 열망 세 컵, 질투 일곱 톤.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수치들은 한없이 무한대에 수렴하고 무한의 값으로 공식을 도출했을 때 구해낸 해의 이름은 사랑. 이제 의미 없어진 고리타분한 측정치를 구깃구깃 손에 쥐고 그는 정량 없이 긴 한숨만 내쉰다.

아무리 사료를 뒤적거려도 사랑의 문제는 불가해라고만 쓰여 있었고 그녀는 불가해답게 생물도 아니 되는 것이 생물의 흉내를 냈다. 그의 곁에서 웃다가,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반쯤 뜨고,

“로쏘.”

“왜.”

“나는 답을 찾고 싶어. 진리를 구하고 싶어. 당신도 그렇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그래.”

여자는 망령처럼 소망을 읊조리고 남자는 망령을 닮아갔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신도 악마도 진리도 망집도 버러지도,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황혼녘 판데모니움

<step>

“춤을 춰요, 레드그레이브.”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선율에 맞춰 한참을 그림처럼 휘몰아치던 두 사람의 스텝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끝났다.

“언제나 완벽해. 훌륭해, 레드그레이브. 그렇지만 역시 난 이 쪽이 좋네.”

말을 하곤 그라이바흐는 장난스럽게 레드그레이브의 뺨을 잡았다. 레드그레이브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거?”

“그거.”

이어진 것은 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스텝이었다. 그것이라고 지칭은 했지만 그저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 장난처럼 연습하곤 하던 자기들만의 몸동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인지 곧 발이 엉키고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의 품 위로 쓰러졌다.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빙결>

레드그레이브는 겨울이면 기상조절장치를 한 달에 다섯 번쯤 고의로 조작했다.

눈이란 것은 사실 효율적인 기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흩날리는 눈발 속에,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라고 고하는 순간이,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속으로 온 세상이 묻히고 절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녀의 진심 담긴 허언이 세계로부터 차단되는 그 순간이.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 보지만 곧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꺼버리는 그 시절이.

레드그레이브는 오랜만에 눈발을 낚는다. 들고 온 사진은 판데모니움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되었고, 지상은 그의 의지대로 오토마타로 다시 차고,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손끝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하얗게 웃었다.

이거 봐,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A possibility

#1. 연구자

2700년대, 황혼의 시대에 한 소년이 생각했다.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소년은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1400그램 남짓한 자그마한 뇌 속에서 세상 모든 가능성을 가늠하도록 만들어진 소년의 머리는 필요 이상으로 영특했으나 그 심장은 심약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가지 쳐 뻗어나는 무한한 가능성이 그 마른 몸을 짓눌러갔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다종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중 최선이라 할 수 있을 단 하나를 고르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았다. 그에 반해 위협은 바다처럼 도처에 산재하니 무릇 인간이란 이런들 저런들 저의 삶에서 멍청이가 될밖에 없다.

숨을 죄는 좌절과 무력감 속에서도 소년이 가장 겁을 내는 것은 ‘죽음’이었다. 소년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주와 인간, 신경의 구성 원리를 지식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소년은 세포와 단백질, 분자와 원자로 구성된 한 유기물이며, 영장류라는 특정한 생물의 종 가운데 하나의 개체이고 또한 그 종족의 발전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느 날 어느 시를 기하여 소년의 숨이 멎어 사라진다 해도 우주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달리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렇지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면 곧 세상이 흐려진다. 소년의 숨이 멎으면 지금 하고 있는 사고가, 온 세상을 인지하고 있는 의식이 죽고 이 세상이 따라 죽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처음 떠올린 순간부터 소년은 늘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아무에게나 쉽게 말할 수 없는 발상인 것 또한 마음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홀로 앓아가던 소년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은 오로지 소년 자신의 의식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자신의 세상의 신이었다.

