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oboros

1. 판데모니움의 의회와 깊이 연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알고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붉은 머리에 어울리게, 늘씬한 몸매가 돋보이도록 빨간 스틸레토를 신은 미모의 비서. 누구라도 눈이 바로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외모이건만 동공이 길게 세로로 찢어져 있다. 자칫 거부감을 줄 수도 있는 외모적 특성 탓으로 리아가라는 표면에 나와서 활동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의회와 교섭해 본 자라면 의회장 레드그레이브를 늘 곁에서 지키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리아가라를 조금만 지켜보면, 그녀가 겉으로만 화려한 꽃일 뿐 누군가에게 웃음을 짓거나 열매를 맺을 종류의 사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리석게도 누군가 숨 가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가 개인적인 행복에 겨워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또는 자신이 그 행복을 안겨줄 수도 있으리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 엔지니어 모 씨도 그 중에 하나였다.

처음 몇 번은 완곡한 거절과 은근한 무시였다. 의회의 비서로서 리아가라는 결코 레드그레이브의 이름에 누가 될 만한 거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줄곧 마주치던 엔지니어가 종내 그녀의 머리색을 닮은 붉은 색 머플러를 수줍게 내밀었을 때는.

“집무실 온도가 상당히 낮더라고요. 감기 걸리실 것 같아서…”

“의회의 일원으로서 사사로이 물건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뭐 거창한 물건도 아니고 머플러일 뿐인 걸요.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붉은 눈동자가 빤히 모 씨를 바라보았다. 역시 지나쳤나 후회가 되려는 찰나, 리아가라가 웃으며 머플러를 받아들었다. 손등에 스치는 감촉이 서늘해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그냥 받기는 죄송하니, 잠시 같이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정적 속에 모 씨가 차를 꼴깍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기묘할 만큼 아무런 소리도 없이 차를 마시던 리아가라가 곧 딸깍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선물을 거절했던 건 앞서 말씀드린 이유도 있지만… 제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5세기 전 황혼의 시대, 엔지니어들이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가장 뛰어난 지도자와 연구자를 만들어냈을 때의 일입니다.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이룩해 낸 성취에 취해 생각했어요 인간이 아닌 유전자도 . 이용한다면, 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유난히 붉게도 빛났다.

“그들이 인간의 유전자에 삽입한 것 중에는 포유류의 맹수는 물론 뱀과 같은 파충류의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외부에 내세울만한 결과물은 쉬이 얻어지지 않았고, 탐구심만으로 윤리적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소하기를 택했습니다. 힘든 나날이었죠. 모든 연구의 증거를 죽여 없애려는 과학자들의 사이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저를 레드그레이브님께서 발견하고 거두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잠드실 때 따라서 잠이 들었고, 그분이 저를 발견해주신 덕분에 깨어났어요. 아무튼… 뱀은 변온동물이죠. 그러니까 저에게 그런 건 필요가 없어요. 저는 주변 환경에 맞추어 체온이 변하고, 제 자리는 제가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온도를 위해서 조절되어 있습니다. 이해하시겠나요?”

흘끗 쳐다보자 모 씨는 당황한 듯 횡설수설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리아가라 씨의 말씀이니… 하지만 그래서 계속 레드그레이브님께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건가요? 이해는 하지만 더 자기 자신을 위하시는 게…”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제가 저를 죽이려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세요?”

그녀는 뾰족한 송곳니가 도드라지도록 웃었다.

“제가 다 삼켰거든요. 말씀드렸잖아요, 뱀이라고.”

“농담…이지요, 리아가라 씨?”

“제가 농담할 성격으로 보이세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여기에서 직접 한 번 보여드리면 그때는 믿으시려나?”

옅게 미소를 짓고 리아가라는 입을 벌렸다. 아니 벌린 것은 입인데 아가리로 보였다. 입의 안쪽까지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차 있고, 턱이 인대로 이어져 끝없이 벌어지는. 모 씨는 그만 소름이 쭈뼛 돋아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번엔 농담이에요. 그렇지만 이 입으로 키스를 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셨나요?”

리아가라가 다소곳 미소를 짓고 입안에 그득하던 이빨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 씨는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사라졌다.

