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그녀에게 가진 감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살가드는 세상을 통괄하는 자에 대한 경의라고 말할 것이다.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다른 수천수만 가지의 답변도 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녀에 대한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내리라고 한다면 살가드는 차라리 그 사람을 와이어로 찢어버리고 도망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판데모니움의 최상부를 군림하는 의회의 우두머리, 기계소녀 레드그레이브를 향한 그의 절대복종을 넘어선 과잉충성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비웃음으로, 누군가는 경멸로, 누군가는 두려움으로 제멋대로 말하고들 했다.

그러나 살가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살가드 자신을 포함해서.

감정은 끝없는 심연처럼 켜켜이 무겁게도 쌓여있지만 시작점을 되짚어 보자면 아마도 살가드가 어려서부터 즐겨 읽던 판데모니움의 기록물이었다. 기록물 가운데는 물론 수백 년 전 황혼의 시대를 평화로 이끈, 생명공학의 진주 레드그레이브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현대의 기술로는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전설 속의 인물. 그런 존재가 판데모니움의 최하층에 태아처럼 잠들어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살가드는 순수한 경의로 가슴이 부풀어 그녀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채 몸도 갖지 못한 그녀의 말 몇 마디에 세계가 진동했으니 정말 전설처럼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리고 만고의 노력 끝에 그녀가 마침내 몸을 얻었을 때, 매끈한 강철의 다리와 팔로 공기를 가르고 걸어 나와 말을 걸었을 때 살가드는 그 몸이 마치 레드그레이브와 자신 사이에 태어난 아이처럼 생각되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생각을 막는 것은 지식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이해하기는커녕 상상할 수도 없는 까마득한 과거, 수백 년 전 황혼의 시대의 존재라는 사실, 그 세월동안 지식을 쌓아온 그와는 다른 수준의 존재라는 사실. 문헌을 관리하는 자로서 응당 가지고 있는 풍부한 지식이 오히려 살가드의 생각을 턱턱 가로막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살가드는 라이브러리안으로 돌아가 적막한 도서관 한쪽에서 황혼의 시대에 관한 기록물을 읽어 내려갔다.

 

살가드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가장 충실한 심복이니만큼 결코 대화가 적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명령에 의구심을 갖거나 반발하기보다는 묵묵히 받드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레드그레이브는 약간은 궁금함이 어린 눈으로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자신의 심복을 바라보았다.

“여쭐 것이 있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전자 보조두뇌를 설치한 레드그레이브에게는 그녀 자신 외에 다른 업무용구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어둑한 방에는 다른 물체 하나 없이 살가드와 레드그레이브 단 둘뿐이었다.

“먼 옛날에는 종교란 것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황혼의 시대 이후, 레드그레이브님의 통치 아래에서 세계가 평화로워지면서 종교는 사라졌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신을 삶의 이유로 삼아 괴로움을 견디며, 신이 있는 까닭에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었다 읽었습니다.”

이어질 질문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며 레드그레이브는 조용히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렇다면, 레드그레이브님이 저에게 있어 신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살가드가 레드그레이브의 보랏빛 눈을 바라보았다. 광택이 없는 까닭에 그 눈에는 한 남자가 그대로 비치었다. 그 안에 다시 눈가에 붉은 눈화장을 한 눈이 있었다. 레드그레이브는 그 열띤 눈에서 의장의 뜻을 대신하는 심복도, 문헌을 관리하는 자도, 무지한 이들에게 차가운 카운실 멤버도 아닌, 20대의 한 청년을 보았다.

어두운 지하에 차갑게 잠겨서 목표만을 되씹던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레드그레이브는 실로 오랜만에 과거를 떠올렸다. 젊은 시절 언젠가 형제와도 같은 이가 보여주었던 그 같은 눈빛이, 그 때의 감정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생생하게 떠올랐다.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