그는 모든 가능성은 사람의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극물과 함께 상자 안에 들어간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여부는 누군가 상자를 열어봤을 때에야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시점으로부터 인과가 뻗어 나가 구성된 세계를 그 주인 되는 관찰자가 인식하고 관측함으로써, 가능세계의 무한의 가능성 중 하나가 비로소 그 의미를 피워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무가치했던 이 세계의 이야기 또한 불특정한 당신이 들음으로써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죄를 낳을 만큼 아름다웠던 세계의 통치자가 그녀의 연인을 바꾸었던, 이 단 한 번 존재했던 희귀한 가능성의 세계의 이야기도,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조금이나마 그 끊어진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리 믿는다. 잠깐의 유흥거리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자, 이러한 사유를 처음 시작했던 겁 많은 소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앞서 기술한 깨달음을 처음으로 얻었을 때, 멜키오르는 아주 신이 나서 날뛰었다. 어찌 즐겁지 않으랴. 단 하나의 실마리로 인해 멜키오르는 우주의 먼지와 다를 바 없는 무가치에서 한 세계의 신이 되었다.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인식의 전환이지만, 바로 그 전환 또한 멜키오르 자신의 사유로 인해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실증이 아닌가.

그렇다고 멜키오르가 저만의 세계에 마냥 안착하고 귀를 닫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당위를 얻은 멜키오르는 이제 실재를 원했다. 이 세상의 모든 가능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자신은 세계의 신으로서 그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존재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멜키오르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이었다. 모든 선택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멜키오르는 한 세계의 주인에 걸맞은 자가 되고 싶다는 ‘원인’으로부터 도착할,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결과’를 물색했다.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상은 바로 곁에서 숨 쉬고 있었으니.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겁 많은 그를 항상 어르고 돌보는 형이 있지 않은가.

그라이바흐로 말하자면 타고난 지휘자였다. 그는 언제나 그 섬세한 손가락 끝으로 작품을 자아내고 이끌었는데, 이 작품에는 그가 담당하는 분야인 오토마타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그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그랬고 미래가 그랬다. 남다른 발상과 사고력을 지녔지만 유난히 겁이 많고 수줍은 동생 멜키오르 또한 그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이보다 더 멜키오르가 생각하는 ‘자신의 세계의 신’에 가까운 인물은 또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라이바흐의 외적인 부분을 흘깃흘깃 훔쳐보았다. 당당한 품새를 보며 구부린 어깨를 펼치고, 자신의 관심사를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대신 상대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생각보다 놀라울 만큼이나 쉬웠다. 그도, 손쉽게 그라이바흐가 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같은 연구소의 시험관에서 배양된 형제였을 뿐더러, 늘 같은 상을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무조건적인 모방이 편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다음에는 생각을 가져갔다. 그라이바흐는 자타공인 멜키오르의 보호자였으며 그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하는 내밀한 친우이기도 했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가 사석에서 형제와 나눈 현안에 대한 견해, 그리고 사물에 대한 심미안을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자신의 것인 양 말을 했다. 한 번 말을 가져다 나를 때마다 멜키오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이 한층 겨워지는 것과 같이 느꼈다. 그리고 소년의 세계의 위상은 한층 드높아졌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멜키오르는 연구소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훔쳤다. 그러면서도 동작이 초조하기는커녕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연이은 성공에 도취한 멜키오르는 제가 선을 넘는 줄도 몰랐다. 그저 그는 원하는 결과에 다다라야만 하니 그 결과를 가져왔고, 같은 이야기가 두 보고서에 쓰여 있는 것은 이상하니 당연하게 원본을 지웠을 뿐이다. 그러니 그라이바흐가 찾아왔을 때도 멜키오르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직시하지 못했다.

“네가 훔쳐간 것을 돌려받기 위해 왔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라이바흐의 방금 말로부터 멜키오르 자신이 붕 떠서 유리된 듯했다. 모든 것은 잘되어가고 있었다. 그라이바흐를 따라 하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나? 도둑질이라고 표현될 만큼? 그러나 반사적으로 변명을 내뱉던 사고는 빠르게 현실을 깨달아갔고 멜키오르는 숨이 막히는 두려움에 파랗게 질렸다.