그런 반응을 원하여 한 말이기는 했지만 조금은 허탈했다. 그녀가 키스도 사랑도 할 수 없는 몸임을 재확인한 기분이라. 물론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돌아왔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또 순진한 사내 하나를 놀리고 온 것인가. 너무 매몰차게 굴지는 말려무나,”

대답은 하지만 레드그레이브의 눈은 공허했다. 틀림없이 새 몸을 얻으면서 장착한 보조전자두뇌로 또 무언가를 계산하는 중이리라.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하필 레드그레이브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저 무심함을 깨뜨리고 싶었다.

“머플러가 생겼습니다만… 제겐 필요가 없으니, 레드그레이브님께서 하시겠습니까?”

리아가라는 대답이 없는 레드그레이브에게 다가갔다. 옥좌에 앉은 채 허공을 바라보는 레드그레이브의 목에 붉은 머플러를 걸었다. 몇 번을 더 둘둘 말았다. 뱀이 똬리를 틀듯이. 머플러의 양 끝을 쥔 채로 리아가라는 잠시 그대로 멈추었다. 이 순간마저도 레드그레이브는 리아가라를 바라봐주지 않는다. 리아가라는 상상해 보았다.

이 입으로 키스를 한다면 어떨지.

아니, 아니었다. 리아가라가 레드그레이브에게 바라는 것은 키스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를 빠득 깨물었다.

“레드그레이브님.”

“용건이 있다면 말하려무나.”

딱히 용건이 없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리아가라에게는 그동안 미루었지만 바로 지금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말이 있었다.

“살가드의 고문서 정리 업무를 대신 처리하다가… 보았습니다. 동물의 유전자를 이용한 생체 실험, 레드그레이브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더군요…”

레드그레이브는 그제야 리아가라를 바라보았다. 공허한 눈에 달리 대답도 변명도 없었다. 완전한 긍정. 리아가라는 허리를 숙였다. 레드그레이브의 목을 감은 머플러를 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주고 괴로워 얼굴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저를 속이셨어요. 아무 것도 몰랐던 저는 뱀이 섞인 제 본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저를 비호하고 중용해 주신 당신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괴로웠던 건 바로 당신 때문인 거예요. 대체… 저를 왜 데려오셨나요? 동정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오점을 거두기 위해서? 그럼 차라리 저를 일찌감치 죽이시는 게 나았을 텐데요! 어째서…”

못마땅한 듯 혀 차는 소리에 리아가라의 말이 뚝 멎었다. 일찍이 레드그레이브가 리아가라를 이렇게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평소보다 조금 분홍빛이 짙은 연보랏빛 눈이, 애달픈 감을 띠고 리아가라를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거니, 리아?”

“…아닙니다.”

“그럼 됐잖니. 너는 내 휘하의 수하들 중 가장 유능하니까. 나는 네가 필요하단다.”

그녀가 다가와 리아가라를 꼭 안았다. 한때는 세상 누구보다도 커 보였던 레드그레이브가 이제는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 집무실의 온도는 오토마타 파츠의 원활한 동작을 위하여 서느렇게 낮다. 리아가라의 체온도 상당히 낮게 맞춰져 있다.

어릴 때는 그래서 레드그레이브의 몸에 닿으면 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기계로 바꾼 몸이 닿는 것도 덥게 느껴지는지, 희고 둥근 이마가 아랫배 위로 닿아오는 데에 리아가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작아서야,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가끔 당신을 삼키고 싶어요.

“왜 울고 있니, 리아?”

“저는 울고 있지 않습… 읍.”

둑 터지듯 넘쳐흐른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꾹 누르고 눌렀는데도 부끄러움, 원망, 황공함, 닿을 수 없는 열망과 갈증 그 무엇도 델 것처럼 뚜렷하여 사라지지가 않아서.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뱀이에요. 믿어 주셨는데, 저는 어쩔 수 없는 뱀인 것 같아요. 잘못했어요. 이렇게 작고 순수한 당신께서는 꿈도 못 꿀 생각을 품은 제가 나빴어요. 자그마한 레드그레이브의 품 안에서 리아가라는 한참이나 흐느꼈다.

그동안 레드그레이브의 보조전자두뇌는 쉼 없이 작동했다. 프로세서 하나가 약간의 불규칙성을 가한 템포로 리아가라의 등을 두들기는 단순 연산을 수행하는 동안, 메인 프로세서는 기밀정보에 액세스하여 제국과 연합왕국 간에 벌어진 교전의 추이를 분석했다. 그러던 중 리아가라가 크게 욱 소리를 내자 몸이 흔들려 연산이 방해되고, 레드그레이브는 리아가라가 더 가벼웠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분석한 정보의 정리에 집중했다.