사실, 멜키오르가 정말로 저가 잘못하는 줄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다. 이 소년은 수백 년이 흐르는 시간까지도 자책과 자기 정당화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유약한 존재이니까.

“화가 난 게 아니야. 멜키오르. 우리는 형제야. 다만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질식할 것 같은 얼굴의 멜키오르에게 그라이바흐는, 정말로 화내지 않았다. 그 대신 모자란 동생을 타이르듯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가 잘못한 것, 훔쳐간 것, 행동 말투 그리고 생각 하나하나까지. 그라이바흐는 그 증거물을 직접 가져오지는 않았으되, 멜키오르가 몇 분 몇 초에 어디에 몰래 숨어들어 갔는지 하나하나 서술함으로써 웅크린 멜키오르에게 상냥하게 목줄을 채웠다.

“언제나 말하지만 멜키오르, 너에게는 놀라운 재능이 있어. 나는 가지지 못한 무서운 집중력이나, 번뜩이는 발상 같은 것들 말이야. 네 본유의 소중한 가치를 더욱 아꼈으면 해.”

본래 자신이 가진 특성을 두 번 다시는 따라 하지 말라는, 완고한 거절이었다.

자신의 방에 돌아와 홀로 앉은 멜키오르는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동경하여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했으나 돌아온 것은 그 대상으로부터의 타박과 매도였다. 차라리 그라이바흐가 남들 앞에서 멜키오르의 치부를 폭로하고 모욕했다면 그 섬약한 마음이 복수의 감정으로 부끄러움을 불태워 마음 깊은 곳은 편안했으리라. 그러나 비밀로 남은 죄의 증거가 은근한 협박이 되어 그의 작은 체구 위에 무게로 얹혔다. 그 무게로 인해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의 앞에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멜키오르의 가능성에는 사슬이 매였다. 차라리 용서를 빌고서 조금이나마 죄악감에서 벗어나 떳떳해졌으면 좋았으련만, 모든 가능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어진 그의 신경 체계는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세심했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가 자신에게 어떤 속박을 걸었는지 알았고, 그라이바흐 또한 다시금, 아니 전 이상으로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멜키오르에 대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으면서 형제에게 이제 괜찮다 말해주지 않았다. 더 이상 그라이바흐는 일거수일투족을 멜키오르와 함께하지 않았다. 홀로 혹은 따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혹시 그라이바흐가 이 때문에 레드그레이브와 맺어진 것인지, 혹은 레드그레이브와 시간을 보내느라고 더욱 멜키오르와 소원해진 것인지는 아직 멜키오르에게는 관측되지 않은 상자 속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멜키오르는 속으로 형이 자신을 용서하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그라이바흐를 원망했다. 스스로 다시 생각해 자신을 허락할 수도 있었으련만, 내내 그렇게 움츠러든 채였다. 친우이자 형제에게 거부당한 멜키오르는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나 유약하고 방자한 사람이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신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가련한 신이 그 세상의 유일한 사랑을 마주쳤을 때, 그 사랑이 축복인 동시에 저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녀는 완전이고 영원이었다.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의 미소를 보며 멜키오르는 넋을 놓고 웃다가 그 입가에 미소가 가시면 진저리쳤다.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리다 테이블 아래로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잡고 있는 그라이바흐와 얼굴이 마주쳤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만은 훔치지 않았다. 훔칠 수도 없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라이바흐는, 이번에도 화내지 않았다. 상시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지금은 생각 외로 따뜻했다. 조금 짜증이 어린 것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구제불능의 형제를 따스하게 동정하며 웃고 있었다. 멜키오르는 말을 더듬으며 급히 작별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뛰쳐나갔다. 토기가 올라왔다. 허공에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위에서 신 내가 올라올 때까지 거듭했다. 그래도 가슴에 엉긴 고름은 떨어지지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거부된 마음은 그렇게 터질 듯이 쌓이고 응고되어 고름이 되었다. 자신을 대하는 레드그레이브의 얼굴에서 동정 비슷한 빛이 눈에 띄면 그 위로 그라이바흐의 조소가 겹쳐 올라왔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여신은 나를 진심으로 신경 써주는 걸까, 역시 이 마음을 눈치채고 있지 않을까, 혹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한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가지 쳐 자라날 때마다 감정은 숭배와 혐오의 극과 극 사이를 위태롭게 기우뚱했다. 레드그레이브가 말을 걸면 멜키오르는 수줍어 고개를 숙이면서 속으로 그녀를 열두 번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고름은 터져나가 인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 멜키오르는 마침내 여신을 그 손에 넣었다. 어떤 수단으로 그러했느냐, 그것은 아직은 그렇게 중요한 기록이 아니다. 간략하게 기술하자면 그는 유리병에 담은 편지를 바다에 띄우며 사랑하는 이에게 닿기를 바라는 소년처럼, 가능성의 배를 띄우고 그 선실에 자신의 운명을 위탁했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데다 움츠러든 그는 자기 세계의 여신에 대하여 어떤 것도 직접 바꾸려고 시도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었기에.