 

 

2. 보고는 들었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실험으로 태어난 어린아이가 연구원들을 몰살했단다.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실험체로, 그리고 통치자로 수십 년을 살아낼 수는 없었다. 다만 궁금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인류 이상의 존재인 것인가. 특별히 호기심이 이는 까닭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연구실 바닥에 널브러진 인간의 뼈와 말라붙은 핏자국 가운데 앉아 있는 새빨간 아이를 보았을 때도 두렵지는 않았다. 단지 기묘하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겁내지 마,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착하지.”

하지만 아이는 드러낸 이빨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말은 이미 저기 시체가 된 사람들에게 한차례 들었을 것이다.

“믿지 않아도 좋아. 나는 그냥 궁금한 거란다. 왜 이 사람들을 먹었니?”

말이 통하는 상대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아이는 곧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들이 그랬어요. 나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라고. 나에게서 비롯된 사람들은 더욱 강인하게 오래 살게 될 거라고. 나는 살아남아야만 해요. 나를 죽이려는 사람은 죽일 수밖에 없어요.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만 해요.”

레드그레이브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놀란 아이가 휘두르는 손톱에 다리가 찢겨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가 쏟아지는 테이저건에 맞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그랬구나.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게 될 거야.”

그 때도 안아 주면 쉽게 울어버리는 아이였다. 아이의 존재는 물론, 그리 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레드그레이브님, 이번 결정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식인을 한 실험체를 이곳에 데려오신다니요. 레드그레이브님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남들은 레드그레이브님께서 비윤리적인 실험을 이어가신다고 받아들일 겁니다. 레드그레이브님의 이름에 누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정답이로구나. 이번 실험은 내가 지시한 실험이다.”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세계의 통치자였다.

자그마한 아이는 그동안 노출된 지식량이 한정되어 있던 것에 비해 썩 빨리 배웠다. 개체의 개량이 목적인 실험에 뛰어난 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이가 자신을 의심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위태로운 제 처지를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는 썩 열심히 공부했다. 그 모습이 낯익게 어여뻐 보기에 흐뭇했다. 또한 아이는 성장이 더디었다.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 인자가 조정되어 있었다. 그만큼 더 오래 살 터이므로, 아이가 연구원들에게 들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레드그레이브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에 바빠, 여전히 자신이 아이를 왜 데려왔는지 알지 못했다. 작은 여흥을 즐기는 마음으로 아이가 천천히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뱀처럼 동공이 길쭉했지만 머리가 고왔고 눈동자가 크며 속눈썹이 뚜렷했다. 시간이 흐르자 보통의 계집아이처럼 젖가슴도 부풀어 이젠 제법 여자다운 태가 났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는 충동성이 심해졌다. 다른 이들의 걱정대로 뱀이 섞인 아이라 불안정했는지도 모른다.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자꾸 무언가를 깨물려 하는 악벽이 있었다. 특히 레드그레이브를 오랫동안 보지 못할 때 그랬다.

어쩌면 아이는 레드그레이브를 어머니와 같이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드그레이브는 부모처럼 아이를 하나하나 살필 수가 없는 직위였다. 리아가라는 특별관리대상이었지만 그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다가간다면 정을 붙일 수도 있으련만 이미 사람들의 눈총에 크게 데였던 아이는 먼저 다가갈 줄 몰랐다. 레드그레이브가 찾아오는 가끔의 시간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아이의 고독과 갈망이 깊어지고, 어느 날 아이가 초조함에 스스로 깨물어 흉이 잔뜩 앉은 팔을 레드그레이브가 꼭 안아주자 붉은 눈동자가 흔들려 눈물이 고이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레드그레이브는 생각했다.

어째서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을 갈구하게 되고야 마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은 대체 어째서 이 아이를 이렇게 보살펴 온 것인지.

성장한 리아가라는 자연스럽게 레드그레이브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다. 언제나 레드그레이브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려 했으며 강박적으로 일처리를 했다. 레드그레이브는 그 모습을 아이의 투정과 같이 느꼈다. 뇌를 들어내어 여로에 들기 직전에도 그랬다.

“저를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안 돼요, 레드그레이브님… 레드그레이브님이 긴 잠에 드시는데 저 혼자 살다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리아가라가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로 레드그레이브의 뜻에 반하는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인 만큼 레드그레이브가 웃으며 고개를 젓자 반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수술대에 누워 마취에 빠지고 있을 때 리아가라가 난입했다. 틀림없이 리아가라일 것이다. 실랑이가 벌어졌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붉게 긴 것이 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것이 레드그레이브가 긴 잠에 들기 직전에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바닥이 없는 잠 속에서 끝나지 않는 꿈을 꾸었다. 소녀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 대신에 일련번호로 불리었다. 유전자를 개량하여 만들어낸 아이들을 보며 연구원이 말했다.

너희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 태어난 아이들이란다. 그저 함께 있다는 나태한 이유로 당위도 없이 태어난 가족 제도 하의 아이들과는 달라. 날 때부터 목적과 사명을 부여받은 아이들. 너희는 특별하단다. 연구원이 돌아가자 키 큰 소년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가장 유능한 개량종으로 판별되어야 부여받는 특별함 같은 거?”

다른 소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일리는 있지 않아? 나한테 부여받은 목표가 없었다면 대체 뭐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상상도 안 되는걸. 엉뚱한 데에 하루하루 허비하고 있지 않았을까?”

“맞아. 나도 감사하고 있거든. 내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사명에 최선을 다할 거야.”

소녀가 말을 거들자 처음 말을 했던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소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감사하고, 멋진 일이지만, 조금 슬픈 것도 같아. 태어난 데에 이유가 있다는 건…”

“역시 그렇지… 이유 없이 존재를 주는, 가족이 있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예 우리 셋을 가족인 셈 쳐보는 건 어때?”

“네가 원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형제가 되는 건가?”

“와, 이거 정말 괜찮은 기분이네… 그래도 부모나 자식은 얻을 수 없겠지?”

“우리한테는 무리잖아. 나는 먼 훗날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고 생각하지만.”

소년이 다시금 얼굴을 붉히자 소녀는 까르르 웃어버렸다. 눈꺼풀을 접고 웃다가 눈을 뜨니 자신의 머리카락이 붉었다. 연구원 몇 명이 와서 속삭였다. 너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야. 너에게서 비롯된 사람들은 더욱 강인하게 오래 살게 될 거야.

꿈에서 깨어나고 몸을 얻었을 때, 레드그레이브가 잠들어 있던 시설 안에 스스로 동면에 든 리아가라가 있었다. 동결을 해제하고 한참 후에 리아가라는 기적처럼 깨어났다. 수 세기를 거치고도 성치 못한 곳 없이 깨어난 것은 리아가라의 몸이 특별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깨어난 아이에게 어째서 이런 위험한 짓을 했냐고 물어보았다.

“레드그레이브님이 말씀하셨으니까요.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게 될 거라고… 그런데 제가 레드그레이브님보다 짧게 산다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꿈에서 깨달은 바가 맞으리라. 사실을 깨닫자 가슴 한 편이 시큰했다. 이 아이는 세상에 바랐지만 한 번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했던 인정과 애정에 대한 갈망을 전부 레드그레이브 자신에 대한 애정의 형태로 한정하여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이렇게 집착적이고 이렇게 맹목적이다. 씁쓸히 웃는 레드그레이브를 리아가라가 대답을 보채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타고나기를 사람의 마음을 끌도록 태어난 레드그레이브였기에 애정을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넘기는 습관이 있었지만, 리아가라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만인을 동등하게 여겨야만 하는 통치자이지만 리아가라에게는 남들에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마음이 있었다. 아이야, 너는 결코 어머니가 될 수 없는 나에게 한조각의 어머니를 주었다. 나는 네게서 거울을 보았고 어머니로서의 나를 즐겼던 게야.

그러니 레드그레이브는 붉게 선명한 맹목으로부터 점차로 거리를 벌리기를 택했다. 남들보다 유독 더디게 자라는 아이가 닫힌 마음을 서서히 열고 자립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네 첫 사람이었으며 네가 살면서 만나본 중에 가장 강하고 높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사랑받는 것밖에 바라지 못하게 된 아이야. 네 사랑은 자신에 대한 갈망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이 긴 세월 동안 서로에게 뒤엉켜 있다. 그래 서로를 꼭 물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자신의 꼬리를 서로의 것인 줄 알고 물고 있던 것이다.