실패한 사랑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과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다. 그것이 순리다. 이것은 또한 하나의 시작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 아직은 그렇게 중요한 기록이 아니다. 지금부터 보고자 하는 것은 아이를 먼저 낳고 나서 이어진 사랑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응당 자신의 연인이어야 할 여인을 거대한 의지에 빼앗긴 한 남자가 어찌 그 아슬아슬한 정복욕의 고삐를 놓치고 날뛰었는지, 그리하다 결국에 무엇을 낳았는지의 기록이므로.

 

 

#2. 통치자

어쨌거나 그렇게 하여 만인을 굽어보면서도 그들이 사는 세계의 안녕을 위해서는 제 몸이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통치자가 완성되었다. 그러니 엔지니어들의 갸륵한 계획은 레드그레이브라는 단일 개체에서만큼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성공이 재앙을 낳았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 내재한 한계일지언정 말이다.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향내가 나지만 꿀이 없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를 빚었으니, 이 여자로부터 비롯된 가능성으로 사람이 미치고 세계가 미치고 신이 미쳤다.

 

 

#3. 예술가

그러므로 레드그레이브를 처음 만나고 날짜가 채 바뀌기도 전에 그라이바흐는 알았다. 이 소녀가 자신이 부품을 짜 넣는 세계를 떠안을 나머지 왕관의 주인, 수술의 씨앗을 받을 암술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라이바흐의 심미안은 예사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날카롭다. 설령 그녀가 왕관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자신이 그렇게 만들면 된다. 지금까지 삶에서 추구한 모든 가치보다 가장 아름다운 꿈을 드디어 목도한 순간이었으니, 늘 하던 대로 손을 뻗어 꺾는 것만이 남았다.

 

 

#???

소녀는 더없이 아름다운 꿈에 살고 있었다.

마스터가 나가고 소녀는 저택에 혼자 남았다. 연구실에 가만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다가 볼을 푸 부풀리고 문을 나섰다. 이윽고 정원에 도착해서는 꽃잎에 코를 박고 꽃의 빛깔과 향기를 연결해 보다가 자신과 똑같이 꽃잎에 코를 박은 나비를 발견했다. 소녀는 나비를 쫓았다. 햇빛을 받으며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다가 그것도 지루해졌다. 개를 닮은 오토마타를 껴안고 마당을 뒹굴었다. 큰 분홍색 리본과 타이즈에 흙이 묻어 더러워졌다. 심심했다. 그래도 기다릴 수는 있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